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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낮의 더위가 31도를 웃돌던 때가 엊그제인데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얇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찬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덜덜거린다. 교실에 들어가면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늘 열어 놓았던 창문은 바람 하나 들어올세라 꼭꼭 닫아 놓았다. 벽에 착 달라붙어 요란하게 삐걱거리던 선풍기도 모처럼만의 휴식에 얌전하다.

 

점심시간.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는 동시에 복도는 마라톤이 시작된다. 우당탕탕. 팔팔한 여고생들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휙휙 달려간다. 그렇게 달리면서 꼬박꼬박 ‘안녕하세요!’ 인사는 한다. 어쩌다 어깨라도 부딪치면 ‘헤헤’ 한 번 웃는 걸로 무마한다.

 

아이들은 먹고 또 먹는다. 쉬는 시간만 되면 매점으로 달려간다. 그래서 매점은 늘 만원이다. 일찍 등교하는 아이들은 아침부터 매점에서 파는 부침개를 먹는 걸로 때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4교시 종이 울리자마자 식당으로 달려가는 것이 꼭 배가 고파서만은 아니다. 일찍 먹고 많이 놀고 쉬기 위해서기도 하다.

 

솔직히 학교에서 먹는 밥이 맛있는 건 아니다. 간혹 설익은 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아이들은 털털대면서도 다 먹는다. 어떤 아이들은 조금 밖에 주지 않았다고 인상을 쓰기도 한다. 밥인심은 후할수록 좋다고 했는데 그리 후하지가 않아 종종 아이들의 불만 섞인 소리를 듣기도 한다.

 

"꿈을 이룰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점심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데 보라라는 아이가 몰래 다가와 깜짝 놀래킨다. 내 깜짝 놀란 표정에 까르륵 대던 녀석은 대뜸 ‘심심해요’ 한다.

 

“그래? 너 그럼 나랑 약수터로 산책 갈래?”

“약수터가 어디 있는데요?”

“약수터가 어디 있는지 몰라? 5분 거리에 있어. 한 번 가볼래?”

“네. 가보고 싶어요.”

 

보라를 데리고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약수터로 향했다. 학교가 산자락 아래에 있는 관계로 주변엔 논과 밭이 있고 작은 웅덩이와 미나리 밭도 있다. 봄이 되면 웅덩이와 미나리 밭엔 올챙이들이 꼬물대며 생명의 탄생을 알린다.

 

가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반 아이들과 함께 올챙이 관찰을 나가곤 했다. 아이들은 올챙이를 손으로 잡아 보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곤 신기하다 듯이 바라보며 조잘대곤 했다.

 

약수터 가는 길 옆 산자락엔 인근 주민들의 부지런함이 자라고 있었다. 한 평 정도의 땅을 중간중간 일구어 호박, 콩, 들깨, 토란, 도라지 등을 심어놓았다. 보라한테 식물들을 가리키며 이것저것 물어보니 제대로 대답하는 게 없다.

 

“너 이건 뭔지 아니?”

“물방울 굴리며 장난치는 거요.”

 

토란을 묻자 보라는 물방울 굴리며 장난치는 거라고 대답한다. 대답을 하고도 좀 우스운지 내 얼굴을 바라보곤 웃는다. 생각해보니 이런 모습이 어찌 이 아이 혼자만의 모습일까 싶다. 요즘 도시 아이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보라의 모습일 텐데 말이다. 보라와 짧은 길을 걸으며 이러저런 이야길 하다 보니 교실 수업이란 게 삶과 동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야, 공부는 지금 우리처럼 해야 하는데 말야.”

“네, 맞아요.”

“교과서 속의 그림만 보니 전혀 알 수가 없잖아. 직접 관찰하고 만져보면 산지식이 되어 잊어버리지 않을 텐데.”

“그럼 우리 다음에 야외수업해요."

"야외 수업? 좋긴 한데 너희들 솔직히 이런데 관심 없잖아. 안 그래?"

"히히, 그렇긴 해요."

"야외 수업은 단풍들 때 하기로 하고 오늘은 너와 나만의 수업 아닌 수업을 하는 걸로 하지 뭐."

 

이런저런 이야길 하며 약수터에 도착하자 나이 드신 노인들이 물을 받고 있다. 빨간 바가지에 물을 받아 한 잔씩 마시니 속이 시원하다. 보라도 2년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약수터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지 연신 조잘댄다. 돌아오는 길엔 공부 이야길 했다.

 

"어제 잠은 좀 잤니?"

"아뇨. 2시간 정도……."

"너 내가 말했지. 니가 정말 원하는 대학 가려면 최소한 5시간 이상 자라고. 너 그러다 목적지에 가기도 전에 쓰러질 수 있어."

"괜찮아요. 일요일에 다 자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부스스한 눈이 투명한 안경 속에서 웃고 있다. 그런데 내 눈에는 그 미소가 너무 안쓰럽게 보였다. 보라가 하루 취침하는 시간은 평균 2시간 반이다. 3시쯤 자서 5시나 5시 30분 쯤 일어난다. 새벽 3시까지 보라는 책과 씨름하고 다시 일어나 문제집을 풀다 등교한다.

 

그래서 늘 잠이 부족하다. 수업시간에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고갤 숙이는 모습을 가끔 본다. 그때마다 난 녀석에게 주문처럼 하는 말이 '잠 좀 자라'이다. 그때마다 녀석은 '괜찮아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라고 말하지만 내 눈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보라는 회계사가 되는 게 꿈이다. 그래서 대학도 서울의 모대학의 회계학과에 가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성적으론 조금 부족하다. 그래서 녀석은 잠도 자지 않고 책과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무모할 정도로 잠을 자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보라와 같은 아이가 어디 한두 명 뿐이겠는가. 대한민국 어디 가나 고등학교 아니 이젠 초중학교에 다니는 많은 아이들이 보라와 같은 생활을 할 것이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 보라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 갈수록 불안해요. 제 꿈을 이룰 수 있을지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가엔 미소를 띠었다. 1년이 조금 더 흐른 후 녀석의 미소가 정말 기쁨의 미소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른다. 아마 녀석은 기쁨의 미소를 띠기 위해 2시간 내외의 잠만 자고 공부를 할 것이다. 선생인 난 그런 녀석에게 주문처럼 계속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잠 좀 자라 잠 좀 자!'


태그:#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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