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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의 오지 암자 기행 겉그림
▲ <하늘이 감춘 땅> -조현의 오지 암자 기행 겉그림
ⓒ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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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만경. 개구쟁이 정씨 소년은 마을 친구들과 산에 놀러갔다가 개구리 30마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속에 담가 둔다. 노는데 정신이 팔린 소년은 잡아둔 개구리는 까맣게 잊고 집에 돌아온다. 이듬해, 소년은 친구들과 함께 다시 그 자리를 지나치게 된다. 아뿔싸! 지난 해 버들가지에 꿰어 물속에 던져두었던 개구리들이 여전히 울고 있지 않은가!

고통스럽게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본 소년은 충격에 휩싸인다. 재미삼아 무심코 했던 행동으로 고통 받는 생명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이 몰아쳤다. '다른 생명들을 고통에서 구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소년이 참회의 마음으로 택한 것은 출가. 겨우 12살이었다.

훗날, 깨달음을 얻어 법상종을 창시하고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과 오랜 동안 계속되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삼국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진표의 출가동기이다. 예나 지금이나 읽을 때마다 무심코 하는 행동이나 말 한마디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다.

“아무리 죄업이 무거워도 지성으로 기도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 너도 지장보살과 미륵보살께 지성으로 참회하여 계를 직접 받도록 하라”며 진표가 출가한 지 10년 되던 해 스승 숭제가 권한다.

진표의 일화로 유명한 변산 부사의 방(암)
 진표의 일화로 유명한 변산 부사의 방(암)
ⓒ 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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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가 참회 정진 수행지로 정한 곳은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위인 부사의방. 그는 쌀 스무 말을 쪄서 말린 후 목숨을 겨우 연명할 정도인 쌀가루 다섯 홉을 하루 몫으로 정해 비바람 몰아치는 절벽 위에서 정진한다. 진표는 이때 다섯 홉 중 한 홉은 날마다 다람쥐에게 줬다고 한다. 

애초에 작정한 1년이 지나 3년을 정진해도 그토록 바라는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을 만나지 못하자(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그는 낙담한다.

그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 지난 날 뭇 생명들을 고통에 빠뜨린 자신의 악행(죄업)을 씻을 수 있는 길을 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길을 현생에서 갈 수 없다면 구구하게 목숨을 잇느니 하루라도 빨리 그 길을 갈 수 있는 인연으로 태어나 그 길을 갈 수밖에! 이렇게 결심한 그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만다.

…(중략)밧줄을 타고 내려가니 천 길 낭떠러지 옆으로 겨우 한사람이 지나다닐만한 공간이 이어져 있다. 그 길을 티고 10여 미터 옮겨가니 서너 평의 평평한 공간이 나온다. 부사의방이다. 한쪽은 털구멍 하나 없는 바위벽이요, 다른 한쪽은 현기증이 일 정도로 까마득한 벼랑뿐이다. 진표가 오기 전부터 다람쥐절터로 불렸다는 이곳에 어떻게 다람쥐가 아닌 사람이 머물 수 있을까? 그런데 진표는 이곳에서 3년을 머물며 수도했다고 하니 어찌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변산 '부사의방' 편에서

예나 지금이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부사의방’이 아닌가 보다. 진표처럼 뜻하는 일에 목숨을 내던질 각오가 있는 사람에게나 그 속살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진표의 일화로 꽤 많이 알려진 곳인데, 정작 이곳을 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부사의방을 직접 찾은 여행기는 이번에 처음 읽었다.

<하늘이 감춘 땅>에서 만나는 저자의 발걸음도 부사의방을 담은 사진도 오금이 저릴 만큼 을 아슬아슬, 위태롭다. 아스라한 절벽에 걸쳐진 100자는 족히 되는 나무 사다리를 위태위태하게 하나씩 밟고 올라가, 다시 누군가 매어놓은 밧줄에 의지하여 공중에서 대롱대롱 매달리듯 움직이는 과정을 지나 저자는 부사의방에 이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묻는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절망해 죽음을 선택할 만큼 나약하지만, 자신의 몸을 던지며 뜻하는 바를 기어코 이룰 만큼 금강처럼 단단한 것인가. (중략) 지장보살이 누구인가. 온 중생을 지옥에서 나가도록 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옥을 지키겠다고 서원한 보살이다. 미륵은 미래에 온 중생을 구제할 보살이다. 개구리에게 한없는 고통을 준 이는 누구이며, 만 중생을 구제한 이는 누구인가. 죄인과 부처는 둘인가. 하나인가. 백척간두에서 한 발 나아가지 못하면 참 나를 구할 수 없고, 절망의 끝이 희망의 시작이라고 했던가.-책속에서

<하늘이 감춘 땅>(한겨레 출판)은 한겨레 종교 전문기자인 조현의 오지 암자 여행기다.저자의 발길이 닿은 곳은 29곳. 운문사 외엔 부사의방처럼 일반인들에게는 그 속살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첩첩산중 암자와 토굴들이다.

책속 글 '하늘이 감춘 땅' 시리즈가 <한겨레>에 연재되자 독자들은 물론 스님들까지 “우리나라에 정말 그런 곳이 있느냐?", "어떻게 그런 곳들을 알아냈느냐?”는 질문이 쏟아질 만큼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다.

운문사를 방문해 신기한 듯 천장을 바라보는 티베트 스님들
 운문사를 방문해 신기한 듯 천장을 바라보는 티베트 스님들
ⓒ 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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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절에서 한참을 더 깊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암자, 그 암자에서 다시 몇 시간을 걸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 산짐승들이나 알 수 있을 만큼 깊은 곳들이다. 요즘에는 어지간한 첩첩산중에서도 인터넷이 열린다는데, 전기도 전화도 없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일일이 져 나른 식량까지 떨어지면 풀뿌리나 산열매를 얻어먹어야만 할 만큼 외진 곳들이다.

750년간 해인사 장경각에서 고요히 잠자고 있던 고려대장경을 컴퓨터 이용자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화한 종림 스님이 머물고 있는 '지리산 금대'는 신라 태종무열왕 3년에 행호 조사가 창건, 수많은 수행자들이 정진했던 곳이다. 특히 보조국사 지눌의 법맥을 이은 혜심은 이마가 눈에 묻혔음에도 아랑곳없이 고목처럼 앉아 수행했다고 한다.

지리산 8부 능선쯤에 걸쳐 있어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 악양 들판이 한눈에 보이는 ‘기원정사’ 편에는 ‘절보다 더 절 같고, 스님보다 더 스님 같은’ 제목이 붙었다. 수행 정진에 뜻을 둔 재가불자들이 마음과 돈과 노동을 십시일반, 진흙 속에 그윽하게 핀 연꽃처럼 밝고 향기로운 재가불자들의 수행 도량이기 때문이다.

아랫마을 사람들의 거센 반대를 녹인 대덕행 보살의 묵묵한 보살행과 노래 <멍텅구리> 이야기는 특히 인상 깊다. 아직은 챙겨줘야 할 것들이 많은 내 아이들이 독립할 수 있는 성인이 되면 단 한번만이라도 이곳에 찾아들어 삶의 여정을 참회하고 내 자신을 돌아보리라. 책을 읽으며 감히 발원(뜻을 세우다)해본 곳이다.

이곳(지리산 기원정사)에선 대접하는 주인도 대접받는 객도 따로 없다. 누구나 와서 수행하면 그가 바로 주인이다. 기원정사 문에 들어서서 대덕행 보살과 태허 거사처럼 아무런 대가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온종일 자기 몸을 보시해버린 보살도를 한나절만 지켜보면 자기도 모르게 참선만 아니라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길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밭일과 공양간 일(부엌일)에 앞장서면서도 대접받는 왕과 왕비보다 더 자족한 미소를 머금게 된다. -책속에서

-암자가 있는 산아래가 망망대해처럼 보인다.
▲ 무등산 규암 -암자가 있는 산아래가 망망대해처럼 보인다.
ⓒ 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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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과 끝없는 바다가 보인다.
▲ 달마산 도솔암 -해남과 끝없는 바다가 보인다.
ⓒ 김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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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서옹,서암. 현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 이렇게 네분 종정이 수행한 곳이다. 한때 수경스님도 수행한 곳이란다.
▲ 운달산 금선대 -성철,서옹,서암. 현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 이렇게 네분 종정이 수행한 곳이다. 한때 수경스님도 수행한 곳이란다.
ⓒ 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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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상견성암에서 만나는 청화스님의 묵언정진, 달마산 도솔암에서 만나는 인도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땅으로 왔다는 달마, 지리산 벽송사에서 만나는 지리산 빨치산들과 변강쇠와 옹녀, 변산 월명암에서는 부설 거사와 묘화, 등운 조사와 월명의 이야기를 야릇 애틋하게 만날 수 있다.

두만강 너머 간도 일광산 범바위는 수많은 중생들이 비적들에게 목숨을 위협 당하자 대중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수월 선사의 일화가 스민 곳이다. 무등산 석불암에서 만나는 대정 스님의 애끓는 사모곡, 함께 사는 중생들과 도솔암과 백렴암에서 홀로 수행하는 선승들의 뒷바라지를 하고자 타고 다니던 차까지 팔아버린 범종 스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태백산 홍제골이다.

욕망을 향해 끝없이 질주만 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이 언젠가는 돌아가 참회해야 하는, 문명과 문화를 거부한 우리안의 아마존이랄까. 저자는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희망을 위해 하늘이 꽁꽁 숨겨둔 땅과 그 곳에서 정진수행을 하는 선승들의 모습을 들려준다. 일반인들로서는 결코 쉽게 갈 수 없는 그곳들을 담은 사진들도 눈길을 오래오래 붙잡는다.

“개발과 욕망이 광풍 속에서 아마존 밀림의 속살마저 송두리째 파헤쳐지고 있는 이때, 우리 안엔 하늘이 감추어둔 곳들이 있었고, 그 곳을 지키는 이가 있었다.” -저자의 말 중에서

그들은 왜 이렇게 외진 곳에서 목숨까지 위태로운 위험을 감수하고 수행을 할까? OECD에 가입한 30개국 중 자살률 1위 행복지수 30위, 세계 179개국 중 행복지수 102위가 우리의 현실이다. 오지의 암자에서 만난 선승들로부터 우리의 이런 아픈 현실을 치유해 줄 희망과 빛을 보았다면 지나칠까? 힘들고 팍팍한 삶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감미롭고 웅숭깊은 약수 한 대접을 얻어 마신 기분이랄까?

덧붙이는 글 | <하늘이 감춘 땅>-조현의 오지 암자 기행/조현 지음/한겨레 출판/2008.8./14000



하늘이 감춘 땅 - 조현의 오지 암자 기행

조현 지음, 한겨레출판(2008)


태그:#여행, #선(禪), #암자, #불교, #인문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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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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