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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교과서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명기하기로 해 양국의 관계가 급랭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6일 오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민주노총 관계자가 지난 4월 방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아키히토 일왕과의 만남 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일왕에 고개숙인 이명박 대통령 사진 들고 시위 일본 정부가 중학교 사회교과서 신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명기하기로 해 양국의 관계가 급랭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6일 오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민주노총 관계자가 지난 4월 방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아키히토 일왕과의 만남 사진이 담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황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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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한나라당이 일본의 독도 도발에 강경 대응 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새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파문 직후 권철현 주일 대사 전격소환을 단행한 뒤 20일 열린 국정 현안 고위 당정회의에서는 "해양호텔 건립" 등을 적극 추진하고 "해병대 주둔"까지 검토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이런 대응이 17.8%(<CBS> 15, 16일 조사)까지 다시 주저앉은 국정수행 지지율을 반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실 정부가 이러는 게 좀 생뚱맞은 이유는 그간 보여준 행보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4월 방일 과정에서 있었던 행보는 빼고라도 민족문제연구소가 진행 중인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친일문제는 공과를 균형 있게 봐야 한다"(4월 29일)며 딴죽을 건 바 있고, 인수위 시절부터 과거사 위원회들의 통폐합 방침으로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는 지난 6월 10일 출범 후 예산과 인력이 배정되지 않아 사실상 문을 닫은 상태다.

일본에 대한 강한 항의의 뜻으로 15일 소환된 권철현 주일 대사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드러내기보다는 가슴에 묻고 국익에 맞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미래가 좋아지면 과거의 잘못된 것도 어느 정도 용서할 수 있다고 본다"(4월 23일)고 말해 자신의 대일관을 선명하게 드러낸 적이 있다.

이러한 정부의 지속적인 '대일본 프렌들리' 흐름의 정점은 역시 4월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특히 이 대통령이 4월 21일 황궁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은 아키히토 일왕에게 두 번이나 머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과 함께 "천황" 호칭을 사용하며 아키히토에게 "못 올 이유가 없다"면서 방한을 공식 요청했던 일은 놀라움을 넘어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바 있다.

대통령이 고위관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낯익은 장면과 비슷했다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어가며 "상대국을 존중"했지만 일본은 도발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방일 당시 눈여겨봤던 기사에 일본이 이명박 정권을 어떻게 보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상황이 담겨 있다.

이명박 앞에 붙은 풍신수길 문양

지난 4월 한일 정상회담 직후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후쿠다 야스오 총리 앞에 놓인 연탁에 붙은 일본 총리실 문양이 일제 식민지 시절 자주 사용되던 '고시치노 기리'(五七桐)인데 한 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 대통령 방일 기자회견장 연단에 이 마크가 처음 쓰인 것으로 보이며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이다.

문제의 문장은 큼직한 오동잎이 아래로 세 갈래, 그 위에 오동꽃 세 송이가 나란히 솟아 있는 형상인데, 세 송이 꽃 중 가운데 꽃은 꽃잎을 모두 7장, 양옆의 꽃들은 각각 5장씩 달고 있다… "여러분, 이 마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건 조선총독부 마크입니다. 본래 이 마크는 바로 400여 년 전 임진왜란을 일으켜 온 조선을 초토화하고 수많은 인명 살상과 문화재 약탈을 하고 심지어는 코까지 베어다가 소금에 절여 가져갔던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문장입니다."(<한겨레> 6월 11일자 기사, '이 대통령 맞은 '조선총독부 문양' 봤소?')

정상회담에서의 '굴욕'을 제기한 이는 조형균 계성종이역사박물관 관장으로, 일본의 이런 행동에 대해 그는 이명박 정권에 대해 상세히 분석한 뒤 "간교를 부린 것"이라며 만일 이의제기를 했다면 "그건 우리가 옛날부터 왕실에서 써 내려오던 전통무늬"라며 빠져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는 그 문양을 조선총독부가 사용했으며 지금 현재 일본 총리실이 그대로 쓰고 있고, 일본이 재일동포가 주 대상인 외국인등록증에도 지문날인을 감추는 가리개 비닐커버에 이 마크를 박아 넣었으며, 대마도에 있는 비운의 덕혜옹주 기념관에도 같은 마크를 달아 놓았다고 주장했다. 조형균 관장은 "설사 다른 행사 때는 몰라도 우리 대통령이 갔을 때는 그것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철저한 역사의식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다"던 3.1절 기념사와 일본에 가서는 "만날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겠다"며 너그러운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일본의 화답일까.

또 다른 간교의 역사, '통석(痛惜)의 염(念)'

사실 일본이 간교를 부리고 조롱하는 잔꾀의 역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1990년 5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현재의 일왕인 아키히토가 궁중만찬회에서 노 대통령에게 양국간의 과거사를 언급하며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를 두고 한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일왕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과를 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재일언론인 정경모 선생은 2001년 집필한 그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방일이 끝나고 1주일쯤 지나자, 실은 노 대통령이 서울을 출발하기 직전인 그해 5월 22일 일본정부가 서울로 특사를 파견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는데, 일본의 특사는 이번에 천황이 말할 사죄의 말 속에 '통석의 염'이란 표현을 넣고 싶은데 그만하면 되겠느냐고 사전에 한국 정부의 의견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역시 간교를 부리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을 한 셈이다.

'통석'이란 말이 중국 고전에 나타나는 것은 <문선(文選)>에 수록된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의 문장인데, 그의 문장 안에 '오질에게 주는 글(與吳質書)'이라는 서간문이 있습니다. 이 서간에서 문제는 덕연(德連)이라는 사람의 문재(文才)를 높이 평가한 후, "그 뛰어난 재학(才學)으로써 저서를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품고 있던 "저작(著作)의 뜻을 이루기도 전에 병들어 일찍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미지불수 양가통석(美志不遂 良可痛惜), 즉 모처럼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지 못함을 생각할 때 참으로 통석함을 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통석(痛惜)이란 표현 속에는 자신의 과오를 사과한다는 뜻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정경모 저, 책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 88~89쪽, 한겨레신문사, 2001년)

저자는 사과야 그냥 하면 되는 것이지 특정표현을 들먹이며 사전에 '허락'을 받았다는 것이 이상했는데 당시 일본 수상 가이후 도시키의 특사로 파견된 인물은 "일찍이 대본영에 배속돼 있던 육군참모이자 만주의 관동군 총사령부에서 참모를 지낸 세지마 류조 중좌"였다고 한다.

정경모 선생은 '통석의 염'이란 표현이 <삼국사기>에는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고 지적한다.

백제 16대 진사왕 8년 7월(서기 392년), 고구려 호태왕은 정병 4만을 이끌고 백제의 북변을 덮쳐 석현동 10여 개 성을 함락시킨 다음, 10월 들어서는 더욱 남하하여 관미성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백제의 진사왕은 호태왕의 용병술에 겁을 먹은 나머지, 이 성의 탈환을 단념한 채 도읍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구원(狗原)에서 사냥을 하면서 무위의 나날을 보내던 중 그해 11월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죽은 진사왕의 뒤를 이어 제17대 왕으로 즉위한 아신왕은 이듬해(393년) 정월, 시조 동명왕의 사당에 참배하고 진무(眞武)를 좌장(左將, 총대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칙서를 내렸습니다.

'관미성은 우리 북변의 요충지였는데, 그것이 고구려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참으로 통석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쪼록 경은 과인의 마음을 헤아려 나라의 치욕을 씻는데 전념하라.'(위 책, 89~90쪽)

저자는 일본이 1879년에 육군참모부를 설치한 이후 조선 지배와 청나라 침략에 대비해 "설립 다음해부터 스파이 수십 명을 풀어 해당 지역의 내정을 살피게 했"고 특히 조선반도와 고구려의 옛 땅 만주의 고대사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1883년 스파이 사코 가게노부 중위가 현재의 지안현까지 침투해 호태왕비 탁본을 일본에 가져간 것도 육군참모부의 이런 흐름의 일환이라고 기술했다. 세지마 류조 중좌가 1990년 '특수임무'를 띤 일본특사로 서울에 파견된 것에서 저자는 일본의 강한 의도를 읽고 있었다.

이명박의 나 홀로 '미래지향', 일본 잔꾀 부추겨

이 정권이 주창하는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관계'는 상대가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상대가 준비는커녕 독도 침탈을 위한 저열한 간교를 지속적으로 부려대는 와중에 표방했던 '대일본 프렌들리'는 제국주의 침략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본을 향한 일방적, 굴종적, 굴욕적 짝사랑에 불과하다.

최근 일본 유력지 <요미우리 신문>이 지난 9일 G8확대정상회담에서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독도 영유권 명기방침을 통보'했고 이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보도 이후 벌어진 파문을 지켜보더라도 진위 여부를 떠나 일본이 이명박 정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일본의 우리 민족에 대한 망언, 망동은 해방 이후 지금껏 지속되어 왔다. 일본 우익세력들은 이미 여러 차례 사과를 한 바 있다고 강변하지만 행동과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 사과가 진정성을 띨 리 만무하다.

하물며 세기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일본의 제국주의 본성을 부추긴 꼴이 되어버린 이명박 정권의 대일본 정책은 취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버렸다. 국민들이 정부의 독도대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현재 충전중인 촛불은 대일 외교에서의 굴욕을 오래 지켜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족문제 또한 쇠고기 문제와는 다른 또 다른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자주민보>www.jajuminbo.net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명박, #독도, #고시치노 기리, #풍신수길, #통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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