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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을 보호하고 있는 보존각과 마애불 뒤에 위치한 석굴암 입구가 보인다.
▲ 마애불 석굴암 전경 마애불을 보호하고 있는 보존각과 마애불 뒤에 위치한 석굴암 입구가 보인다.
ⓒ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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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수행처가 천주교 도피처 된 사연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5일 경남 양산시에 있는 마애불 석굴암을 찾았다. 이곳은 불교가 오랜 세월 닦아놓은 수행처에 박해를 받던 천주교인들이 숨어들어 생명을 부지했던 오랜 역사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142년 전인 1866년 이른바 ‘병인박해’가 일어나 천주교도들이 발견되는 대로 목이 달아나던 살벌했던 시절. 현 양산시 호계동 일원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던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삼국시대 원효대사의 수행처였던 마애불 뒤편 석굴암(반고굴)과 인근 산속을 도피처 삼아 당면한 화를 피했던 것.

지금도 이 지역에는 불교 사찰과 천주교 수녀회의 피정시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당시 역사를 짐작케 한다. 실제로 호계동 일대는 불교와 천주교가 동시에 번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부터 보이고 있는 다소 치우친 듯한 종교 편향적 태도 때문에 불교계가 때 아닌 법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알려진 이 과거사는 비뚤어져만 가는 현재의 종교차별 상황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 했다. 급변하는 정치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주객이 전도될 수 있고, 상황이 뒤집힐 가능성은 많다. 불과 5년이라는 짧은 집권 기간 동안 다른 종교를 홀대하는 것은 정권교체와 더불어 스스로 정반대의 상황에 직면해 고난을 자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명박 정부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온 국민을 위하고 섬겨야 할 정부가 마치 특정종교를 위한 정권, 기독교 정권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게 기독교인까지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의 중론이다. 이 대통령의 독실한 신앙정신의 발로라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가파르기 때문에 1단기어로 멈추지 말고 올라가거나 차량을 두고 올라가야 한다.
▲ 마애불 입구 오르막. 가파르기 때문에 1단기어로 멈추지 말고 올라가거나 차량을 두고 올라가야 한다.
ⓒ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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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의 수행처... 마애불 석굴암

경남 양산시를 관통하는 35번 국도를 따라 통도사 방면으로 직진하다보면 산막공단 진입로가 나온다. 이 도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호계마을(93번 버스 반환종점)이 나오고 골목길에 가까운 좁은 마을길을 따라 계속 진입하다보면 마애불 석굴암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마애불 석굴암에 이르려면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 가야 되는데 친절하게도 “1단 기어를 사용하여 멈추지 말고 올라가라”는 안내문이 운전자들을 자못 긴장하게 만든다. 그만큼 가파르다는 경고인데 실제로 누워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급한 경사를 타고 올라야 마애불을 만나볼 수 있다. 차라리 가파른 산길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푸른 숲길을 걸어 올라가는 편이 수행자 입장에선 보람된 일일 수도 있다.

호계동에 위치한 석굴암은 신라 원효대사의 수행처인 반고사지(磻高寺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절 마당에 들어서면 한 기의 마애불과 굴법당인 반고굴(석굴암)이 눈에 들어온다.

마애불은 자연의 바위 면에 돋을새김(浮彫)이나 줄새김(線刻)으로 새긴 불교조각을 말한다. 자연적 암벽에 굴을 파서 불상이나 법당을 세우는 일은 인도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마애불은 세월의 흐름에 따른 풍화작용으로 훼손상태가 극심한 실정이다.
 현재 마애불은 세월의 흐름에 따른 풍화작용으로 훼손상태가 극심한 실정이다.
ⓒ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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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마애불의 역사는 약 600년대를 전후하여 조성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마애불의 조성형태는 제작 초기에는 상상과 신비감을 주는 모습으로 물길을 지키는 길목이나 마을 어귀 등에 조성이 되었다. 신라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경주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는 곳에 조성하다가 신라 하대에는 남산 등지에 조성 되었다.

그러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여느 시대보다 수가 많고 형태가 다양해지며, 고려정권이 호족연합으로 출발한 만큼 경주를 중심으로 하던 통일신라시대와는 달리 나라 안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나말여초를 포함한 고려 초기의 마애불은 신라의 전통조각을 계승하거나 고려초기의 새로운 양식과 토속적인 경향이 함께 어우러진 형태로 조성되었다. 아무튼 마애불은 성스러운 자연과 인간의 종교적 열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또 하나의 한국적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없다.

호계동 마애불상은 경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96호로 지정돼 있다. 돋을새김으로 조성된 불상의 높이는 2.2m이며, 지름이 3.2m나 되는 활짝 핀 대형 연꽃좌대 위에 앉아있다. 광배는 온몸을 감싸는 거신광 형태를 하고 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귀, 두툼한 무릎, 얼굴 부분의 윤곽은 크고 뚜렷하며 뭉툭한 코와 뾰족한 입술이 특이하다.

또한 왼손은 내려서 오른쪽 발과 포개져 있으며, 손가락이 매우 길며 손톱까지도 표현을 해 놓았다. 오른 쪽은 많이 훼손돼 있는 상태다. 머리 부분은 몸에 비해 큰 편이며 통견을 한 모습이 전체적으로 좀 투박한 느낌이 드는 불상이다. 유난히 빛나는 백호는 근래에 어느 보살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굴 법당 내에 석조불상을 모셔놓고 원효대사의 법을 이어가고 있다.
▲ 석굴암 내부. 굴 법당 내에 석조불상을 모셔놓고 원효대사의 법을 이어가고 있다.
ⓒ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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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석굴암'은 큰 바위 안에 조성된 특이한 자연동굴

마애불이 새겨진 암반 아래는 30여㎡ 넓이의 동굴이 있는데 이것을 반고굴 혹은 석굴암이라 부른다. 이곳에 있었던 반고사는 원효대사의 스승으로 축지법에 능통했던 대안스님이 기거하던 곳이라 한다. 원효 스님은 축지법을 배워 천성산에서 척판암으로 설악산의 조계암 석굴로 다녔다고 한다.

반고굴은 오랜 세월동안 잊혀져오던 중 1990년 현 주지인 무정(無情)스님이 발견해 석굴 법당 내에 석조불상을 모셔놓고 원효대사의 법을 이어가고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여래를 협시불로 봉안하고 있고 굴법당 내에는 원효대사가 마시던 암반수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다.

이곳이 바로 앞서 말한 천주교가 박해를 받던 시절, 수녀들이 숨어 살아 생명을 구한 곳이다. 지금도 석굴 여러 곳에는 당시에 밥을 지어먹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를테면 동굴 천정에는 그을린 자국이, 바닥에는 난방 및 취사를 위한 온돌용 구들이 축조됐던 모습이 남아있었다.

동굴 천정에는 그을린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동굴 천정에는 그을린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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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뒷산 이름을 원효대사의 이름에서 유래한 '새밝등이'라 한다. 반고굴이 있는 마을 이름을 산막(山幕)이라 부르는데, 원효대사와의 인연으로 신라의 대학자인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원효를 만나기 위해 이곳의 산(山)에 막(幕)을 치고 기다렸던 곳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진다. 지금 이곳에는 산막공단이 들어서 산업지역으로 탈바꿈한 상태다.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이형분씨는 "사찰 마당에 서면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양산 시가지 일부가 정겨운 곳으로,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임에도 완전히 세속을 벗어나 자연을 접할 수 있는 양산이 가진 또 하나의 보물임에 틀림없다"고 자랑했다.

훼손 심한 마애불석상...지키고 알리는 일에 지원해야

마애불이 땅속에 반 이상 파묻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1990년 발견당시 사진. 마애불이 땅속에 반 이상 파묻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무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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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세월의 흐름에 따른 풍화작용으로 마애불의 상태는 마모될 대로 마모돼 훼손상태가 극심한 실정이다. 흐린 날에는 불상의 형태조차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경남도와 양산시는 지난 1월부터 보호각 설치 및 주변정비공사를 벌였다. 호계리의 큰 바위 얼굴이 제 모습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도비 및 시비 1억3400만원을 들여서 전체 27㎡에 보호각을 설치해 마애불을 감싸고 훼손된 부분을 보존처리하는 것은 물론 석축 및 배수로를 정비하는 사업을 진행했고 지난 5월 완공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마애불을 지키고 알리기에는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 5일 마애불 앞에서 만난 양산출신 박규식 경남도의원은 "양산지역은 대표적 불교 문화권으로 통도사와 내원사 인근에 흩어져 있는 엄청난 불교문화재들을 전략적으로 관광벹트화할 필요가 있다"며 "지역 곳곳에 아직도 발굴되지 않거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데, 기왕에 어렵게 발굴해놓은 마애불 석굴암을 지금처럼 방치하지 말고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서 찾아오게 만드는 작업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무정스님과 박규식 도의원
 무정스님과 박규식 도의원
ⓒ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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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고, 해묵은 토사에 파묻혀 있던 마애불을 발견한 주인공 무정스님도 "신라시대의 화려한 역사를 가슴에 품고 있는 마애불과 석굴암을 더욱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마애불을 애써 찾아주는 관광객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너무나 가파르고 좁은 진입로를 넓히고 싶고, 마애불 석굴암을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서라도 조립식 가건물로 된 초라한 법당을 신라시대 반고사의 모습처럼 복원하고 싶다"고 말했다.

무구한 세월동안 흙속에 깊이 묻혀있던 마애불을 성불하는 자세로 직접 두꺼운 땅을 파내고 지게 짐으로 날라 세상에 드러냈던 무정스님은 자신의 청춘을 모두 쏟아 부은 이곳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완벽하게 복구돼 잠재돼있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를 소원하고 있다.

조립식 가건물로 만들어진 법당. 마애불 아래에 위치해 있다.
 조립식 가건물로 만들어진 법당. 마애불 아래에 위치해 있다.
ⓒ 최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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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호계동 마애불, #마애불 석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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