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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정암 불뇌사리탑 아래쪽으로 산책로가 있었습니다. 그 길이 봉정암에서 백담사로 직행하는 10.6km 등산로 시작입니다. 하산의 발걸음은 왜 그리도 무겁던지요. 봉정암 도량을 벗어나려니 등 뒤에 서 있는 봉바위가 마음에 걸립니다. 자연과 이별하면서 느끼는 섭섭함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내리막길 고개,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8월 25일 오전 6시 30분, 서운함도 잠시 또 하나의 깔딱고개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90도의 경사도를 가진 고개는 내리막길입니다. 아마 이 고개는 오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봉우리였겠지요.

 

헉-, 숨을 한번 몰아쉬고 더듬더듬 내려갔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걸음마를 배울 때도 이런 걸음이었던가? 지팡이를 먼저 내리 딛고 한발 한발 걷는 나에게 따라오던 친구가 한마디 쏘아 댑니다.

 

“아기걸음마 걸으며 언제 하산할 거나!”

 

하지만 친구의 비아냥거림 속에는 풍경을 곁눈질하는 내가 얄미웠던게지요,

 

 ‘용의이빨’ 산수화요, 공룡능선 동양화로다

 

내리막 등산로에 펼쳐진 ‘용의 이빨’은 산수화요, 공룡능선과 수렴계곡은  한 폭의 동양화였으니 곁눈질을 할 수 밖에요. 설악의 봉우리들을 일컬어 용아장성이라 한다지요. 즉, ‘용의 이빨이 병풍을 두른 듯 길게 성을 이루었다’는 뜻이라는데 그야말로 장관이더군요. 마음이 온유한 자는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용맹을 키우라는 산의 가르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메라 셔터를 터트려 보지만 순간의 웅장함을 담아 갈 수 없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곳에서 본 풍경은 감탄사가 모자라니 가슴속에 차곡차곡 저장할 수밖에요. 풍경의 소재라야 여느 산처럼 돌, 바위 그리고 계곡과 바위틈에 숨어 사는 식물들입니다. 하지만 ‘용의 이빨’ 아래서 흘러내리는 폭포는 날카로움 끝에서 희열을 생산한다고나 할까요. 

 

 설악의 묘미는 물위를 걷는 느낌

 

아마 청산은 심심해서 계곡을 만들었고 그 계곡은 가파르니 절벽을 생성했나 봅니다. 절벽에는 자연스럽게 폭포가 흐르고, 흐르는 물을 담을 그릇은 산속에 연못을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대청봉에서 봉정암을 거쳐 백담사까지 100개의 연못이 있다 하는데, 그 연못 옆에 앉아 보니 신선이 따로 없습니다.

 

설악의 묘미는 계곡을 건널 때 만들어 놓은 철계단 위를 걷는 것입니다. 계단 아래 흐르는 물 위를 걷는 느낌, 설악에서는 계곡을 가로지를 때마다 이런 계단을 만날 수 있지요.

 

 

 백담의 유혹에 쉬어간들 어떠하리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나 했더니, 쌍룡폭포 전망대였습니다. 폭포의 시작은 어디인 줄은 모르겠으나 전망대 뒤로 쉬어가는 물줄기는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었습니다. 봉정암에서 백담사를 걷는 등산로에는 각양각색의 호수가 길손을 유혹합니다. 하지만 호수의 유혹에 빠지면 시간이 지체되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백담의 호수 중 3개의 호수 유혹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유혹은 쌍룡폭포 앞으로 2개의 물줄기의 장엄함에 빠질 수 있었지요. 기암절벽의 봉우리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청청합니다. 설악의 대명사는 단풍인데, 길손을 호위하듯 드러낸 이파리들이 푸른 손바닥을 하고 있었지요. 

 

아침 8시 30분, 앞서가던 일행이 두 번째 호수에서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계곡물도 쉬었다 가는데, 길손도 쉬어가면 어떠하리요.

 

 

간식 주먹밥에서 모자람의 미학 느껴

 

이때 먹는 봉정암 주먹밥이야말로 최고의 간식입니다. 반지르르 참기름이 흐르고 서너 개의 깨소금으로 버무린 달걀 2개 만한 크기의 주먹밥. 달랑 김 한 장을 덮은 주먹밥은 그야말로 예술입니다. 더욱이 호수의 유혹에 빠져 봉정암에서 담아온 약수과 함께 꿀꺽꿀꺽 삼키니 모자람의 미학이 곧 참살이가 아니던가요?

 

 바위틈에 피어나는 수렴동계곡의 가을

 

봉정암에서 수렴동 대피소까지는 5.9km. 이쯤에서 우리는 가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1,224m 봉정암이 여름 끝자락일 때 수렴동 계곡에서는 부지런히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등산로 주변의 검은 돌 틈에 뿌리내린 키 작은 단풍잎 서너 개가 설악의 가을 전령사입니다. 설악에서는 오롯이 가을을 여는 곳이 수렴동 계곡 바위틈이더군요.

                

수렴동 계곡에서 영시암까지 1.2km는 '룰랄라' 잰걸음이었습니다. 이틀 만에 만나는 영시암 텃밭 배추도 제법 자랐습니다. 영시암에서 백담사까지는 3.5km. 흐르는 계곡물도 많이 줄었습니다. 계곡물이 줄어 든 게 아니라, 설악의 백담에 취해서 무덤덤해진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청산은 내게 온유함과 용맹을 배우라 하더라

 

생활에서 초심을 잃지 말자던 마음은 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틀 전 걸었던 길은 환상의 계곡이었는데, 무심한걸 보니 마음이 변한 건 같았어요. 그런 나에게 연분홍 야생화가 채찍을 가합니다. 옹기종기 피어있는 보랏빛 꽃망울이 눈을 힐끗 흘기는 것 같더군요. 

 

10시 30분, 10.6km를 4시간 만에 걸었습니다. 백담의 계곡에서 3번의 유혹에 빠져 질펀하게 앉아도 보고, 용의 이빨을 올려다보느라, 발걸음을 늦춘 것밖엔 시간의 지체는 없었습니다. 그 길을 빨리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내리막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청산이 주는 지혜와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까칠하게 살아온 내가 백담의 온유함과 용아장성의 용맹을 얻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태그:#봉정암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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