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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의 설렘이 남아 있는 언덕을 찾은 젊은 부부
 첫 만남의 설렘이 남아 있는 언덕을 찾은 젊은 부부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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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 아직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을이면 꼭 한 번씩 이곳에 오곤 합니다. 특히 둘이 싸웠거나 섭섭한 마음이 들 때면 이 언덕을 찾아옵니다."

앳된 얼굴들이어서 연인 사이인 줄 알았는데 아기가 있었습니다. 이제 돌이 갓 지난 아기가 아빠 품에서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아기와 젊은 부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한사코 사양합니다. 부모님이나 아는 사람들이 보게 되면 너무 쑥스러울 것 같다는 게 이 이유였습니다.

해금강에서 민박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의 언덕을 찾았습니다. 포구로 넘어가는 언덕 위에 오르니 한 뼘 쯤 남아 있던 해가 조금 높아졌습니다. 조용한 작은 포구에는 인근 섬에서 방금 돌아온 여객선에서 내린 노인관광객 30여명이 가슴마다 노란 명찰을 달고 가이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작은 정자가 바라보이는 바람의 언덕
 작은 정자가 바라보이는 바람의 언덕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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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포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몇 척 되지 않았습니다. 방금 돌아온 여객선과 또 한 척의 여객선, 그리고 어선 10여척이 고작이었지요. 포구 바로 앞에는 몇 곳의 음식점과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비스듬한 언덕에도 집들이 있었지만 포구에는 몇 사람의 관광객들과 노인들 외에는 주민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포근하고 고즈넉한 작은 포구

그 작은 포구 건너편에 바람의 언덕이 있었습니다. 푸른 풀밭으로 뒤덮인 그리 높지 않은 언덕 위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지요. 언덕 뒤쪽으로 이어진 동백나무 숲과 소나무 숲이 아직은 짙푸른 빛이었습니다.

포구를 돌아서자 정박해 있는 작은 어선 위에 홀로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커다란 물새 한 마리가 카메라를 디밀어도 별로 놀라는 표정이 아닙니다. 선착장 옆 공터에는 그물들이 널려 있었지만 어부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언덕을 오르는 연인들
 해질 무렵 언덕을 오르는 연인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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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착장 끝에 바람의 언덕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계단길을 오르는 우리들의 앞쪽으로 젊은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걸어 올라가는 모습이 정답습니다. 고즈넉한 포구와 그 옆쪽으로 포근하게 앉아 있는 언덕길에 들면 누구라도 다정한 연인이 될 것 같은 풍경이었지요.

언덕길에 올라서자 앞쪽에 둥긋하게 내려앉은 또 하나의 언덕이 바라보입니다. 아우는 그곳에서 멈춰 섰습니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다리가 불편한 몸이어서 많이 걷는 것이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모양이었습니다.

동생부부를 남겨놓고 아래쪽 언덕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곳이 지금 한창 공사 중인 수중공원이었습니다. 언덕을 빙 둘러 산책로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바라보는 전망이 정말 아름답기 짝이 없었습니다.

오른편 섬 가장자리가 불쑥 튀어나온 안쪽으로 쑥 들어간 벼랑 밑 바위엔 푸른 바닷물이 파도로 밀려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지는 모습도 낭만이 넘쳐납니다. 그 앞쪽 바다 저 멀리 바라보이는 섬은 이국적인 관광 섬 외도라고 합니다.

등대와 바다풍경
 등대와 바다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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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염소들 좀 보세요?"
그리움처럼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와 섬 풍경에 젖어 있을 때 누군가 고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왔지요. 먼저 바라본 것은 염소가 아니라 목소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주인공은 4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사람이었습니다.

염소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는 바닷가 언덕 풀밭

그들은 언덕 벼랑 위쪽의 비스듬한 풀밭을 걸어오며 풀을 뜯는 염소 두 마리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검은 염소들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가 전혀 무섭지 않은지 여유롭게 풀을 뜯으며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공원인데도 염소들을 방목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네가 그들의 말에 답례삼아 염소 이야기를 하자 아주머니들이 미소를 지으며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언덕 위에사 내려다본 수중 전망대
 언덕 위에사 내려다본 수중 전망대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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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가 봐요. 그런데 이런 바닷가 공원에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아주 목가적이고 아름답지 않으세요?"

그녀들은 염소들과 공원 풍경, 그리고 저무는 바닷가의 풍경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좋아 합니다. 가까운 통영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들은 곧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선착장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염소들이 공원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둥긋한 앞쪽으로 향했습니다. 저 아래 넓은 갯바위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낚싯줄을 던져놓고 있었지요. 그러나 고기는 낚이지 않는지 빈 낚싯줄만 걷어 올리고 다시 던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둥긋한 언덕 중앙에 있는 벤치에 젊은 커플이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지요. 뒤에서 보기에도 정말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어서 지켜보다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섬 굽이 풍경
 섬 굽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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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네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몰라, 내가 첫눈에 폭 빠져버렸으니까."
"그래서 은근히 내게 접근 했구나, 엉큼하긴."

옛날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정다워 보여 슬쩍 호기심이 생겼지요, 연인일까? 부부일까?

연인 같은 젊은 부부에겐 사랑의 성지가 된 바닷가 언덕

그래서 옆쪽으로 돌아가 그들을 살펴보았는데 앳되어 보이는 그들 사이에 아기가 있지 않겠어요? 더욱 호기심이 커져 말을 걸었습니다. 연인으로 보였는데 결혼한 부부라고요. 그들은 처음 나의 출연에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아버지 같은 늙수그레한 모습에 안심을 했는지 곧 옆자리로 비켜 앉으며 자리를 권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28세 동갑내기 커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나이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어서 2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였지요. 이들은 4년 전 어느 가을 날 이곳에 놀러왔다가 첫눈에 서로 마음에 들어 결혼한 사이라는 것이었지요. 조금 전 이야기처럼 첫눈에 반해 핑계를 만들어 접근한 것은 남자 쪽이었다고 합니다.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풀을 뜯는 염소들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풀을 뜯는 염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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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혼할 때는 여자 쪽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쳐 한 동안 고전을 했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남자가 아직 대학생신분이라는 것이 문제였답니다. 취업도 하지 못한 남자가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하느냐며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소릴 들었지만, 아들을 신뢰하고 있던 남자 쪽 부모님의 지원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럼 지금은 취업을 했습니까?"
우선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취업하지 못한 대학생이어서 결혼에 어려움을 겪었다는데 아기까지 태어난 아직까지 취업을 못했다면 더욱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 지난봄에 취업을 했습니다. 별로 마음에 드는 직장은 아니지만요."
아기 아빠가 아내를 쳐다보며 대답을 합니다.

"왜? 그 직장이 어때서? 그러니까 나한테 잔소리를 듣지. 괜찮은 직장이에요."
남편이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직장이라는 말이 아내는 못 마땅한 모양이었습니다.

조용한 포구와 어촌 풍경
 조용한 포구와 어촌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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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신혼인데 가끔 부부싸움도 하나 보죠?"
엉뚱한 내 질문에 두 사람이 마주보며 빙긋 웃었습니다.

"자주 싸워요.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으니까요."
아기 엄마가 먼저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당하는 쪽은 아기아빠인 것 같았습니다.

"잘 싸우는데 심각하진 않아요, 그런데 며칠 전에 대판 싸우고 서로 말을 안 하다가 오늘 이곳에 와서 모두 풀었어요."

아기아빠가 말하며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자 아내가 잔잔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이들 부부의 표정에선 며칠 전에 대판 싸우고 며칠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밝고 정다운 표정이었지요. 이들 부부에겐 이 언덕이 어쩌면 '사랑의 성지'인 것 같았습니다.

부산에 살고 있다는 이들 부부는 3일간 휴가를 내 이곳에 왔는데 이날 밤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는 내 인사에 이들은 일어나 인사하며 나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싹싹하고 인사성 좋은 젊은 부부와 헤어져 동생부부가 기다리고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가에는 하얀 억새꽃이 바닷바람에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는 작은 정자와 함께 언덕에서 앉아 쉬며 바다와 포구를 바라볼 수 있는 벤치들이 놓여있었지요. 바다 건너 서산 위에 태양이 걸린 석양 무렵이어서인지 벤치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언덕 위의 텅 빈 벤치
 언덕 위의 텅 빈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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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에 앉아 포구와 건너편 언덕을 바라봅니다. 저녁 무렵의 포구에 관광여객선 한 척이 들어오는 모습이 바라보였지만 따르는 갈매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포구는 여전히 조용한 모습입니다. 포구 안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집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무감각한 안쓰러운 동생의 모습

포구 입구에 서있는 등대는 아직 불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등대 너머 바다에 줄줄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떠있는 부표들은 굴 양식장 표지일 것입니다. 언덕 위쪽에 있는 동백나무 숲이 검은 빛으로 바라보입니다. 그 뒤쪽은 소나무 숲이고요. 동백나무 숲 밑에도 두 마리의 염소가 풀을 뜯는 모습입니다.

"형! 이제 그만 내려가지?"
저만큼 서있던 동생이 어느새 다가와 옆에 앉았습니다. 젊은 시절 스포츠로 성공을 꿈꾸었던 동생은 교통법규를 위반하며 조심성 없이 질주하던 화물차에 받쳐 중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어렵사리 생명은 건졌지만 다리에 장애가 생기고 난 후 스포츠맨의 꿈은 접어야 했습니다. 좌절된 꿈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지요.

"그럼 내려가야지.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참으로 아름답구먼. 저 포구, 저 바다와 섬, 그리고 저 동백나무 숲과 염소들까지…."

"형의 눈엔 모든 경치가 다 아름답게 보이잖아? 나는 별로던데, 뭐가 그리 아름답고 대단하다는 건지? 그래도 형이 멋있고 아름답다니까 아름다운 거겠지."

언덕 위의 동백나무 숲
 언덕 위의 동백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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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발길을 돌리며 아름다운 경치들을 환기시키자 동생이 머리를 끄덕입니다. 동생의 뒤에서 말없이 따르는 제수씨의 모습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집니다. 젊은 시절에 겪었던 엄청난 충격과 좌절, 그리고 상처와 마음의 갈등 때문에 가끔씩 뒤틀리는 동생을 묵묵히 참으며 보살펴온 제수씨이기 때문입니다.

언덕을 내려오고 있을 때 바다 건너 산봉우리 너머로 붉은 가을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해지는 언덕에서 풀을 뜯던 염소 몇 마리는 무릎 꿇고 앉아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지만, 바다도 바람의 언덕도 그냥 조용한 모습으로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바람의 언덕, #수중공원, #젊은 부부,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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