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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정말이지 이렇게 어려운 적이 없었다. 추석이 코 앞인데 보너스는커녕 지난달 월급조차 아내에게 주지 못했다. 맏며느리로서 큰 차례를 준비해야 되는 아내 얼굴 보기가 민망하다. 아내도 아내대로 내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기 바쁘다. 

 

지난주 일요일(7일), 시골 내려가기 전 갔던 마트에서 거의 빈 손으로 돌아왔다. 가까운 친척에게 건넬 선물세트 두 개가 전부였다. 이번 추석에 아이들에게 옷 한 벌도 변변하게 사 입히지 못할 것 같다. 아내에게 '아이 옷이라도 한 벌씩 사야지' 말은 했지만, 우리 부부는 정작 예쁘지 않다는 핑계만 대고 몇 번이나 들었던 옷을 내려놓고 말았다.

 

왜 이렇게 어렵게 되었을까? 내가 일 안하는 노는 베짱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급속하게 변해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하루에 몇 번이나 되물어 봐도 명쾌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소규모 자영업자라는 나의 직업. 어디가 종착점인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점점 더 오리무중이다. 새벽에 문을 열고 다음날 새벽에 문을 닫는 동네 슈퍼 아저씨. 일요일도 없이 문을 여는 동네 식당들. 이런 700만 자영업자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있단다.  

 

대기업 위주 정책을 쓴 적이 없다는 이명박 대통령

 

IMF 때와 비교하여 자살률이 2배로 늘었다고 한다. 9일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국민패널 중 한 명이 "너무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쓰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하자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쓴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줄도산이 과연 그들만의 잘못이고 그들 능력의 문제인지 묻고 싶다. 동네마다 들어서는 대형 할인점, 백화점 몇 개의 매출과 맞먹는 온라인시장.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그들과 같은 출발선상에 세워놓고 출발 방아쇠만 당기고 공평한 경쟁을 하라는 모습은 약육강식의 밀림에 간난아이를 내모는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굴레는 초등학교 3학년과 유치원 아이를 둔 학부모라는 사실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운다는 것, 교육을 시킨다는 것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요사이는 어떤 가치기준을 가지고 결정을 내려야 할지 갈등과 고민의 연속이다.

 

큰 아이가 영어학원에 보내달라고 하는 것을 내내 미뤄왔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한계점에 왔다. 같은 반 아이 31명 중 장애를 가진 친구 2명, 조손가정 1명, 자기를 포함해 4명을 제외하곤 모두 영어학원엘 다닌단다.

 

학원비로 최소한 24만원 지출이 늘어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지금 다니는 태권도와 피아노 학원까지 마치면 저녁 7~8시 사이가 돼야 집으로 올 수 있는데  힘들지 않겠느냐는 묻자 큰 아니는 다른 친구들도 다 그렇게 한단다. 영어를 못해 뒤처지고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해도 좋겠느냐는 아이의 협박(?)에 아내와 나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이 추진 중인 국제중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한편에서 연간 480만원 등록금을 내야 하는 국제중을 만들면서, 또 한쪽으로 대통령은 돈 없어 배움을 포기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한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아리송하다. 대학생이 등록금이 없어 자살을 했다는 기사, OECD 국가 중 공교육비 민간부담률이 최고라는 기사도 있다.

 

대통령이 내놓은 장학 사업이나 저리로 등록금을 대출해주는 일은 기존에 시행해 왔던 일이다. 물론 확대된다면 긍적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교육 수혜자가 학생이나 가족만이 아닌 국가와 사회 전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매년 물가 인상률보다 큰 폭으로 오르는 대학 등록금, 초등학생 사교육에 국제중, 특수목적고가 엄청난 교육비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그 정도 대책은 별반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실천이 없으면 쇼에 불과하다

 

대통령은 9일 밤 "경제 파탄은 절대 없다"고 했다. 그렇다. IMF에 환란이 또다시 온다면 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국가 재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IMF 때보다 더 어렵다고들 한다. 경제지표가 경제 파탄의 길목에서 턱걸이를 한다고 해서 안심할 일은 아니다. 벌써 서민 경제 파탄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자영업자들의 줄도산, 청년실업자의 급증, 저임금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는 내수 시장 붕괴로 이어졌다. 고환율은 정부에서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수출 위주의 대기업에게는 활황을, 소비자로 대변되는 서민들에게는 물가 폭탄을 안겨 주었다. 결과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으며 또 다른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7개월이 넘어섰다. 지난 정권을 탓할 시간도, 시운전 기간이라고 국민들의 이해를 구할 시간도 지났다. 집권 7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마련된 '대통령과의 대화' 100분. 듣기에 따라서는 희망섞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영업자인 내가 봤을 때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검증되지 않는 가설과 예측, 확인할 수 없는 약속만 있었을 뿐이다.

 

대통령과의 대화를 폄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100분의 토론에서 아무리 많은 미사여구가 동원되어도 실천을 담보하지 못하면 그건 쇼 프로그램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국민과 소통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두 번의 사과에서 진정성을 의심하는 국민들이 많았다면 다시 한 번 행동과 실천에서 진정성을 검증받아야 할 것이다. TV 앞에서 100분이라는 시간을 대통령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 실천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나이 마흔을 넘긴 자영업자. 초등학생의 학부모. 소비자로 살아가는 나, 팍팍하고 힘들다. 대통령의 약속들이 나 같은 서민들에게 희망으로 다가 왔으면 좋겠다.


태그:#대통령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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