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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늘 안타깝게 만드는 단종의 유배 이야기

영월 청령포 표지석
 영월 청령포 표지석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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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장릉을 떠나 잠시 후에 청령포에 닿는다. 청령포는 요즘 평창강으로 불리는 서강 가에 위치하고 있다. 정선에서 내려오는 동강과 평창에서 내려오는 서강은 영월에서 만나 단양 쪽으로 내려간다. 이 두 강이 만나기 전 서강이 굽이치면서 천혜의 지형을 이루는 곳이 바로 청령포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만 높은 산으로 막혀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영월 쪽에서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다.

세조 3년(1457) 6월 22일 단종은 창덕궁을 출발, 영월로 유배길에 오른다. 강원도의 남쪽으로 가는 길은 보통 동대문을 지나 광나루로 이어진다. 기록에 따르면 단종은 화양리에 있던 화양정에서 내관으로부터 마지막 이별연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광나루에서 영월로 간 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원주시 부론면까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부론면 단강리에는 6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곳에서 단종이 쉬어갔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단종이 지나간 후 이 느티나무 아래 정자가 하나 세워졌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단정(端亭)이 되었다고 한다.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는 청령포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는 청령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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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단종은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를 지나 원주 흥호나루에서 내린 다음 남한강을 따라 단강리까지 온 것이 된다. 이곳에서 영월 청령포로 가는 길은 원주시 귀래면 운남리,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 원주시 신림면 신림리,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로 이어진다. 주천에 도착한 다음에는 주천강을 따라 자연스럽게 청령포까지 내려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은 6월 28일 마침내 청령포에 도착한다. 그런데 어떻게 서강을 건너갔는지 또 청령포에서는 어떻게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청령포 현장에 들어가 보면 그나마 확인이 될 것 같은데 이틀 동안 내린 비로 청령포로 건너갈 수가 없다. 물이 불어 건너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이 내 심정을 단종은 이해할 수 있을까? 1457년 6월 28일 무더웠을 한여름 단종은 아마 이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자꾸 뒤쪽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1시간 동안 보고 또 본 서강과 청령포

발이 묶인 배들
 발이 묶인 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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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은 온통 흙탕물이다. 평창과 횡성 쪽에서 내린 비가 모두 서강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틀 동안 쏟아 부었으니 수량이 대단하다. 강 위로 부교와 두 척의 배가 물결에 흔들린다. 한 척의 배에는 청령3호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저 배를 타야 건널 수 있는데 꼼짝을 하지 않으니.

나는 멀리서 단종이 거처하던 청령포를 쳐다본다. 온통 소나무 밭이다. 그 안으로 기와집이 보인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청령포에 비석만 두 기 있었던 것 같은데. 안내판을 보니 2000년 4월 단종이 거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집과 시종들의 거처인 초가집을 복원했다고 한다.

현장으로 들어가서 관음송과 망향탑 그리고 노산대를 보아야 하는 건데 아쉽다. 관음송은 단종의 슬픔을 들었다는 600년된 소나무로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다. 망향탑은 청령포 뒷산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돌탑으로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노산대는 청령포 서쪽에 있는 80m나 되는 낭떠러지이다.

아름다운 천년의 숲을 알리는 표석
 아름다운 천년의 숲을 알리는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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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발길을 돌려 주변을 살펴본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산 모양의 표석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표석을 살펴보니 청령포 소나무 숲이 2004년 아름다운 천년의 숲으로 선정되어 우수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산림청에서 매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를 열어 아름다운 천년의 숲을 선정하는데 제5회 대회에서 청령포 소나무 숲이 우수상을 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준경묘에도 이 표석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곳도 역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표석을 보고 난 후 나는 왕방연 시비로 발길을 돌린다. 이곳 나루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길 옆 소나무 밭에 시비가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 그는 단종에게 내리는 사약을 들고 관풍헌으로 간 것으로 되어있다. 관풍헌은 단종이 마지막으로 거처하던 곳이다. 단종은 이곳에서 1457년 10월 21일 죽음을 맞이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스스로 목매어 죽어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단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있다.  

관풍헌 매죽루가 자규루로 변한 사연

관풍헌 자규루: 원래 이름은 매죽루였다.
 관풍헌 자규루: 원래 이름은 매죽루였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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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청령포에서 두 달 동안 생활한 후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 이유는 큰 홍수로 서강 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길까 우려해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조금은 석연치 않다. 홍수는 대개 음력으로 6월과 7월에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쎄, 그 해에는 음력 8월 말쯤에 홍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이런 연유로 청령포를 나온 단종은 밤이면 마음이 울적하여 시종으로 하여금 젓대(笛)를 불게 하기도 하고 관풍헌 매죽루(梅竹樓)에 올라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시로 읊기도 했다고 한다.

달 밝은 밤 자규새 울제                                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누마루에 의지하니                    念愁情倚樓頭
네 울음이 어찌 슬픈지 내가 듣기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듣지 않으면 내 시름 없으련만            無爾聲無我愁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부디 부탁하노니          寄語世上苦勞人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않는 것이 좋겠소.   愼莫登春三月子規樓

단종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바람이 불어 그 노래 소리가 멀리 있는 마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도 한다. 단종이 부른 이 시 때문에 매죽루가 후세에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현재도 매죽루의 전면에는 자규루라는 현판이, 뒷면에는 매죽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단종이 말년을 보낸 관풍헌
 단종이 말년을 보낸 관풍헌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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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이 부른 또 다른 시가 있는데 이 역시 궁궐을 떠나 홀로 지내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앞의 시보다 비유가 더 구체적이고 내용도 더 절절하다.

한 마리 원한을 품은 새가 제궁을 나온 뒤로            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외로운 그림자 푸른 산 중에 이르렀도다.  孤身隻影碧山中
밤마다 잠을 청하건만 잠은 오지 아니 하고             假眠夜夜眠無假
맺힌 한은 해를 지나도 다함이 없구나.                   窮恨年年恨不窮
소리 끊어진 새벽 봉우리엔 조각달만 밝게 비치고    聲斷曉峰殘月白
피 흘린 듯 봄 골짜기엔 떨어진 꽃잎이 붉도다.        血流春谷落花紅
귀머거리 하늘은 여전히 애달픈 호소 듣지 못하는데 天聾尙未聞哀訴
근심어린 이 사람 귀만 어찌 홀로 밝단 말인가.        何奈愁人耳獨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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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이 많았으니 단종은 자살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병자록>을 지은 나만갑은 단종의 죽음을 조금 다르게 전한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이 내용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당시 금부도사가 왕방연이었으며, 단종이 통인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후대에 전하는 왕방연의 시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방연은 단종이 죽는 것을 보고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이곳 청령포를 지나게 되었다고 한다. 왕방연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생각하면서 그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조로 읊었다.

왕방연 시비
 왕방연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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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자신의 애끓는 심정을 정말로 기가 막히게 잘 표현했다. 이 시조는 광해군 때 병조참의를 지낸 용계 김지남(龍溪 金止男)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17년 그는 영월을 순시하면서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그 내용이 하도 구구절절하여 이 노래를 다음과 같이 한시로 옮겼다고 한다.

왕방연 시비에서 바라 본 청령포
 왕방연 시비에서 바라 본 청령포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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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천리 머나먼 길에 임금님을 이별하는 게 한이 되어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이 마음 둘 데 없어 말에서 내려 물가에 앉았으니 
川流亦如我 鳴咆去不休 흐르는 물이 나와 같아서 소리 내 울며 흘러가는구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람들

영월 청령포를 마지막으로 자연유산 다시 보기 교육이 끝났다. 이번 교육의 주안점은 천연기념물과 명승이다. 그러나 이들 천연기념물 또는 명승과 함께 있거나 가까이 있는 문화유산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 때문에 삼척의 죽서루도 보고 영월의 장릉도 보게 된 것이다. 빗속을 뚫고 이틀간 다니며 서로가 다들 정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뭔가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교육과 답사를 함께 한 사람들
 교육과 답사를 함께 한 사람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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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작별 인사도 나눈다. 또 일부는 연락처를 서로 교환하기도 한다. 신화섭 선생님은 이곳에서 헤어져 서울로 간다고 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차에 오른다. 차는 제천과 충주 그리고 청주를 거쳐 대전으로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중간에 충주에서 내리면 된다.

차는 38번 국도를 따라 내달린다. 영월을 벗어나면서 중간에 잠깐 휴게소에서 쉰다. 이곳의 빵이 아주 특별한 맛이 있어 기념품으로 좋다고 하면서. 잠시 후 차는 제천으로 들어선다. 제천에서는 시내가 아닌 우회도로를 지나는데 의림지를 지나간다. 의림지는 명승 제20호이다. 이번 답사에서는 지나는 것도 자연유산을 지나는 것 같아 창밖으로 의림지를 유심히 쳐다본다.

명승 20호인 의림지 모습
 명승 20호인 의림지 모습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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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차는 박달재터널과 다릿재터널을 지나 충주지역으로 들어온다. 이들 두 터널이 생기면서 제천과 충주는 45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우리가 탄 차는 충주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서 잠깐 선다. 서울과 경기 그리고 충주지역에 사는 5명이 차를 내린다. 나도 이들과 함께 내려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그동안 정이 들었던 이옥임 선생님과 반진우 선생님도 함께 내린다. 다들 정년퇴임하신 분들로 충주에서 안성과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탈 예정이다.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다. 회자정리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강의식 교육과 현장 답사로 이루어진 자연유산 공부는 이렇게 끝나게 되었다. 다들 후일을 기약하면서.


태그:#청령포, #서강, #관풍헌, #매죽루와 자규루, #왕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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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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