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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란 무엇인가? 정녕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행을 하면서 혹은 일상 생활 속에서 항상 고민하면서 찾고자 하는 과제였다. 한 마디로 말하기는 더욱 어려워서 굴뚝, 문, 지붕, 담, 도자기, 불상 등 눈에 보이는 조형물과 자연에서 단편적인 한국의 미를 발견하려 했다. 애초부터 언어로 표현하여 형식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보편타당한 한국미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처마를 쳐다보고 있으면 '정녕 한국의 미가 이런 거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 한국의 미(전등사 대웅전 처마)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처마를 쳐다보고 있으면 '정녕 한국의 미가 이런 거구나'하는 느낌이 든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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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선생은 <한국미 탐구>에서 조선백자의 미를 말하면서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라고 했다. 이렇듯 한국미는 이론을 캐거나 따져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도 지금까지 미학자들이 축적한 연구실적을 통해 조금이라도 한국미에 다가설 수 있다면 만족할 일 아닌가?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동양 3국의 도자기를 비교하면서 "조형의 3요소를 형(形)·색(色)·선(線)이라고 할 때 중국도자기는 형태에, 일본도자기는 색채에, 한국도자기는 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중국도자기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 일본도자기는 색채의 화사함과 장식성이 특징이라면 한국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곡선에 있다"고 했다.(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3) '조선백자와 한국문화의 정체성' 중에서 발췌)

야나기는 한국의 조형물, 가령 석굴암, 첨섬대, 지붕처마선, 버선 등에서 무엇보다 선(線)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고 보았다. 즉 선적인 아름다움이야말로 한국예술에 두드러지는 조형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이런 '선적인 요소' 혹은 '선적인 아름다움'이 한국 또는 한국적인 미를 대표하는 것이든, 그것을 해석하는 개념이든 논외로 하고 여기서는 우리 조형물에 담긴 선적인 아름다움 혹은 선적인 아름다움이 담긴 조형물을 감상하는데 한정하기로 한다.

지붕 꼭대기에서 양갈래로 하늘을 가르듯 시원하게 내리 뻗은 지붕선과 몇 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벽체는 직선의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 무위사 극락보전 지붕 꼭대기에서 양갈래로 하늘을 가르듯 시원하게 내리 뻗은 지붕선과 몇 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벽체는 직선의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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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선적인 요소는 직선, 곡선 혹은 직선과 곡선의 하모니일 수 있다. 하늘을 가르는 맞배지붕의 상쾌한 지붕선과 꽃담의 점선무늬, 한옥의 문창살 등은 직선의 아름다움이다. 그래도 한국 선의 본바탕은  곡선에서 찾을 수 있다.

곡선이 세련되고 부드럽다면 직선은 기품이 있어 보인다
▲ 부석사 무량수전 문창살 곡선이 세련되고 부드럽다면 직선은 기품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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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이 보여 주는 선적인 아름다움을 흔히 곡선의 미라 칭한다. 한국미에 대해 풍부하고 함축적이며 독창적인 어휘를 구사한 최순우 선생의 말을 빌려 차라리 '둥근 맛'으로 하면 어떨까? 둥근 멋도 아닌 '둥근 맛'은 시각의 범주를 너머 촉각, 미각을 아우르는 복합적 기능을 하는 언어로 한국미를 표현하는데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렇다면 둥근 맛의 원류는 무엇인가? 우선 둥글둥글하고 잔잔한 우리의 산하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던지 멀리 보이는 산은 모가 나지 않고 둥글게 보인다. 간혹 모가 나서 뾰족하게 서 있는 산을 보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부석사 안양루에 올라 먼 산을 보면 끝을 알 수 없는 고운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이러한 풍광을 보고 수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둥근 선을 보고 살아온 우리는 급하지도 모나지도 않은 심성을 갖게 되었다.

멀리 소백산의 연봉들이 숨죽인 채 곡선을 그리며 얌전하게 자리하고 있다
▲ 부석사 삼층석탑에서 본 정경 멀리 소백산의 연봉들이 숨죽인 채 곡선을 그리며 얌전하게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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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선생은 "한국의 산수에는 깊은 협곡이 패어지고 칼날같은 바위가 용립하는 그런 요란스러운 곳은 적다. 산은 둥글고 물은 잔잔하며 산줄기는 멀리 남북으로 중첩하지만 시베리아의 산맥처럼 사람이 안 사는 광야로 사라지는 그런 산맥은 없다… 이 맑은 하늘 밑, 부드러운 산수 속에 한국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미요, 이 자연의 미가 바로 한국의 미다"라고 하고 있다.

김원용 선생에게 자연의 미는 한국 나름의 온화한 아름다움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한 것이며 그 안에서 자란 작가들이 자연에 순응하며 무아의 자세로 작품에 구현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법상 자연의 미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돌베개, <한국의 미를 다시 읽는다> 중 김원용 편)

이는 고유섭 선생이 말한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과 통하는 말로 그는 한국 미의 특질을 얘기하면서 "조선에는 개성적인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 기교적 미술이란 것은 발달되지 아니하고 일반적인 생활, 전체적인 생활의 미술, 즉 민예(民藝)란 것이 큰 동맥을 이루고 흘러나왔다. 따라서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라고 하고 있다.(돌베개, <한국의 미를 다시 읽는다> 중 고유섭 편)

우리의 초가 지붕은 민중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으면서 둥근 맛이 제대로 나는 민예품이다. 앞산과 뒷산의 둥근 능선은 초가지붕에 그대로 내려앉아 있다. 고성의 왕곡마을에 있는 초가지붕은 오음산의 둥근 산이 사뿐히 지붕 위에 내려앉아 있는 듯 포개져 있다. 초가지붕과 함께 보고 있는 오음산은 마치 엄청나게 큰 초가지붕을 보고 있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오음산 산봉우리가 초가지붕에 내려앉아 있는 듯 지붕과 봉우리가 무척 닮았다
▲ 고성 왕곡마을 초가지붕 오음산 산봉우리가 초가지붕에 내려앉아 있는 듯 지붕과 봉우리가 무척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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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포시 고개 든 팔작지붕 추녀의 곡선은 어떠한가? 중국 것처럼 하늘을 향해 발랑 까뒤집히지도 않았고 일본처럼 잔뜩 오그라져 들어가 답답하지도 않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하늘을 향해 살짝 속 모습을 보인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팔작지붕과 배흘림 기둥으로 안정감이 있을지언정 결코 둔하거나 뚱뚱해 보이지 않은 것은 살짝 고개를 들고 있는 팔작지붕의 처마 때문이다.

사뿐 고개든 처마때문에 안정감이 있을지언정 결코 둔하거나 뚱뚱해 보이지 않는다
▲ 부석사 무량수전 사뿐 고개든 처마때문에 안정감이 있을지언정 결코 둔하거나 뚱뚱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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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승선교, 건봉사 능파교, 안양 만안교, 강경 미내다리, 벌교 홍교 등 우리나라 옛다리는 대개 무지개(홍예)다리다. 물위에 걸쳐 있는 무지개다리는 거의 반원을 이루고 있고 그 반원이 물에 비쳐 완벽한 원형을 이룬다. 선녀들이 타고 내려왔다는 무지개다리를 현실에 옮겨 놓으려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무지개 다리의 으뜸, 선암사 승선교는 자연 속의 무지개를 재연해놓은 듯하다. 물 속에 비친 반원은 물 속에 무지개가 뜬것처럼 보인다. 승선교에 앞서 작은 무지개 다리가 있는데 두 무지개 다리를 함께 보고 있으면 마치 쌍무지개가 뜬 것처럼 보인다. 둥근 멋의 참맛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무지개 다리를 겹쳐서 보면 쌍무지개가 뜬 것 같다
▲ 선암사 무지개다리 두 개의 무지개 다리를 겹쳐서 보면 쌍무지개가 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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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을 연상시키듯 아름다우면서도 아무런 장식이 없는 순백의 둥근 항아리를 우리는 달항아리라고 부른다. 최순우 선생은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미술품에 표현된 '둥근 맛'이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이한 체질의 하나여서 한국의 폭넓은 흰빛과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는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달항아리는 이런 곡선미의 완전한 표현물이다. 최순우 선생은 '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러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없는 어진 마음의 본 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고 하였다.

 달항아리를 보면 어루만지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 달항아리 달항아리를 보면 어루만지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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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맛은 조형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물고기 배처럼 불룩하게 둥글린 저고리 배래선에도 있고 치맛단 아래 살짝 보이는 뽀얀 버선코에도 있다. 불국사 대웅전의 소맷돌을 보고 있으면 정갈한 여인이 신고 있는 버선코가 떠오른다. 버선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몰라도 이런 기교는 우리의 가슴에 깊숙이 자리잡은 정서의 산물이다. 고유섭 선생이 말한 '무기교의 기교'로 개성적이고 천재주의적이며 기교적인 것과 거리 멀다.

정갈한 여인의 버선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 불국사 대웅전 소맷돌 정갈한 여인의 버선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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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의 순박한 미소와 신라수막새의 부드러운 미소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 색채의 화사함과 거리가 먼 또 하나의 둥근 맛이다.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과 둥글둥글하고 몽싱몽실하며 천여스럽고 어린애 같은 잔잔한 미소는 통일신라의 엄숙함에서 일탈한 것이고 정치색이 끼어 들지 않은 둥근 심성을 밖으로 드러낸 것이다.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는 또 다른 둥근 맛이다
▲ 서산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의 미소는 또 다른 둥근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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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맛이 한국의 조형물에 담겨 있든, 조형물로 둥근 맛을 구현하려고 했든 한국의 미에는 둥근 자연 속에서 체득한 한국인의 둥근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맑은 하늘 밑, 부드러운 산수 속에 '한국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것을 바로 한국의 미의 세계'라고 말한 김원용 선생의 말처럼 한국의 미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가능한 실존의 미라 할 수 있다.


태그:#한국의 미, #둥근 맛, #자연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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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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