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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충성!"

 

아침부터 집 근처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지르는 것 같은 구령 소리가 들려온다. 구령 소리가 늘 그렇듯이 무슨 소리인지 잘 알 수가 없는데 마치 군인들이 하는 '충성' 소리처럼 들려서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들이 충성할 일이 뭐가 그렇게 있는지…….'

 

집을 나서 학교 앞에 가보니까 가을 축제를 맞아 고등학교 학생부의 아이들이 정문 양쪽에 늘어서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거수경례를 하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선배로 보이는 한 아이가 "구령 힘차게 넣고 질러"라고 하면 주로 1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목청을 높여서 구령을 외쳤다. 여학생들이 지나갈 때면 소리는 더 우렁찼지만 약간은 나긋하게 들렸다.

 

잠시 멈춰 서서 들어보니까 구령은 '충성'이 아니라 그 고등학교의 이름이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 문화를 배우는 것 같아 안쓰러웠지만 모처럼 생기가 돌고 약간은 흥분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기가 좋았다.

 

아침 7시쯤에 와서 밤 10시나 돼야 학교에서 '풀려나는' 아이들이 아닌가. 교복 치마를 잔뜩 치켜 올리고 분홍빛과 보랏빛의 서투른 화장을 한 여학생들도 애틋하게 보였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궁금해서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학교 안에 들어가 봤다. 문예부, 공예부, 사진부, 미술부 아이들이 작품들을 펼쳐 놓고 와서 보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글에는 유독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문장들이 많이 읽혔고, 흑백으로 크게 인화된 사진들에는 유난히 훤히 트인 하늘이 많이 보였다. 포스트 모던은 이미 뛰어넘어 보이는 듯한 그림들 속의 아이들의 정신은 아주 자유로워 보였다.

 

교실 안에서 보드 게임을 하고 있는 보드 게임부 아이들은 게임보다는 여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 같았다. 체육관에서는 밴드부의 공연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힙합 친구들이 아이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파는 닭꼬치, 떡볶이, 부침개를 먹고 학교를 나오는데 아이들이 또 '충성' 같은 소리를 내며 거수 경례를 했다. 나도 모르게 "네, 고마워요"라며 인사를 했다.

 

아이들의 인권 이야기 <세상을 향해 어퍼컷>

 

그러다가 책 한 권을 읽었다. '답답하고 억울한 세상에 통괘한 한 방을 날린 서른여덟 명의 용감한 사람들' <세상을 향해 어퍼컷>(육성철 지음, 샨티 펴냄). 이번에도 출판사에 놀러 갔다가 한 권 얻었다. 삼류 번역가인 나에게는 보통 선물 받는 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데 이번에는 나 보고 집으란다. 횡재다. 그래서 과감하게 신간을 집었다.

 

이 책은 목이 쉬어라고 구령을 외쳐야 했던 우리 동네 학교의 고등학생들 같은 청소년들의 인권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학교가 학생들을 촛불집회에 못 가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 집회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긴급구제를 요청한 고등학생들,

 

'고 3이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며 두발 단속에 나선 선생님에게 머리카락을 잘려 왼쪽 구레나룻에서 오른쪽 구레나룻까지 반원이 생기고 결국 굴욕감을 느껴 인권위에 진정서를 내고 그래서 학교의 두발 규정에 변화를 가져온 고3 학생,

 

생리 결석을 출석으로 인정하게 만든 선생님과 학생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도 버스나 공연 등의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인권위에 진정을 낸 고등학생….

 

그야말로 학생들을 공부하는 기계 정도로 생각하는 학교와 교육에 통쾌한 어퍼컷을 날린 학생, 교사, 학부모들의 이야기다. 어퍼컷이라고 해서 폭력적인 건 아니고 하나 같이 평화적이며 논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물론 때로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감수하면서 용기를 내서 "아니다!"라고 말해야 할 때도 많았다.

 

8년 동안 <동아일보>에서 일하다가 지난 7년 동안 인권위에서 일을 해온 지은이 육성철씨는 인권이라는 아이콘과 서른여덟 명의 시민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약자와 소수자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항공사들은 젊은 여성만 뽑으려고 하고, 장애인에게 공무원 시험 응시를 허용해 놓고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치르라고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이주 노동자들을 외계인 취급하고, 병사들을 종처럼 부리고, 0.2cm가 작다고 능력이 뛰어난데도 경찰 시험에 응시 못하게 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피의자 신분이라고 마구 가두고 때려왔다. 부인할 수 없는 비참하고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이다.

 

"그냥 있어, 그냥 참아"는 이젠 그만

 

그래도 책 구석구석에는 희망이 많이 읽힌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 입학하게 된 경북 영주시의 한 중학교는 학교 건물 입구에 철판 경사로를 만들고, 보조 교사를 채용했다. 하지만 장애인 학생 송씨는 자기 교실 외에는 음악실, 도서실, 미술실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송씨는 인권위에 진정 신청을 했다.

 

그러자 학교는 8100여만 원을 교육청에서 지원받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8700여만 원을 추가 지원받아 건물들 사이를 잇는 이동 통로를 만들었다. 그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특수교육관리자 과정까지 수강하며 "이번 일을 통해서 '장애인'의 반대말이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라고까지 했다.

 

이 책의 많은 사례들은 주변 사람들이 '그냥 있어. 그냥 참아'라고 말할 때 용기를 내서 발언을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인권의 문제는 돈이나 물질의 잣대로 절대 잴 수 없다는 것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하자센터의 십대 미술팀 'ToT'가 그린 삽화들이다. 하자 센터는 기성 사회가 만든 획일적인 네모 상자 안에 갇혀있는 것이 싫어 탈출한 청소년들이 예술과 기술을 배우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곳이다. 책 사이사이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마치 자신들이 겪었던 차별을 그려낸 것 같아 보였다.

 

책은 '감시보다는 자율이 더 아름답다'고 발언한 서른여덟 번째 시민 영웅의 이야기와 함께 끝이 난다. 그런데 책은 왠지 끝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그 이유는 인권의 의미를 실제 삶에서 느끼기 힘들고, 2001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인권위 활동도 이제야 막 걸음마를 떼고 본격적인 활동을 해야 할 때라서 그런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인권의 더듬이를 지금보다 더 길게 뻗으면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은 차별과 폭력들이 많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위를 독립 기구가 아닌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어서 큰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 또 요즘에는 인권위가 정부 기관들에게 권고를 하면 무시하고 있어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제는 인권위가 국민들에게 진정을 접수할 때가 온 것 같다. 잠자고 있는 시민 영웅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거꾸로 가는 세상에 유쾌한 어퍼컷을 날릴 수 있게.


세상을 향해 어퍼컷 - 청소년이 알아야 할 생활 속 인권 찾기, 2008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육성철 지음, 하자센터 ToT(Thoughtful Eyes of Guerrilla Teen, 샨티(2008)


태그:#국가인권위원회,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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