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발트 3국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국제 버스 회사인 에코라인 버스의 모습. 이 버스는 1박 2일을 내달려 모스크바로 향한다.
 발트 3국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국제 버스 회사인 에코라인 버스의 모습. 이 버스는 1박 2일을 내달려 모스크바로 향한다.
ⓒ 서진석

관련사진보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럽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바로 기차 여행의 낭만이다. 분단된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육로를 통한 외국 여행이 불가능한 우리에게, 기차를 통해 국경을 넘고 방처럼 나뉜 객실 안에서 또 다른 여행객들을 만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일이다.

게다가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센겐조약(유럽 각국이 공통의 출입국 관리 정책에 따라 국가 간 통행에 제한이 없게 한다는 내용으로 1985년 체결)에 가입한 후 국경을 넘는 일도 정말 간소화돼 국경에서 느끼는 미묘한 긴장감조차 사라져 버렸다. 정말 우리도 유럽처럼 중국과 러시아를 기차를 타고 왕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유럽 전체가 이렇게 하나의 기차 노선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있는 나라들도 있기는 하다. 발트 3국, 즉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세 나라 여행자들에게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차 여행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꿈에 가깝다.

"이 열차, 잠시 바퀴교환 문제로 정차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철로의 폭 때문이다. 옛 소련에 속했던 국가들은 전부 철로의 폭을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다르게 만들어놓았다. 그 때문에 옛 소련의 변방 지대이던 발트 3국은 지금도 서쪽으로 철도 노선을 새로 놓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폴란드에서 리투아니아를 통해 발트3국으로 들어가는 기차들은 모두 리투아니아 국경에 기차를 세우고 옛 소련 지역의 선로 폭에 맞는 바퀴로 갈아 끼워야 했고, 그 때문에 국경 도시에서 지루한 기다림이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현재 발트 3국을 잇는 국제 철도 노선은 철로의 폭이 동일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등을 연결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폴란드를 넘어 서유럽으로 가는 기차가 전무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발트 현지에서는 국제 철도 노선이 미비한 이유에 대해 이런 식으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현재 폴란드에서도 선로의 폭 차이가 나는 모스크바나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까지 가는 기차가 운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발트 3국의 국제 철도 노선 미비 문제는 기술적인 측면 이외의 다른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국가 간 이동 인구가 많은 발트 3국 간을 운행하는 열차도 전혀 없는 것을 보더라도, 단순히 철로의 폭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여기에는 발트 3국 내부 사정이 작용하는 것 같다. 발트 3국의 철도 당국들은 공통적으로 제 갈 길을 뚜렷하게 찾지 못하고 여러 해 동안 민영화와 공기업화를 번갈아하고 있다. 여객보다는 천연가스를 비롯한 물자 수송에 집중하는 것도 이와 연관돼 있다.

발트 3국에서 영국까지 버스로 가는 사람들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 버스터미널의 유로라인 전용 승차장. 독일, 벨기에, 영국 등 유럽 각국으로 가는 버스 시간 정보가 빼곡하다.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 버스터미널의 유로라인 전용 승차장. 독일, 벨기에, 영국 등 유럽 각국으로 가는 버스 시간 정보가 빼곡하다.
ⓒ 서진석

관련사진보기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발트 3국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구분되는 또 다른 장거리 교통 수단이 발전했다. 다름 아닌 버스다. 발트 3국의 주요 도시들은 기차 대신 유로라인(www.eurolines.com)이나 에코라인(www.ecolines.net) 같은 국제 여객 버스들로 유럽 각국과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유로라인은 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최대 규모의 버스회사이다. 본사는 영국에 위치해 있지만 유럽 각국의 32개 버스회사들로 구성되어 '자칭' 카사블랑카에서 노르웨이까지 유럽 내 500여개 지역을 연결하는 버스 망이다.

기차 노선이 잘 깔려있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 활용도가 그다지 높지 않지만, 발트 3국에서는 그 가치가 대단하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 등 비교적 '가까운' 국가를 포함해서 영국, 스페인까지도 버스로 이동이 가능하다.

발트 3국 최북단인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런던으로 운행되는 버스의 경우 탈린에서 오전 7시 30분에 버스에 오르면 리가, 빌뉴스, 암스테르담, 브뤼셀 등을 지나 도버 해협을 건너는 2박 3일의 여정을 마치고 사흘째 오전 6시에 런던에 도착한다. 그런 장거리 노선이 아니더라도 탈린에서 이웃나라 라트비아의 리가까지는 대략 4시간 반, 그 아래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는 대략 8시간 정도가 걸리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손님들을 실어 나른다.

운행 시간이 길기 때문에 보통 기사 두 명이 탑승하게 되고, 장거리 노선이다 보니 비디오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어 용변을 보기 위해 휴게실을 찾아야 하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사실 발트 3국에서는 변변한 휴게실 시설을 찾아보기 어렵다). 식사는 대략 두어 시간에 한 번씩 식사가 가능한 식당에서 30분 이상 쉬어가기 때문에 그때 해결할 수 있다. 기차 여행에서 유레일패스가 있는 것처럼, 유로라인 역시 전 구간을 기간 내에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유로라인 패스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스튜어디스-기내식 연상시키는 여성 승무원과 식사 서비스

비행기 '스튜디어스'를 연상시키는 국제 버스 여성 승무원이 승객들의 표를 검사하고 있다. 버스 안에서 비행기 '기내식'에 준하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업무도 맡고 있다.
 비행기 '스튜디어스'를 연상시키는 국제 버스 여성 승무원이 승객들의 표를 검사하고 있다. 버스 안에서 비행기 '기내식'에 준하는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업무도 맡고 있다.
ⓒ 서진석

관련사진보기

영국의 유로라인이 발트 3국의 열악한 철도 사정을 바탕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는 외국의 장본인들인 반면, 발트 3국에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자체 브랜드를 개발한 경우도 있다. 라트비아에서 운영하고 있는 국제 버스인 에코라인이 바로 그것.

에코라인은 아무래도 그런 장거리 버스 여행의 필요성을 몸으로 절실히 느끼는 사람들이 만든 회사여서인지 여러 모로 유로라인과 다른 서비스를 자랑한다.

예를 들어 유로라인에서는 덩치 큰 기사 아저씨들이 번갈아가며 손님들의 승차, 표 검사, 짐 관리를 맡아하는 반면, 에코라인의 경우 비행기에나 있을 법한 여성 승무원들이 운전 외 업무를 도맡아한다. 티케팅이나 짐 관리 등 기본적인 버스 업무 외에도 차가 출발하면 버스 안에서 '기내식'을 연상시키는 식사 서비스를 제공한다.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유로라인 규정과 달리, 에코라인에서는 맥주 같은 약한 술을 팔고 소시지구이 같은 간단한 음식부터 돈가스와 비슷한 슈니첼 같은 고난이도 음식까지 오로지 전자레인지만 사용해서 간단하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제품들의 봉지를 뜯어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수준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자 퓨레와 신선한 야채까지 곁들여 맛도 손색이 없을 정도. 하지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그런 느끼한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니다.

차라리 비행기가 더 싸고 편하다?

국제 기차 노선이 발달하지 않은 발트 3국의 틈새시장을 이용해서 승승장구할 것 같던 유럽 국제 버스 시장은 저가항공사가 발전하면서 잠시 주춤하는 분위기였다. 유로라인의 탈린-런던 간 편도 요금은 무려 150유로에 2박 3일 동안 버스에서 고생해야 하지만, 초저가항공인 이지젯을 타면 단돈 50유로로 두 시간 내에 런던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저렴한 표는 최소 한 달 전에는 예매해야 이용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으나, 일주일 전에만 비행기 표를 구매하더라도 버스비보다는 저렴하다.

발트 3국 수도를 연결하는 저가 항공 노선도 늘어나는 추세다. 라트비아의 에어발틱을 필두로 에스토니아 항공, 리투아니아 항공도 저마다 싼 표들을 내놓아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발트 지역에서 저가 항공으로 승부하고 있는 에어발틱의 경우, 운이 좋으면 탈린과 빌뉴스 간 항공 요금이 버스 요금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특별히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버스와 비교해서 그리 비싸지 않다.

그리고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발트 지역 전체와 폴란드에는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있는 고속도로가 별로 없다. 이곳에서는 한국의 88고속도로처럼 국도에 가까운 도로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버스가 아무리 좋다한들 승차감이 다른 나라에 비해 좋을 리 없다. 게다가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버스 전체가 사람들로 들어차 안락함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조만간 폴란드 바르샤바와 에스토니아 탈린을 잇는 국제 철도 노선이 다시 개통된다는 소식도 있어서 발트3국의 여행 시장을 주름잡던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의 아성이 조만간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라트비아 저가 항공사인 에어발틱. 버스 요금보다 싼 항공권을 제공한다. 조만간 한국으로도 취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라트비아 저가 항공사인 에어발틱. 버스 요금보다 싼 항공권을 제공한다. 조만간 한국으로도 취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 에어발틱

관련사진보기


사장님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비즈니스클래스 버스

하지만 당분간 그 명성에 금이 갈 것 같지는 않다. 유로라인의 경우 일반 버스들보다 확연히 넓은 1미터 정도의 의자 간격과 무선 인터넷, 무료 식음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등버스를 도입해 발트 3국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잇는 구간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에스토니아의 한 버스 회사는 비행기 비즈니스석 수준의 서비스를 추구하는 비즈니스클래스 버스 서비스를 내놓아, 그동안 버스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던 회사 CEO 계층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탈린과 리가 간 노선을 위주로 하고 있는 비즈니스클래스 버스가 CEO층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건 비행기를 이용하기 위해 공항에 가야 하는 시간,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 등을 따져보면 시내를 바로 연결하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모든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을 완비해 놓은 것도 CEO들의 발길을 버스로 잡아끄는 원동력 중 하나다.

이러한 유로라인과 에코라인 버스 모두 인터넷을 통한 예약, 발권이 가능해졌으므로 굳이 여행사를 찾을 필요 없이 자기 방에 앉아 편안하게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유럽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틀에 박힌 기차 여행보다는 세련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버스 여행을 일정에 넣어 보는 건 어떨까.


태그:#유럽국제버스, #유로라인, #에코라인, #발트3국, #비즈니스클래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