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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능선에서 만난 단풍나무
 서북능선에서 만난 단풍나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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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 줄 서세요. 여기 줄 서있는 것 안 보이세요?”
“아, 네? 미안합니다.”
무심코 다가와 사진 한 번 찍으려다가 무안을 당한 40대 아주머니가 머쓱하여 물러섰습니다.

“선생님! 줄 서세요. 여기 뒤 좀 보세요? 이분들도 모두 사진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는 50대 남자 둘이 사진을 찍으려고 자세를 잡다가 역시 얼굴을 붉히며 물러섰습니다.

“아! 이 봉우리에선 저 표지석이 스타구만, 스타야”
“그러게 말이야, 너도나도 저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저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야.”
“하마터면 우리들도 망신당할 뻔 했잖아?”

정상표지석에서 사진 찍기 북새통

지난 10월 3일 설악산 대청봉 정상 표지석 근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 일행들도 망신을 당할 뻔 했지요. 마침 다른 사람들이 정상 표지석을 중심으로 사진을 찍고 물러나는 것을 보고 다가가려는데 우리들보다 잽싸게 다가선 사람들이 우리 대신 망신을 당한 겁니다.

한계령 등산로 초입 오르막 계단길
 한계령 등산로 초입 오르막 계단길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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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표정의 대청봉 표지석 앞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은 3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사진을 찍을 때까지 기다리려면 10여분 이상 기다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한 사람이 줄을 서 있다가 차례가 되면 다른 일행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함께 사진을 찍곤 했으니까요, 결국 근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돌아섰지요.

여름내 벼르던 설악산 등산은 개천절을 맞아 친구 네 명과 어느 산악회와 함께한 산행이었습니다. 산행은 한계령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라 체력에 맞춰서 설악산 등산코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쉬운 코스를 택한 것입니다.

“어이쿠! 힘들어 여긴 시작부터 계단길이 연속되네 그려.”
그러나 설악산에는 결코 만만한 코스가 없었습니다.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곧 가파른 오르막길이 일행들을 지치게 만들었지요. 잘 다듬어 놓은 돌바닥 등산로와 계단길이 오히려 등산객들을 힘들고 지치게 했으니까요,

우선 첫 번째 봉우리까지 오르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걷는 대체로 평탄한 길이 이어졌지요. 그렇게 한참을 걸어 귀떼기청봉과 대청봉의 갈림길인 삼거리에서 잠깐 쉬며 간식을 들었지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등산객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등산객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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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쪽을 보십시오, 둥글고 하얀 물체가 보이지요? 저곳이 중청봉입니다. 그 뒤쪽에 대청봉이 있습니다.”
40대로 보이는 등산객이 우리들에게 목적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코스로 가는 산악회 멤버였습니다. 우리를 인솔한 산악회는 끝청, 중청을 지나 대청봉에 올랐다가 오색지구로 내려가는 코스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럼 바로 저 앞이잖아요? 거의 다 온 것 같네요.”
이곳까지 힘들게 올라온 일행이 ‘이제 살았구나'하는 표정입니다.
“가깝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정표를 보세요?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시작인걸요, 서북능선을 타고 한참 더 가야 합니다.”

그는 설악산 지리에 매우 밝은 사람 같았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이정표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대청봉까지 거리가 6km나 되었습니다. 결코 얕잡아볼 만한 거리가 아니었지요. 그래도 할 수 있나요. 걸어야지요, 힘들어 하던 일행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앞 사람들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곱게 물드는 설악산 단풍

“자 힘을 내자고, 저 사람들 좀 봐? 저 배낭,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잖아?”
앞에 몇 사람이 엄청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짊어지고 힘든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적게 잡아도 20~30kg 정도는 될 것 같았지요. 그들은 산장 예약을 하지 못해서 밤에 야영해야 하기 때문에 짐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위봉우리와 단풍
 바위봉우리와 단풍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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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새삼스럽게 가벼운 배낭이 고마운 마음이 들어 더욱 열심히 걸었지요. 서북능선 길에서 바라본 설악연봉들은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롭게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형형색색으로 물든 단풍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기막힌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저 아래쪽 바위산들 좀 봐? 역시 설악이야 설악!”
걷다가 일행들이 또 감탄을 합니다. 귀떼기청봉에서 백운동 계곡으로 이어진 새하얗게 보이는 바위산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더구나 길가 절벽 위에는 새빨간 마가목 열매들이 지천으로 열려있었는데 그 열매들 너머로 바라보이는 하얀 바위산들의 모습이 정말 환상적인 풍경이었지요.

“역시 설악은 가을이야, 가을, 그런데 대청봉은 왜 이렇게 나타날 줄을 모르지?”
삼거리 갈림길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한참을 걸었는데도 대청봉이 나타나지 않자 힘들어하던 일행이 다시 푸념을 합니다.

건너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땐 가까워보이던 봉우리가 멀기만 했습니다. 우리들이 열심히 걸어 다가가는 만큼 대청봉은 자꾸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지요. 더구나 힘든 산행에 다리가 아파 쥐가 나는데 걷기 힘든 너덜바위길이 자꾸만 발길을 더디게 하고 있었지요.

붉은 마가목 열매와 단풍, 그리고 바위봉우리
 붉은 마가목 열매와 단풍, 그리고 바위봉우리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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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이요? 아직 멀었어요. 앞으로도 두 시간은 더 걸어야 할 걸요?”
너무 지친 일행이 앞쪽에서 오고 있는 다른 등산객에게 물으니 아직 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뒤돌아설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한계령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그 거리가 대청봉 가는 길보다 오히려 더 멀었기 때문입니다.

걷고 또 걸어도 머나먼 대청봉

지친 일행과 함께 다시 주저앉아 쉬면서 힘을 보충하기로 했지요. 초콜릿 과자와 과일을 먹으며 잠깐 쉬었다 일어나자 조금은 회복이 된 듯 했습니다. 이제는 목적지는 생각하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걷기로 했습니다. 그야말로 요산요수하기로 한 것이지요. 단풍이 물드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한껏 여유롭게 걸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높지 않은 봉우리에 올라보니 끝청입니다. 끝청에는 상당히 커다란 바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앉아 쉬기 좋은 바위에 올라 물 한 모금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니 경치가 그만입니다.

골짜기 건너편의 귀떼기청봉은 여전히 가까워 보입니다. 멀리 점봉산이 흐릿한 연무 속에 아련한 모습이고, 골짜기 아래 새하얀 바위봉우리들도 서북능선에서 바라볼 때보다 조금은 더 선명하게 다가왔지요.

중청봉에 물든 단풍
 중청봉에 물든 단풍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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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다 온 셈이야, 곧 중청과 대청봉으로 이어질 테니까.”
“그렇지? 여기까지 왔는데, 대청봉에 다 온 셈이네.”
힘들어하던 일행도 안심이 되는지 얼굴에 함빡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끝청에서부터는 힘들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조금 걷자 저만큼 앞에 중청봉이 바라보입니다.

커다란 공처럼 하얗고 둥그런 시설물 아래 산자락이 울긋불긋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색이 유난히 선명한 모습입니다. 중청봉은 군사시설물 지역이어서 산자락을 우회하여 대청봉으로 향했습니다.

중청대피소는 몰려든 등산객들로 와글와글한 모습이었습니다. 따뜻한 라면 한 개씩 먹고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그냥 대청봉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다른 일행들보다 뒤쳐졌는데 시간을 많이 지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대청봉을 오르는 완만한 경사면 양쪽에는 하늘을 향하여 위로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자란 짙푸른 눈잣나무들이 유별난 풍경입니다. 그 눈잣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서있는 나무들은 눈주목인데 이 주목들도 태백산이나 덕유산에서 본 주목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 눈잣나무와 눈주목은 남쪽지방의 산에서는 볼 수 없는 북방계 고산식물들입니다.

대청봉에서
 대청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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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봉 정상에 올라서니 시야가 온통 시원합니다. 막힌 곳 없이 일망무제로 펼쳐진 전망이 그야말로 천하경승입니다. 공룡능선과 화채능선, 용아장성으로 줄줄이 뻗어  내린 산줄기들이 한없이 우람하고 역동적인 모습입니다.

아! 대청봉, 끝없이 펼쳐진 일망무제 천하경승

연무 때문에 희미하긴 했지만 새하얀 맨몸을 그대로 드러낸 기암괴석 바위봉우리 연봉들이 줄줄이 이어진 모습은 이 세상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장관이었지요. 먼저 정상에 올라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과 합류하여 정상 표지석 근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간단하게 간식을 먹은 다음 하산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시간이 어느새 오후 4시가 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계령에서 11시에 출발했으니 벌써 5시간이 경과한 것입니다. 대청봉 정상에서 오색지구까지 거리가 5km. 내려가려면 적어도 2시간 30분에서 3시간이 걸린다고 했으니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려면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에 오를 때는 힘들어했지만 내려가는 길에는 아주 능숙한 일행들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걸어 내려가던 다른 등산객들이 계속 뒤로 밀려났습니다. 우리 일행들의 내려가는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입니다.

대청봉 산자락의 눈잣나무와 눈주목
 대청봉 산자락의 눈잣나무와 눈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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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이거 안 되겠어, 속도 좀 줄여야지 이대로 가다간 무릎이 온전치 못할 것 같아.”
내가 내려가는 속도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대청봉에서 오색으로 내려가는 길은 거의 급경사였는데 대부분 나무계단과 돌층계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층계 길을 빠른 속도로 내려가려니 발걸음이 쿵쿵 거려 허리와 다리에 너무 무리가 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산하는 다른 등산객들이 속도가 느린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들만 쿵쿵거리며 뛰어 내려가다가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요. 내려가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습니다. 길에서는 걷기에 힘이 들어 주저앉아 있거나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조심조심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래도 산길은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곳곳에 곱게 물든 단풍나무들이 서있고 그런 단풍나무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부부와 연인들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길만 완만하다면 여유롭게 걸으며 아름다운 풍치에 젖어들기에 아주 좋은 모습이었습니다.

급경사 내리막 돌계단 길에서는 조심조심 천천히 내려가야

그런데 그렇게 1시간 30여 분을 걸었을 때 드디어 무릎에 신호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뻐근한 느낌과 함께 왼쪽 무릎이 욱신욱신 아파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많이 남았는데 무릎이 아파오는 것은 여간 불길한 신호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중청대피소와 대청봉 오르는 길
 중청대피소와 대청봉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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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더 늦춰 천천히 걸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파른 돌계단 내리막길엔 나처럼 다리나 무릎이 아파 잘 걸어 내려가지 못하고 쩔쩔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걷는 사람도 있었고 길가에 주저앉아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무릎이 아픈 다리를 억지로 끌며 2시간가량 내려오자 평탄한 길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도 잠깐이었고 다시 오르막길이 나타났습니다. 나무계단 길이었지요.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모두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 계단을 다 올라갔을 때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제법 넓은 쉼터가 나타났습니다. 쉼터엔 힘들게 계단을 오른 등산객들 10여 명이 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잠시 쉬어 가기로 했지요.

“아구구!”
“철퍼덕!”
그런데 쉼터에 주저앉으며 너나없이 비명을 지릅니다. 주저앉는 것도 앉는다기보다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나동그라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내려오는 돌계단 길에서 지치고 다리가 너무 아픈 때문이었지요.

하산길의 돌계단과 단풍
 하산길의 돌계단과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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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이상 등산객들 대부분이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일부 젊은 등산객들은 피로한 기색이나 쉼터에 관심도 보이지 않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지나가기도 했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설악산 산행은 오르는 길보다 내려오는 길에서 녹초가 되고 말았어.”
“그러게 말이야. 급경사 길이어서 계단은 안전상 꼭 필요하겠지만 아주 천천히 내려오지 않으면 무릎관절들이 배겨내질 못할 것 같아.”

일행들은 하산길 초반에 너무 무리하게 빨리 내려온 것이 화근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돌계단 길을 내려올 때는 조심조심 천천히 내려와야 하는 것을 너무 서두른 것입니다.

오색지구 주차장에 도착하니 저녁 6시 30분. 한계령에서 산행을 시작한 지 7시간 30분이 걸린 것입니다. 주변은 이미 어둠에 휩싸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산악회에서 준비해놓고 기다린 소주를 곁들인 저녁식사가 일행들의 피로와 아픈 다리의 고통을 많이 씻어주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설악산, #대청봉, #한계령, #오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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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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