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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삼절(三節) 중 으뜸가는 논개

논개사당 충의문에서 내려다 본 사당 풍경
 논개사당 충의문에서 내려다 본 사당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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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전라도 장수하면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 정승을 생각했다. 왜냐하면 방촌 황희 정승이 장수 황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장수의 상징이 논개로 바뀌었다. 1950년대에 장수읍 두산리에 논개사당인 의암사가 만들어졌고, 2000년대에 장계면 대곡리 주촌 생가지에 기념관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7년부터는 의암 주논개상까지 제정해 수상하고 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조국을 구하려 했던 살신성인의 정신이 요즘 논개가 재평가되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19번 도로에서 742번 지방도로 좌회전해 조금만 가면 논개사당인 의암사가 바로 나온다. 의암사(義巖祠: 전북 지방기념물 제46호)는 1954-55년 <호남절의록>, <호남삼강록>, <의암 주논개사적비> 등 기록에 근거하여 장수읍 남산에 만들어졌다. 1955년 이곳 논개사당에 함태영 부통령이 쓴 의암사 편액을 걸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을 모셨다.

논개가 이곳에서 자랐음을 알리는 비석
 논개가 이곳에서 자랐음을 알리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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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74년 현 위치인 두산리 산3번지로 이전하였으며 1998년에 확대 정화하였다. 의암사 앞에는 두산저수지가 있고 그 앞 멀리로는 사두봉(1,014m)이 보인다.  그리고 의암사 경내에는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비(生長鄕竪名碑), 기념관, 외삼문, 내삼문, 충의문, 영정각 등이 있다.

사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논개생장향수명비이다. 헌종 12년(1846) 장수현감으로 부임한 정주석(鄭胄錫)이 이곳 장수가 논개가 나서 자란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 때 우여곡절을 겪었고 1950년대 사당을 건립하면서 이곳 의암사에 모셔지게 되었다.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리는 논개
 왜장을 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리는 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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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삼절로 알려진 논개(1574-1593)는 조선 중기의 의기(義妓)로, 진주병사 최경회(崔慶會)의 사랑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들은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기생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가한 논개는 성의 함락과 군관민의 죽음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바위 위로 유혹해 함께 남강 아래로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를 훗날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고 논개 사당도 그 이름을 따 의암사라 부르게 되었다.  

사당 안에서 만난 논개

영정각 의암사
 영정각 의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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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의암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잔디밭 가운데로 나 있는 보도블록 길을 따라 외삼문까지 가야 한다. 계단을 올라가 외삼문을 들어서야 의암사 경내에 들어가는 것이다. 외삼문 안 왼쪽으로는 논개 기념관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논개 생장향수명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먼저 비석을 본 다음 다시 계단을 올라 충의문을 지나 사당이자 영정각인 의암사로 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함태영 부통령이 쓴 현판이다. 글씨에 힘이 있어 보인다. 현판 왼쪽 '乙未初秋 咸台永'이라는 글자를 통해 1955년 초가을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 사당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한다. 대표로 김기곤 해설사가 기도문을 암송한다. 저승에서 영혼이 편히 쉬시고 우리 후손들을 위해 큰 덕을 베풀어 달라는 내용이다.

논개 영정 복사본
 논개 영정 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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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이 끝나서 나는 잠시 마루로 올라간다. 안에 모셔진 영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다. 색이 많이 바랜 이 영정은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논개 영정의 복사본으로 보인다. 원본은 진주의 의기사(義妓祠)에 있었기 때문이다. 색이 바래긴 했지만 아주 우아하고 곱게 생겼다. 너무나 우아하고 단아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최근에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 그림들이 모두 똑같아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그가 그린 춘향이나 아랑이나 논개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실제와는 너무나 다르게 이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양 여성의 전형을 표현하려고 한 것은 좋은데 그러다 보니 이들 여성들만이 가진 개성이 무시된 감이 있다.

논개 표준 영정
 논개 표준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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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김은호 화백은 친일파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군을 타도하기 위해 몸을 바친 사람의 영정을 일본군을 위해 몸 바친 사람이 그렸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최근 표준 영정을 다시 제작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2008년 2월 충남대 회화과 윤여환 교수가 제작한 논개 그림이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논개 표준 영정은 과학적인 방법과 역사적인 접근법을 적용했을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좀 더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 장수와 함양에 사는 신안 주씨 여성들의 얼굴과 유전인자를 분석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택했다. 두 번째는 옛 그림에 나오는 여인들의 초상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머리 모양과 복식도 매장 유물과 그림 등을 참고했다고 한다.

의암사를 나오면서 마루 옆 벽에 걸린 영정각 신축기를 보니 이 건물이 1955년 10월에 지어졌다. 그런데 영정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본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하루 속히 이곳에도 복제본이 아닌 원본 표준 영정이 안치되어야 할 것이다.    

생가지에서 들어 알게 된 논개의 일생

의랑루에서 바라 본 논개생가지 모습
 의랑루에서 바라 본 논개생가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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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을 보고 난 우리는 최근에 새로 난 관광순환도로를 타고 장계면 대곡리 주촌의 논개생가지로 향한다. 이 길은 금남호남정맥을 따라 나 있어 해발이 상당히 높은 곳을 지난다. 그 때문에 가재터널과 장안터널을 지나야 한다. 두 번째 터널인 장안터널을 지난 다음 죄회전해 743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바로 오른쪽에 논개생가지가 나온다.

논개생가지 즉, 논개기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동쪽을 쳐다보면 바로 의랑루(義娘樓)라는 2층 누각이 보인다. 우리는 먼저 그곳에 올라 김기곤 해설사로부터 논개의 삶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태어난 이야기, 장수현의 관비가 된 이야기, 이후 현감 최경회가 담양부사가 될 때까지 따라가게 되어 측실이 된 이야기, 임진왜란시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 이야기 등.

논개는 1574년 9월3일 밤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달문이 논개의 사주로 풀어보니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四甲戌)였다. 이에 주달문이 '개를 놓았다'고 표현했고 그 때문에 '놓은 개', 줄여서 논개가 되었다고 한다. 글쎄 과장이 있어 보이지만 믿을 수 밖에. 그런데 논개가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 주달문이 돌아가셨고, 어머니 밀양 박씨와 논개는 숙부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것 같다.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문을 받는 논개
 장수현감 최경회의 심문을 받는 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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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숙부가 논개를 이웃 마을의 김풍헌에게 민며느리로 파는 일이 벌어졌고,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던 논개 모녀는 외가로 피신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김풍헌이 이 사건을 장수현에 제소하게 되었고, 당시 현감이었던 최경회가 재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경회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나 이들이 갈 곳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논개 모녀를 집안의 찬모 겸 심부름꾼으로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인연 속에서 이들 모녀는 최경회의 부임지를 따라 다니게 되었고, 최경회가 담양부사로 있던 때 논개는 그의 측실이 되었다. 이때 논개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그리고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할 때 함께 진주성으로 가 성안에서 전투를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 장군이 죽자 그녀도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국했던 것이다.

생가지에서 보고 느낀 논개의 삶

단아정
 단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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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최근에 복원해놓은 생가를 향했다. 사실 주촌 마을의 원래 생가는 1986년 대곡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 현재 논개 생가지로 조성된 곳은 논개의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이주하여 서당을 차렸던 장소라고 한다. 그러므로 논개생가지는 상징적인 것이지 역사성이나 사실성은 부족한 편이다.

생가지로 가다보면 똑바로 앞에 논개 석상이 우뚝하게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연못과 단아정(丹娥亭)이라는 정자가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먼저 단아정으로 가 본다. 현장에 서있는 안내석을 보니 단(丹)은 우국단충(憂國丹忠)에서 따 왔고 아(娥)는 달속의 선녀인 항아(姮娥)에서 따 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단아는 의로운 여인 논개의 지극한 충성심과 효심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의암주논개상
 의암주논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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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우리는 의암주논개상이라고 쓰인 석상을 찾아간다. 얼굴 표정에서 어떤 결기(決氣)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 남강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의 모습쯤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금은 나이 들어 보이고 충의(忠義)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듯해 아쉽다. 이 석상 주변에는 논개의 생애를 4개의 조각으로 표현해 놓았다. 첫째가 서당에서 공부하던 논개의 어린 시절이다. 둘째가 장수 관아에 끌려가 최경회 현감에게 심문을 받는 모습이다. 셋째가 진주성 전투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가 왜장을 안고 투신하는 장면이다.

논개석상에서 동쪽으로 똑바로 보면 최근에 복원한 논개생가가 보인다. 이곳을 가기 전 오른쪽으로 논개기념관이 보이는데 모두 최근에 만들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문화재적인 가치나 역사적인 의미는 별로 없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생략하고 바로 논가생가로 향한다. 생가에 이르니 바깥으로 돌담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초가집이 서 있다. 방이 세 칸이고 부엌이 한 칸인 一자형의 집으로 방 앞에는 마루가 있다.

논개 생가
 논개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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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방 안에는 영정과 침구와 책들이 놓여 있다. 영정은 사당에서 본 것과 똑같은 것으로 복제본이다. 침구가 있는 방에는 5언절구로 된 한시가 걸려 있다. 그리고 책들이 있는 방은 일종의 공부방으로, 한문책과 벼루, 책상이 놓여 있다. 이들 방을 보고 마당 옆 텃밭으로 돌아가 보니 온갖 꽃들이 만개해 있다. 백일홍, 능소화, 해바라기가 눈에 띈다. 이들 옆으로는 뒷산으로부터 내려온 물이 흐르고 있어 진짜 사람 사는 집 같은 느낌이 든다.

단심을 표현하는 백일홍
 단심을 표현하는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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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능소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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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를 나와서 우리는 논개의 부모 묘소에 잠시 들른다. 봉분이 어찌나 큰지 옛날 대감급 묘소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장수군이 2000년 5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딸이 못한 일을 장수군민이 한다고 적혀 있다.

봉분에서 앞을 내다  보니 논개 석상과 의랑루가 보인다. 뒤로 돌아 산쪽을 보니 저 멀리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흘러간다. 오른쪽으로는 논개가 태어난 대곡리 골짜기가 아래로 길게 펼쳐져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길을 따라 장계로 나간 다음 무주 적상산으로 갈 것이다.


태그:#논개, #논개사당 의암사, #논개생가지, #논개기념관, #최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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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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