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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여행 일주일, 첫날 반짝하고 맑았던 이후로 계속 비 오는 날의 연속이다. 우리나라 기후가 변한 것일까.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맑아진다. 오랜만에 보는 뽀송뽀송한 하늘이다. 새말 IC(10시)를 지난다. 토지문학관 가는 길을 묻는다. ‘신호등에서 좌회전, 횡성방면 4킬로미터 가면 있다’고 한다.

 

처음 토지문학공원 찾아가는 길, 난해하다. 횡성군에 들어서고 원주인 줄 알고 주유소에서 토지문학공원 위치를 물어본다. 한참 더 가야한단다. 찾아가는 길이 애매해서 여행책자에 적혀있는 문의전화에 전화를 해본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조금 있다 다시 시도해보지만 역시 전화를 안 받는다. 혹시 오늘은 문을 열지 않는 것일까. 다시 IC를 빠져나와 남원주 방향으로 간다. 영동고속도로를 벗어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10시 45분, 남원주IC이다. 길을 묻는다.

 

‘박경리 문학공원은 원주시내 안에 있고, 박경리문화원은 충주 쪽 방향에 있다‘고 톨게이트 직원이 말해준다. 충주방향으로 ’토지문화원‘을 찾아간다. 참 어렵다 어려워, 다시 비가 내린다. 이효석 생가나 문학관 등, 이효석 작가에 대한 모든 것이 평창군 봉평마을 안에 모여 있는데 뚝뚝 떨어져 찾기 힘든 박경리 작가의 흔적들이 못내 아쉽다.

 

박경리토지문화원을 찾다

 

박경리 토지문화원을 900미터 앞두고 있다. 제대로 찾아가는 것 같다. 비는 내리고 어렵게 찾아온 길, 한적한 길로 접어든다. 드디어 찾고 찾던 박경리 토지문화원에 도착했다. 안내하는 여직원이 이곳은 작가들이 머무르면서 글을 쓰고, 세미나 같은 것을 여는 장소로 쓰고 있다며 박경리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것을 알고 싶으면 원주시내에 있는 박경리문학공원에 가면 된다고 한다.

 

왠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바로 그런 이유였구나. 바로 옆에 있는 박경리 생가에는 가족들이 아직 살고 있어서 개장이 안 된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내민다.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라고 했더니 얼마 전에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며 바뀐 전화번호를 준다. 그리고, ’토지문학공원이 8월 14일 날, 박경리문학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일러준다.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위에 위치한 박경리토지문화원을 나와 다시 원주시내로 향한다. 고 박경리작가의 삶과 문학의 흔적과 향기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다 어려워. 그래도 먼 길까지 왔는데 일부러 마음내서 강원도 원주까지 오기란 힘드니 꼭 찾아보려 인내심을 가지고 길 찾기를 한다.

 

원주 변두리에 있는 박경리 문화원에서 원주시내로 깊이 들어섰지만 초행길이라 그럴까, 문학공원을 찾기는 마치 미로 찾기처럼 어렵다. 문화원에서 건네준 약도를 보며 찾다가 길 잃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원주시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나서야 겨우 찾은 박경리문학공원, 벌서 11시 50분이다. 비는 쉬지도 지치지도 않고 내린다. 참 얄궂은 날씨다. 박경리 문학공원은 원주시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박경리 토지문학공원에 도착해서 관리사무소 건물 2층에 소설 ‘토지’의 작품 소개를 위한 전시물들을 둘러본다. 이곳은 박경리선생의 연보와 ‘토지’의 줄거리와 연표, 토지의 생명사상 등이 한눈에 잘 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다. 오래 전에 내가 읽었던 바로 그 표지의 ‘토지’ 16권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감회가 새롭다. 그때, 장장 16권이나 되는 대하소설 <토지>를 다 사서 읽을 수 없어, 책 대여점에서 한두 권씩 빌려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박경리 작가의 <토지>는 26년에 걸쳐 집필한 끝에 완성한 5부 21권 분량의 대하소설로서 한국현대문학의 가장 빼어난 작품들로 주목받고 있다. <토지>는 갑오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등이 지나간 1897년 한가위부터 광복의 기쁨을 맛본 1945년 8월 15일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경남 하동 평사리라는 전형적인 한국농촌을 비롯하여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부산, 진주 등에 걸치는 광활한 국내외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역작이다.

 

왜 원주로 갔을까?

 

고 박경리 작가가 태어난 고향은 거제 통영인데 왜 멀고 먼 원주까지 왔을까. 왜, 박경리토지문학관이나 문화원은 강원도 원주에 있는 것일까. 고향 통영과는 극과극의 위치, 멀고 먼 거리이건만, 왜 여기까지 와야 했을까. 그래도 죽어서는 고향에 묻히고 싶어 통영에 묘가 있다는데 왜 살아서는 고향을 떠난 이후로 일생동안 고향에 가지 않고 멀리멀리 왔던 것일까

 

고향을 떠난 이후로 딱 한번 갔다고 하는데, 고향에서 멀리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의 행로가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 아닌 것, 굴곡 많은 인생이었음에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일생동안 글만 판다는 것, 오직 글을 쓸 때만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 또한 사명이기도 하겠지만, 한이 많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박경리 작가가 왜 원주에 살았는지 왜 박경리토지문화원이나 문학공원이 원주에 있는지 고박경리 선생의 생가였던 박경리문학공원 앞, 언덕에 있는 하얀 집, 바로 오래 전에 살았던 생가에서 해설 선생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대충은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원주와의 인연’이란 글에서 잘 나타나 있었다.

 

“원주로 내려온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떠한 곳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남은 생애의 불길을 태워 보겠다는 내 문학적 소망이었다. 빈 공간에서 생각을 가득 채워 놓고 흐르는 시간의 소리를 들으며 한땀 한땀 뜨면서 바느질하듯, 한 조각 한 조각 쪼아내며 조각하듯 무릇 무엇이든 만드는 처지라면 그런 시간과 공간을 소망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후좌우 힘겨운 노력이 따라야 하며 노력을 한다 하여도 창작하는 힘과 유실되는 힘의 비례가 같은 것이 또한 현실이며 삶의 단면이기도 한 것이다.[원주통신]”

 

“토지 3부를 끝내고 인기라는 물결로부터 빗장을 지르기 위해 서울 정릉집을 떠나 지난 1980년,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했다. 그가 원주에 온 것은 자연 속에 살고 싶은 사치스러운 기분으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사위가 형무소에 있고, 손자와 딸이 시가인 원주에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어’ 서울을 청산한 것이다...[문화예술]”

 

 

그를 한 작품에 치열하게 매달리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토지‘를 붙잡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일생동안 작품 쓰는 데만 치열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 가슴 속 깊은 곳에 퍼내고 또 퍼내어도 다 하지 않는 그 한은 무엇이었을까. 펜 하나를 붙잡고, 아니 붙잡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생애가 궁금하다.

 

한국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뒤이어 아들을 잃은 슬픔, 그것을 슬픔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가볍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은 남편 옥바라지로 호된 고역을 치렀고 굴곡 많은 인생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나에게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토지>에 매달릴 수 있었겠냐‘고 그는 생전에 말했다.

 

하지만 한 인생을 이해하기란 턱없이 부족하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짧은 소견, 얕은 통찰력으로 한 인생, 그것도 한 위대한 작가의 생애를 어찌 알 수 있으랴. 다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눈먼 말’ -박경리

 

글 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 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박경리 작가의 다른 소설은 ‘토지’로 워낙에 잘 알려져 있어 다른 소설들이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김약국의 딸들’, ‘전장과 시장’ 등 장편소설만 해도 20여 편이나 되고, 그가 쓴 시들도 계단 중간 중간에 보인다. 하지만 역시 그는 소설가이다. 건물을 나와서 공원길 따라 걸어본다. 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린다. 박경리 선생의 옛집을 보고 싶은데 때는 점심시간(12~1시), 해설 선생이 오기를 기다리며 다른 곳을 둘러본다.

 

‘토지’속의 대표적인 아이 주인공 홍이에서 따온 이름의 홍이 동산, 그리고 소설 ‘토지’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고향 평사리의 들녘이 연상되도록 섬진강 선착장, 둑길 등이 아담하게 조성된 평사리 마당, 용두레벌, 옛 생가 마당의 연못, 그 앞에 고추, 토마토 해바라기 등이 비를 맞고 있는 텃밭 등을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을 걸으며 둘러본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 문학공원 주차장 맞은편에 있는 식당, ‘토지 콩마을’에서 두부전골을 시켜 점심을 먹고 나와 다시 옛 생가로 향한다. 어느새 오후 1시가 훨씬 넘었다. 생가에 와보니 문은 열려있고 현관에는 신발이 가득하다. 옛 생가를 찾은 사람들이 거실에 모여앉아 있고 그 가운데 서서 열심히 박경리선생에 대해 해설하고 있는 해설 선생이 있다.

 

언덕위의 하얀집, 박경리 선생의 옛 생가

 

조용히 안쪽으로 들어가 박경리 작가의 생애를 듣는다. 그의 생애를 어찌 그 짧은 해설 속에서 다 들으며, 그가 남긴 자료들을 통해 다 들을 수 있으랴만, 우리는 거기에라도 기대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자기 출생에 대해 회의를 가졌던 박경리 작가, 아버지보다 4살 위였던 어머니,  불행했던 과거사를 가진 그이는 아버지를 증오했고 어머니를 경멸했다 한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그는 작품을 쓰다가 모르고 어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쓰던 만년필을 단번에 분질러 버렸다고 하는 일화도 듣는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6개월 동안 멍해 있었다 한다. 해설 선생은 또 말한다. 박경리 작가는 어렸을 때 공부를 별로 못했다고,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책은 야욕스러울 정도로 읽었다 한다.

 

25살에 과부가 된 박경리 선생은 핏덩이를 데리고 남의 집 셋방에서 어머니까지 네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고, 원주에 살아도 시장에 간 적은 단 세 번 밖에 없었다 하니, 알만하다. 해설 선생은 또 박경리 작가가 직접 짰다는 책장을 보여준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있는 책장이다. 너무나 정교하게 짜여진 책장은 전문가의 솜씨 같다.

 

박경리 작가의 옛집인 이 하얀 집은 그가 1980년 서울을 떠나 이곳 원주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고 텃밭을 가꾸고 독거하면서 <토지> 제4부와 5부를 집필하고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완성한 곳이다.

 

방 안에는 시계가 그때의 2시를 가리키고 있다. 이곳에서 16년간 머물렀던 그는 이후 박경리 토지문화원 옆 생가에서 발병하여 돌아가셨다 한다. 방 안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딸 얼굴 조각상이 놓여 있다. 드라마틱한 삶을 사셨던 박경리 선생, 그가 왜 고향에서 까마득히 먼 강원도 원주로 오게 되었는지 해설 선생의 짧은 설명 속에서 읽는다.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아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릉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오랜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

 

우리는 그 짧은 해설 속에서 한 많았을, 그리고 치열하게 글을 썼던 한 작가의 생애의 무게를 감히 감지할 뿐이다. 작가는 글로써 말한다. 그의 생애를 들으며 그가 걸어 온 삶의 행로와 문학의 행적들을 돌아보면서 왠지 내 가슴에 슬픔 같은 것이 고이기 시작한다. 알 수 없는 슬픔...이것은 무엇일까.

 

 

빗속에서 고 박경리 작가의 생애를 더듬어보고, 집으로 가기 위해 공원길을 걸어 나오는데 ‘새야~새야~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래다. 비는 계속 내리고, 슬프게 와 닿는 노래를 등 뒤로 들으며 박경리문학공원을 나온다. 내 마음이 젖는다. 비 때문만도 아니다. 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내내 남아 있는 슬픔, 이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우리네 삶에 대한 연민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위대한 한 작가의 죽음, 왠지 슬프게 와 닿는 그의 생애...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슬픔과 연민 같은 것일까.

 

2시 30분, 남원주IC를 지나 치악휴게소(2:35)에서 휴식, 졸음운전 할 수 없어 잠깐 자다 가기로 한다. 4:15분 경상북도 영주에 접어들고 안동휴게소를 거쳐 중앙고속도로를 나와(6:05) 대구에 진입한다. 대동IC(7:20)에 접어들고 남양산 IC가 보인다. 저녁 7시 25분이다. 드디어 양산이다. 5박 6일 동안의 긴 여행은 마치 한달이나 된 것처럼 느껴진다.


태그:#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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