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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이야기를 읽으며, 프레드릭을 떠올리다

들쥐 시인 프레드릭 겉그림
 들쥐 시인 프레드릭 겉그림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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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이 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하루 (이를테면) 8시간 일해서 세상에 필요한 만큼의 핀을 만들어 낸다. 그때 누군가가 같은 인원으로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선 핀을 두 배씩이나 필요로 하지 않을 뿐더러 이미 핀 값이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론 팔 수도 없다.

이때 지각 있는 세상이라면 핀 생산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노동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 종전처럼 잘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했다간 풍속문란 행위쯤으로 여길 것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8시간씩 일하고, 핀은 자꾸자꾸 남아돌고, 파산하는 고용주들이 생겨나고, 과거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의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긴다.

결국 모두 4시간씩 일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만큼의 여가가 창출된 셈이다. 그러나 인력의 절반이 완전히 손놓고 노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생긴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온 사방에 고통을 야기시킬 뿐이다. 이보다 더 정신나간 짓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 이야기는 "사탄은 늘 게으른 손이 저지를 해악을 찾아낸다. 대단히 강직한 아이였던 나는 들은 대로 모두 믿었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열심히 일만 하게 만드는 양심을 가지게 되었다…세상에는 너무나 일이 많으며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1935년에 출간된 버트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를 그대로 옮겨놓았을까 싶은 러셀의 이야기를 읽으면, '21세기 이솝'이라 부르고 싶은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프레드릭>(시공주니어 펴냄)이 떠오릅니다.

남들 일할 때 '햇살 모으는' 녀석

가족들이 옥수수를 나르는 동안 프레드릭은 해바라기만 하고 있네요.
 가족들이 옥수수를 나르는 동안 프레드릭은 해바라기만 하고 있네요.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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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틈에 꽃 한송이를 들고 씨익 웃고 있는 이 녀석이 바로 프레드릭입니다. 녀석은 헛간과 곳간에서 가까운 돌담에 사는 들쥐입니다. 프레드릭의 가족들은 모두 부지런합니다, 프레드릭만 빼고요.

겨울이 다가오자 작은 들쥐들은 밤낮없이 바쁘게 옥수수와 나무 열매와 밀과 짚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 들쥐들이 물었습니다.
"나도 일을 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프레드릭이 대답했습니다.

들쥐들은 또다시 물었습니다.
"프레드릭 지금은 뭐해?"
"색깔을 모으고 있어.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프레드릭이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겨울이 되었고, 눈이 내리자 들쥐들은 돌담 틈새로 들어가 저장해 둔 먹이를 먹으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낟알과 나무 열매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짚도 다 떨어지고, 옥수수는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 버렸지요. 춥고 배고픈 들쥐들은 이제 누구 하나 재잘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들쥐들이 물었습니다.

"네 양식들은 어떻게 되었니, 프레드릭?"

프레드릭이 커다란 돌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눈을 감아 봐. 내가 너희들에게 햇살을 보여 줄게. 찬란한 금빛 햇살이 느껴지지 않니…."

프레드릭이 햇살 이야기를 하자, 들쥐들은 점점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레드릭은 파란 덩굴꽃과 노란 밀짚 속의 붉은 양귀비꽃과, 또 초록빛 딸기 덤불 얘기를 들려줍니다.

파란 덩굴꽃과 노란 밀짚 속의 붉은 양귀비꽃, 또 로록빛 따릭 덤불 얘기를 들려주는 프레드릭
 파란 덩굴꽃과 노란 밀짚 속의 붉은 양귀비꽃, 또 로록빛 따릭 덤불 얘기를 들려주는 프레드릭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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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이 공연이라도 하듯 '사계절' 이야기를 들려주자, 들쥐들은 박수를 치며 감탄합니다. 그러고는 말하지요,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이 그림책이 사랑스러운 것은 들쥐들이 프레드릭을 게으른 수다쟁이 내지는 사기꾼 취급하지 않고 시인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프레드릭의 대답 때문입니다.

프레드릭은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한 다음, 수줍게 말했습니다. "나도 알아."

하하하.

"나도 알아."

이솝의 오랜 틀에서 비로소 벗어난 기분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저는 마지막 쪽을 펼치고는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부지런히 협동하고 늘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동화책의 뻔한 틀을 확실하게 깨뜨려 주는 반전입니다. 뒷맛이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우화 작가 이솝의 오랜 틀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기분입니다. 노예 출신 이솝이 근면과 성실, 배려와 겸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면, 자유시민인 우리 시대에는 프레드릭처럼 선택적으로 시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도 있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이 얄밉도록 사랑스러운 것은 그 자신이 시인임을 알고, 믿고,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남의 시선에 주눅들지 않는 자신감과 햇빛과 꽃들이 주는 색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은 엄마인 제가 아이들에게 가장 키워주고 싶은 삶의 태도입니다.

이 책의 지은이 레오 리오니는 그 자신 그대로 프레드릭입니다. 레오 리오니는 50세에 첫 그림책을 펴냈습니다.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데뷔한 이 멋쟁이 할아버지는 손자들을 데리고 기차 여행을 하던 중, 열차 안에서 부산스러운 아이들을 잠재우기 위해 기지를 발휘합니다.

<라이프>지를 찢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때 만들어진 책이 데뷔작 <파랑이와 노랑이>입니다. 그 후, 8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여 권의 그림책을 만들었는데, 쿠하는 <프레드릭>보다는 <꿈틀꿈틀 자벌레>와 <으뜸 헤엄이>를 더 좋아합니다.

꼴라쥬로 표현한 들쥐들의 표정이 모두 제각각 다릅니다.
 꼴라쥬로 표현한 들쥐들의 표정이 모두 제각각 다릅니다.
ⓒ 시공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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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자신이 바로 프레드릭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에는 스탬프로 찍어서 만들거나, 종이를 찢어 붙인 꼴라주 기법 등 간단하면서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책들이 많습니다. 경제학 박사 출신의 광고 회사 사장님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암스테르담의 박물관에서 유명 작품을 모사하는 취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양한 시도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레드릭>을 보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나는 이웃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등등 엄마 자신의 문제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지런함과 조직 안에서의 협동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뤄나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러셀이 지적한 '정신나간' 사회에 사는 우리가 정신차리고 살도록 숨통을 틔워주는 프레드릭이 고마운 오후입니다.  


프레드릭

레오 리오니 글 그림, 최순희 옮김, 시공주니어(2013)


태그:#그림책 , #게으름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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