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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언 호숫가에는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고, 학교 체육시간에 나온 학생들은 축구를 한다.
 꽁꽁 언 호숫가에는 개와 함께 산책을 하고, 학교 체육시간에 나온 학생들은 축구를 한다.
ⓒ 김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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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편이 아이슬란드(Iceland)를 간다고 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영국 위에 있는 아일랜드라고 착각을 했고, 몇몇 사람들은 "2월에 북쪽 추운 나라를 왜 가느냐"고 의아해했다.

아이슬란드는 내게도 생소한 나라였다. 그저 그린란드 밑이라 좀 추울 것이라는 것과 남편의 오랜 꿈이었던 나라라는 것만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10년 동안 학교를 다니고, 3년 동안 의사 노릇을 하면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었다. 온몸에서 깜박깜박하며 밧데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껏 열심히 살았으니 날 위한 선물을 좀 줘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여행을 생각했다. 아무 욕심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몇 달을 살고 싶었다.

가정이 있는 유부녀인지라 남편 생각은 어떤지 물었더니 별 망설임 없이 OK! 멋진 신랑! 단, 두 개의 조건이 붙었다. 하나는 떠나는 것이든 돌아오는 것이든 둘 중 하나는 자기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언젠가 자신에게도 혼자 여행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었다. 두말없이 나도 OK! 나도 좀 멋진 마누라!

둘이서 지구본을 돌려가면서 합의를 본 여행지는 유럽이었다. 남편은 오랫동안 꿈꾸던 아이슬란드를 갈 수 있었고, 난 따뜻한 태양이 있는 지중해와 색다른 풍광의 북아프리카를 갈 수 있었다.

남편의 로망 '아이슬란드' 그곳에 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아이슬란드는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아이슬란드는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다.
ⓒ 김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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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아이슬란드는 오래된 로망이었다. 남편의 20대는 무척이나 암울했다. 국가도, 가족도, 친구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혼자 20대 청년이 견디기에는 너무 큰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여자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던 나도 옆에서 안타까워하는 것 이외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편은 그때 신문인지 잡지인지 어디서 아이슬란드 이야기를 보았다고 했다. 경남 양산시만한 인구가 넓이는 남한만 한 땅덩어리에 사는데, 여자 총리가 자신의 집에서 출퇴근하며 총리 집무실을 오간다는 이야기였다.

그 기사에 어떤 이야기가 더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걸 보면서 "이런 곳이라면 사람이 정말 소중한 대접을 받고 살 수 있겠구나. 어떤 권위도 사람을 억압하지 않겠구나. 나도 이런 곳에서는 암울하지 않게 살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아이슬란드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던 그 시절에 해외 사이트를 뒤지고 영문으로 된 아이슬란드 여행 정보를 해석해 가며 그곳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아마 그건 암울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도 흐르고 상황도 변해 남편을 감싸고 있던 먹구름도 차츰 걷히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가지며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이를 흥분시키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한겨레21>이라는 잡지에 아이슬란드 여행기가 올라온 것이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남종영이라는 기자에게 엄청난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끼는 모습이 조금은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슬란드에 대해 가장 최초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인데 남종영 기자가 선수를 쳤다는 것이다. 가당치도 않은 독점의식(ㅋㅋㅋ), 그러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는 꼭 아이슬란드를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보채는 아이 달래듯 그러자고 한 약속을 이번 여행으로 지킬 수가 있었다.

먼 옛날 바이킹이 배를 타고 새로 정착할 땅을 찾아 떠돌다가 사람이 살만한 좋은 곳이라고 해서 다른 종족들이 넘볼까 봐 아이슬란드(ICELAND)라는 추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반면 혹독한 날씨로 너무 살기 힘든 북극권의 한 섬을 그린란드(GREENLAND)라고 이름을 지어 다른 종족들을 헛갈리게 했다는 유래가 있다. 10월부터 4월까지 눈과 얼음이 뒤덮인 추운 나라를 '살기 좋은 곳'이라 여기고 이주한 바이킹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눈과 얼음... 온통 흰색의 나라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카비크 시청은 길가 언덕에 소박하게 서 있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카비크 시청은 길가 언덕에 소박하게 서 있다.
ⓒ 김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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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지난 2월 아이슬란드로 떠났다. 처음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아이슬란드는 눈과 얼음에 온통 흰색이었다. 레이카비크라는 세상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수도에는 호수가 있었는데 꽁꽁 얼어서 여학생들이 그 위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어릴 적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눈 덮인 뾰족한 지붕에 뾰족 창문,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모두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시내 번화가 옆에 의회 건물이 있었다. 근대적 의회의 시초라고 하면 대개 영국을 떠올리지만 아이슬란드는 대략 10세기부터 의회를 통한 대의민주주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마침 의회가 개회 중이라고 해서 문을 열고 쓱 들어갔더니 문 앞에 있던 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umm~ tourist, In? OK?(음… 투어리스트, 인? 오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머쓱해져서 "Bye~"하고 나왔다.

의회는 국기가 달려 있는 것 말고는 여느 건물과 구별이 안 될 만큼 소박했다. 물론 지키는 전경이나 청원경찰도 없고 자동문으로 쓱 들어가면 들어설 수 있는 곳이었다.

의회 건물과 마찬가지로 시청도 시내 주택가와 함께 어떤 권위적인 포즈도 취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었다. 시청사 바로 옆에 총리의 집무실이 있는데 한 나라의 총리가 일하는 곳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우리 동네 동사무소보다 작은 건물에서 일하는 총리라…. 허식도 권위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

온도계는 분명히 0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체감 온도는?

켜켜이 쌓인 눈속에서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구급차을 만나는 행운이 없었다면 갈 수 없는 길에 파묻혀 하룻밤을 꼬박 길에서 보냈을 지도 모른다.
 켜켜이 쌓인 눈속에서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구급차을 만나는 행운이 없었다면 갈 수 없는 길에 파묻혀 하룻밤을 꼬박 길에서 보냈을 지도 모른다.
ⓒ 김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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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는 북위 66도쯤에 위치한 섬나라다. 북극권이기는 하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겨울이 그리 춥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웬걸! 온도계는 분명히 0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데 체감 온도는 엄청나게 추웠다. 내 생애 그렇게 많은 옷을 한꺼번에 입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바람은 또 어찌나 심한지…. 한 번은 남편과 내가 손을 잡고 2차선 도로로 바람에 실려 날려간 적이 있었다. 간신히 건너편 도로표지판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지나가는 차의 도움을 받았다. 그날 밤 뉴스를 보니 초속 30m의 강풍이라고 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관광지 순례나 특별한 볼거리에 욕심내지 않고 그저 북극권에서만 있다는 오로라나 보고 아이슬란드 자체를 편안히 즐기려 했는데, 이런 소박한 바람이 무색하게 날씨는 점점 험악해져 갔다. 우리가 머문 날 중 사흘 정도는, 그곳에서도 특이한 겨울 눈 폭풍이 몰아쳤다. 보통 겨울은 조용히 눈만 쌓여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우리를 위한 특별 이벤트였나 보다.

사람은 적고 땅덩어리는 넓어서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탓에 차를 렌트해서 다녔다. 운전하기가 완전 공포특급 스릴 만점이었다. 갑작스런 폭풍으로 곳곳의 길은 폐쇄되었고, 갈 수 있는 길도 완전 빙판길인데다 눈보라에 시야가 1m도 안 될 때가 많았다. 인적은 드물어 한 시간 동안 차를 몰고 가도 차 한 대 만나기가 어려웠다.

악조건 속에서 가려고 했던 길의 반의반도 못 가고, 수도 근처 200km 정도만 배회했다. "아무도 가지 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을 겁니다"라는 관광안내소 직원의 이야기가 무시무시하게 들였다.

설상가상으로 찾아간 게스트 하우스는 비수기라 문을 닫았고, 차가 눈길에 빠져 한 번은 근처 주유소 렉카차에 끌려 나왔고, 또 한 번은 긴급구조 중인 구조대원에게 구조되어 호텔까지 갔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눈이 왔다면 학교건 병원이건 아무데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을 텐데…. 무모한 여행객에게는 정말 아이슬란드다운 경험이었다. 남들 보기에는 걱정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신나는 일이었다. 깜깜한 밤 눈폭풍에 갇혔을 때는 '이를 어쩌나' 싶긴 했지만 '설마 죽기야 할까' 싶었고, 결국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라고 할까.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벌까?

아이슬란드의 대형마트는 오전 11시가 되어도 문을 열지 않았다. 평일에는 낮 12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만 문을 연다. 일 권하는 사회에서 온 이방인은 불편했지만, 부러운 일이었다.
 아이슬란드의 대형마트는 오전 11시가 되어도 문을 열지 않았다. 평일에는 낮 12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만 문을 연다. 일 권하는 사회에서 온 이방인은 불편했지만, 부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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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국민 소득이 높기도 하지만 서비스업종을 제외하고 어업이 유일한 산업으로 공산품과 식료품을 모두 수입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구가 30여만 명에 불과해 내수시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나라에서 2명이 일반적인 식사를 하면 4만원~5만원,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1500원, 맥주 7온스(약 200cc)가 7000원, 생수 500ml에 3000원.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벌까?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로 세계에서 5위를 유지하지만 회사원 평균 월급은 200~300만원 수준. 물론 대체로 맞벌이를 하니 가구당 수입은 500만원 내외가 될 것이다.

타고 가던 버스가 눈길에 미끄러져 주유소에서 우리 차에 히치하이크하게 된 14세 현지 중학생의 말에 의하면 이 나라 사람들도 물가가 비싸다고 느낀단다.  하지만 이런 임금수준으로도 카리브해나 지중해로 한 달씩 휴가를 가고 무리 없이 잘사는 것은 바로 잘 갖춰진 '사회적 임금' 때문이라고 한다.

병원비는 무료고, 20살까지 교육과 노후연금은 정부가 제공하고, 공공서비스는 대부분 국가 소유고, 사교육도 필요 없고…. 그러니까 번 돈은 그냥 생활 속에서 다 써도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가 그다지 불안하지 않다면 재테크니 부동산이니 하는 광풍에 쉽게 휘말리지도 않을 것이다.

힘들었던 그 시절에 남편이 부러워했던 것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적인 보호망이었겠구나 생각을 했다. 공기업 민영화니 자립형 사립고니 말이 많은 요즘에 한 번쯤 생각해 봐야할 부러운 나라다.

남편에게 겨울을 견디고 봄을 꿈꾸게 한 나라

눈과 얼음속 아이슬랜드 겨울 기억은 소중한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눈과 얼음속 아이슬랜드 겨울 기억은 소중한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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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식물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대체로 씨앗을 만든다. 꽁꽁 언 땅속에서 작은 씨앗을 품고는 따스한 봄을 기다린다. 아이슬란드는 남편에게 겨울을 견디고 봄을 꿈꾸게 한 작은 씨앗이었을 것이다.

각자 서로 다른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 파리로 가기 위해 아이슬란드를 떠나는 날에도 여전히 눈보라는 몰아치고 있었다. 우리를 두 번 씩이나 눈 속에 처박았던 아이슬란드에게 가만히 인사를 했다.

"고맙다, 아이슬란드야, 소중한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잘 지켜줘서 고맙다. 고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부산경남지부에서 발행하는 건치 소식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겨울, #아이슬랜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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