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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로 질펀하게 흘러드는 금강의 넓은 갯벌, 제가 태어난 골목동네 ‘중동’은 갯벌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간척지 논밭을 일궈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했습니다.
 서해로 질펀하게 흘러드는 금강의 넓은 갯벌, 제가 태어난 골목동네 ‘중동’은 갯벌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간척지 논밭을 일궈먹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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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생에서 골목과 인연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군산시 중동 274번지'의 골목집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이웃동네(금암동)로 이사해 서른이 다 되도록 살았는데 그곳 또한 골목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주소 검색창에서 '중동'을 검색해 봤더니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경기부천, 성남, 수원, 용인, 전남 광양, 목포, 충남 공주, 충북 보은 등에도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이자 코흘리개 시절 뛰놀던 골목동네는 번지수가 참으로 희한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혼란기에 흔하게 볼 수 있던 행정의 오류였는지, 째보선창에서 들어오는 첫 번째 골목도 274번지였고, 동네 빨래터였던 공동 우물을 돌아 갯벌로 나가는 큰 동네 골목도 274번지였으니까요. 

옛날 어른들은 금강으로 흐르는 하천을 끼고 있는 '중동'을 '스래'라고도 불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초가집과 움막집에 살았지만 뭐 그리 나눌 게 있었는지 이웃을 부르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판자 울타리에 대문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지만, 사람들 표정은 밝았으며 인심도 넉넉했습니다. 이웃과 함께 웃고 울던 사람들, 넉넉하고 후덕한 땅을 닮아 인정이 묻어나는 사람들이 살았던 군산 중동 골목동네를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다섯 살 때 이사와 서른이 다 되도록 살았던 골목동네 입구와 신작로 풍경.  길가에 시멘트 건물이 들어선 것 외에는 50년 전과 벌로 달라진 게 없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다섯 살 때 이사와 서른이 다 되도록 살았던 골목동네 입구와 신작로 풍경. 길가에 시멘트 건물이 들어선 것 외에는 50년 전과 벌로 달라진 게 없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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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이 55년째 지키고 있는 고향집 골목 어귀에 있는 '정신시계점'은 50년이 넘도록 주인만 두 번 바뀌었지 간판은 그대로입니다. 길가에 나란히 정돈된 손수레들과 짐을 싣는 녹슨 자전거들이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말해주는 듯해서 씁쓸합니다.

시계점 옆에 있던 금암 자전거포와 쌀집은 종합화장품 가게로, 상이군인 아저씨가 운영하던 소줏집은 사주, 관상, 신수, 상괘점과 이사를 택일해 주는 천신 망자보살님 댁으로 바뀌었습니다. 간판도 없이 장사하던 옥만이네 집에는 '태광문구점' 간판이 달려 있고, 옆으로는 비디오 만화방이 들어서 있습니다. 또, '미모헤어텃치'라고 적힌 미장원 간판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면서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어묵을 만들던 가게 옆 골목 끝 집을 '난주네 집', '기생네 집', 혹은 '정선이 고모네집'으로 불렀는데 훗날 인간문화재가 되어 팔자가 확 피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 자주 놀러 왔거든요. 그러나 어머니도 없이 장애인인 홀아비와 어렵게 살았던 정선이 자매의 안부를 몰라 안타까웠습니다. 착한 만큼이나 예뻤는데···.

다방 뒷길에 있는 집 대문에는 '서래로'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데, 조일약국은 혜중당약방으로, 성산, 나포, 함라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던 건물은 부레인 축산물 도매 유통점으로, 쌀가게를 했던 용섭이네 집은 한의원으로 변했습니다.

쭉 뻗은 신작로는 째보선창으로 나가는 길인데요. 코흘리개시절 놀이터이기도 합니다. 공동수도가 있어 항상 시끄러웠던 아래 골목에는 학교 친구들이 살던 동네입니다. 같은반 친구였던 남윤이가 떠오르는군요.
 쭉 뻗은 신작로는 째보선창으로 나가는 길인데요. 코흘리개시절 놀이터이기도 합니다. 공동수도가 있어 항상 시끄러웠던 아래 골목에는 학교 친구들이 살던 동네입니다. 같은반 친구였던 남윤이가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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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날아갈 듯한 기와집에 넓은 정원이 있던 승환이네 집 자리에는 명리학 개인지도, 사주, 관상, 신수, 병점, 묘점, 상계점, 궁합, 택일, 작명, 계룡산 동자보살 등 줄줄이 들어선 철학관 간판과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절에서나 볼 수 있는 연등에 그려진 동자보살이 시주만 많이 하면 고되고 힘든 세상사 모두를 풀어주겠다고 말하는 듯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보는 이들의 눈에는 허접한 골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같은 반이자 코흘리개시절의 친구가 살던 골목들이요,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잔영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그들의 웃고 울던 표정들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까지는 애틋하고 행복했던 고향의 추억들도 함께할 것입니다.

잘려나간 틈새와 관솔 구멍으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판자울타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로 범벅된 벽이 숨통을 죄이는 것 같았습니다.
 잘려나간 틈새와 관솔 구멍으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판자울타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시멘트로 범벅된 벽이 숨통을 죄이는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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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 울타리 관솔 구멍 사이로 집안을 들여다볼 수 있던 두부 집과 병우네 집에 '째보선창 5길'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는데 바닥과 담벼락이 시멘트로 범벅되어 가슴을 답답하게 합니다. 흙냄새가 사라진 골목은 답답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한데 그나마 병우와 복현이네 집의 기와지붕 흔적이 남아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됐습니다. 하지만, 여름이면 먹이를 잡아 나르던 제비들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포도나무가 보이지 않아 무척 안타깝습니다.  

포도나무에 큰 앵두나무가 두 그루나 있던 병우네집 담이 경계였던 골목에는 군인놀이를 할 때마다 병우와 맞수였던 준식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 보니 골목이 더욱 좁아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카메라를 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는데, 카메라를 피하는 아주머니를 보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신뢰를 상실한 사회에서 사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요.

병우네 집을 지나니까 방학 때면 막내 누님과 주일학교에 다녔던 교회가 보입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던 사택 단지는 교회의 주차장으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본당 건물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 있습니다. 그래도 각종 채소가 자라고 있는 텃밭이 저를 위로해주는군요.   

도시의 어촌, ‘중동’의 입구였던 첫 번째 골목. 교회 앞 주차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한국주정(주) 사택이 있던 자리입니다.
 도시의 어촌, ‘중동’의 입구였던 첫 번째 골목. 교회 앞 주차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한국주정(주) 사택이 있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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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오메, 오늘이 일요이링 개미네!'라며 놀라던 시절만 해도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달력도 귀하고 고물 괘종시계 하나 걸어놓고 살기 어렵던 시절에 자명종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로 종소리가 고음으로 녹음되어 반복해서 들리자 소음으로 바뀌어 주민들이 진정서를 내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과학 발전의 부작용쯤으로 생각하고 싶은데, '글쎄요?'입니다.

교회 앞 주차장은 한국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1950년대 중반까지 서울운동장보다 넓은 밭이었는데 군데군데에 인분을 담아놓는 분뇨탱크가 있어 배꼽을 잡게 하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여름에는 참외와 수박, 가을에는 무와 배추를 갈아 먹었는데 한국 주정공장(주) 사택이 들어서면서 제법 주택단지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사택은 대문이 항상 굳게 닫혀 있어 호기심이 많았던 우리를 무척 궁금하게 했습니다. 사택 사람들은 입주하는 날부터 이사하는 날까지 동네 주민들과 왕래가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소통'이 '불통'이었지요. 그래도 가난에 허덕이던 사람들은 시멘트벽에 기와를 올린 집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한국 주정(주)은 왜놈들이 호남의 쌀을 수탈해 가려고 1930년대 초에 형님 댁 옆에 지은 가등정미소 자리에 들어선 술 원료 제조회사 이름입니다. 그런데 60년대 초 박정희 군부가 달러를 아껴야 한다며 당밀 수입을 금지하자 원료를 고구마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동남아에서 당밀을 실어오던 2천 톤급 풍양호가 운항을 멈추는 등 회사가 어려움을 겪다 우풍화학으로 넘어가면서 사택 사람들도 하나 둘 군산을 떠났습니다.  

주인들이 외지로 떠나고 비어있는 사택에는 주정공장 공터에 옹색한 움막집을 짓고 비바람을 피해오던 주민들이 헐리는 건물의 보상 차원에서 입주를 하게 됩니다. 불법 건물이니 법으로 따지면 마땅히 헐려야 하는 집들이었는데, 횡재를 한 것이지요. 6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보기 드문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소통은 불통이었지만 생각나는 분들도 있는데, 특히 친구들과 공차기를 하거나 썰매를 탈 때마다 대문을 열고 나와 구경하던 세 번째 집 소녀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며 저를 만나기만 하면 웃던 1년 후배 여학생입니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1년 후배 여학생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옛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저에게 다가옵니다. 추억의 앨범을 펼칠 때마다 떠올랐던 여학생을 보며 황홀경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술래잡기하는 꼬마들이 떠드는 소리가 미지의 세계에서 허둥대던 저를 깨어나게 합니다. 

동시에 사택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조장의 선창에 따라 굵은 통나무기둥을 사방으로 묶은 밧줄을 힘차게 들어 올렸다 내리치면서 "어얼럴러 상사디야!"를 외치던 일꾼 아저씨들 모습이 하늘에 그려집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어얼럴러 상사디야!’는 농민들이 논일을 할 때 부르는 농부가(農夫歌)의 한 대목인데요, 50년대에는 건축 공사장 일꾼들도 즐겨 불렀던 것 같습니다.



태그:#중동27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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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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