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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 장병들 정신에 저해 요소가 될 수 있다며 군내 반입을 불허한 불온서적 목록을 공개해 논란을 초래했던 국방부가 이번엔 교육과학기술부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또 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18일 국방부가 공개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개선요구' 내용을 현재 고등학교에서 한국 근현대사 수업을 하고 있는 교사인 이기원 시민기자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내용이다. 이 기사에선 국방부가 요구한 25개 항목 중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군정의 친일관리 채용 ▲제주도 4·3 항쟁 ▲이승만 정부와 친일파 처벌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 ▲미국의 잉여 농산물 ▲박정희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력 문제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논란①] 미군정의 친일관리 채용 문제

 

현행 교과서 서술 - 미군정은 한국인의 자치적 행정과 치안활동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일제하에서 일했던 친일관리들을 계속 채용했다.(금성 교과서 257쪽)

 

국방부 수정 요구안 - 미군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본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 자치활동을 도입했고, 한국인의 참여를 보장하는 등 한국인이 민주적 자치경험을 쌓도록 하였다.

 

남쪽에 주둔한 미군은 자신들이 실시하는 군정만이 유일한 정부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 군정청에 필요한 한국인 관리는 주로 한국 민주당 계열의 인물로 채웠다. 당시 한국 민주당은 일제하에서 지주와 기업가였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이다.

 

일제하에서 지주와 기업가로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지배에 동조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채용한 미군정의 정책을 "한국인의 참여를 보장해주고 한국인의 민주적 자치경험을 쌓도록 했다"고 서술할 수 있을까.

 

미군정은 친일 세력을 채용했다. 일본에 충성하던 친일 세력은 미국에도 충성을 바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일본의 패망으로 몰락의 위기를 맞았던 친일 세력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다시 부활했다.

 

한국인의 참여가 보장되고 한국인의 민주적 자치경험을 위해 한국인들이 고용된 게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세력의 유착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이다.  

 

[논란②] 제주도 4·3 항쟁 문제

 

현행 교과서 서술 - 1947년 제주도에서 … 국민은 책임자 처벌을 요구 … 그런데 군정당국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무력으로 탄압하였다.(대한교과서 256쪽)

 

국방부 수정 요구안 - 남로당은 1948년 전국적인 파업과 폭동을 지시했고, … 제주도에서 4월 3일 발생한 대규모 좌익세력의 반란 진압과정에서 주동세력의 선동에 속은 양민들도 다수 희생된 사건이다.

 

4·3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28주년 3․1운동 기념 제주도 대회였다. 오후 2시경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이 거리행진을 시작했다. 이 무렵 말을 탄 경관의 말발굽에 치어 한 어린이가 쓰러졌다. 기마경찰은 이 상황에서도 그대로 가려고 했다. 성난 군중들이 항의하며 돌을 던졌다. 당황한 경관은 군중들에게 쫓겨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 순간 총성이 잇달아 울렸다. 이 총격으로 6명의 주민이 죽고, 6명은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중에는 젖먹이를 안고 쓰러진 스물한 살의 어머니도 있었고, 허두용이란 소년은 제주 북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희생자 중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 이 사건 후 경찰은 성난 민심을 수습한 게 아니라 무력 탄압을 일삼았다. 이 결과 민심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4·3 항쟁은 경찰의 과잉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민심을 외면한 채 강경 탄압을 지속해서 대규모 저항을 불러온 것이다. 

 

[논란③] 이승만 정부와 친일파 처벌 문제

 

현행 교과서 서술 - 반공정책을 친일파 처리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의 활동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천재교육 278쪽)

 

국방부 수정 요구안 - 이승만 정부는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법을 만들어 559명을 조사하고 38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사회 안정과 반공체제가 시급해짐에 따라 철저한 처벌로까지는 가지 못하였다.

 

친일파 처벌 문제는 해방 직후부터 거센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미군정의 옹호를 받은 이들은 도리어 고위 관리가 되어 행정을 담당하거나 민족 지도자 행세를 했다. 정부가 수립되자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시 높아졌다.

 

이에 국회에서는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만들고,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요 친일파에 대한 체포와 조사에 나섰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행정부나 경찰의 주요 자리에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을 등용했던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처벌에 소극적이었다. 더 나아가 반민특위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직원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반민족행위자의 범위를 크게 좁히고 친일파 처벌의 기한을 줄임으로써 반민특위의 활동을 사실상 막아버렸다.

 

[논란④] 이승만 독재 문제

 

현행 교과서 서술 - 이승만 정부의 독재화(금성출판사 325쪽, 소단원 제목)

 

국방부의 수정요구안 -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완성시킨 이승만 대통령으로 제목 수정

 

이승만 정부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완성시켰다는 걸 강조하자는 얘기인데, 그 자유민주주의 체제란 것이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6·25 전쟁 중 부산에서 경찰과 군대, 폭력단을 동원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사사오입까지 해서 억지로 개헌안 가결을 선포하고, 3·15 부정선거까지 감행한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완성시킨 대통령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논란⑤] 미국 잉여 농산물 도입 문제

 

 

현행 교과서 서술 - 미국의 값싼 잉여 농산물이 … 국내의 밀이나 면화 생산은 커다란 타격(금성출판사 325쪽)

 

국방부 수정 요구안 - 한국 경제는 미군정의 긴급조치로 급격한 불안정 상태를 극복할 수 있었다.

 

미군정의 식량 원조 정책이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가본데, 금성교과서 325쪽의 특정 구절을 강조하지 말고 전체적 맥락을 살려 읽어보자.

 

미국에서 들어온 농산물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소비재 중심의 공업 발전에 비해서 생산재 부분은 여전히 부진을 면치 못하여, 공업 부분의 불균형이 심해졌다.

 

미국의 농산물 원조는 생산 과잉으로 자국 내에서 농업 공황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 정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필요 이상으로 들여왔다. 이로 인해 농산물의 가격이 떨어져 농가 소득이 낮아지고, 농민의 생산 의욕도 줄어들었다. 또 미국의 값싼 잉여 농산물이 공업 원료로 사용됨으로써, 국내 밀이나 면화 생산은 커다란 타격을 받고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교과서에는 '미국 농산물 도입이 식량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그럼에도 국방부는 이 부분은 언급하지 않고, '미국 농산물 원조로 인해 밀과 면화 농사가 사라져버렸다'는 내용조차 고치라고 요구하고 있다.

 

어린시절 보리밭, 밀밭, 목화밭은 농촌에서는 아주 친근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 전통 농산물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미 농산물 도입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논란⑥] 박정희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력 문제

 

현행 교과서 서술 - 헌법 위에 존재하는 대통령(금성출판사 288쪽 소제목)

 

국방부 수정 요구안 - 민족의 근대화에 기여한 박정희 대통령

 

'긴급조치란' 게 있었다. 유신체제 하에서 헌법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권리로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었던 권한이었다. 유신헌법에 따르면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 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될 때' 시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긴급조치는 권력에 도전하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게 1974년 1월이었고, 9호가 발표된 게 1975년 5월이었다. 1년 5개월 동안 무려 9번의 긴급조치가 시행되었다. 그 내용도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이나 개헌 주장 일체 금지, 대학생들의 집회와 시위 금지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 정도면 헌법 위의 대통령이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에 기여한 대통령이라 제목을 붙여야 할까.

 

역사는 사실 그대로 배우는 게 바람직하다

 

국방부의 수정 요구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미군정을 비롯해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의 통치를 긍정적 측면으로 서술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확대해석 하는 건 역사 왜곡이다. 일본의 후쇼샤 교과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축소와 확대해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우고 이해한다는 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배우고 그 속에 담긴 진실과 교훈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적 사실의 축소, 확대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배우고 이해하는 게 바람직하다.


태그:#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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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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