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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강남 엄마들이 그룹과외 부탁 좀 하던데. 해볼 생각 있어요?"
"아, 아뇨. 저 과외 안 해요, 못 해요!"

'화끈했던' 두 달의 과외 알바는 저를 과외혐오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저는 여전히 '선생님'이라고 불려요. '알바'가 아닌 '학습봉사'로 전향했기 때문이지요. 과외알바가 남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저를 학습봉사와의 진한 연애로 이끌었습니다.

2006년 겨울, 크리스마스가 얼렁뚱땅 넘어가고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어요. 서울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던 저는 도망치듯 부모님이 계신 대전으로 왔죠. 딱히 재밌는 일도 없이 며칠 방바닥만 긁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한 마디 하셨습니다. "차라리 알바라도 해라." 하긴 1년 동안 고생 없이 서울생활 했으니 이제 용돈은 제가 마련해야할 때도 됐지요.

가장 만만해보였던 과외 알바에 뛰어들다

'주 3회에 40만원 정도 받으면 괜찮은 거죠?', '솔직히 과외가 돈 벌기 제일 만만하지 않나?' 학교 게시판에는 방학을 맞아 유독 과외 관련 글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제 단짝친구 중에서도 과외만으로 월 100만원을 버는 아이가 있었어요. "우리 학교 정도면 과외 잡는 거 어렵지 않아." 그 아이의 말 중 저는 유독 '100만원'에 악센트가 느껴졌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주워 듣다보니 대학생이 하기에 가장 편하고 만만한 게 과외였습니다. 시간당 수입을 따져보니 이건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초봉으로 받는 것보다 많을 법했지요. 게다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왠지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과외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불편함은 여기저기에서 불쑥 튀어 나왔습니다. 과외시장이란 학벌주의의 최정점이더군요. 의대생-서울대생-연고대생으로 차곡차곡 줄지어있는 과외비 표본은 저를 질겁하게 했어요. 지금까지 과외나 학원교습을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제게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전단지에서 돋보여야 하는 것은 대학이름뿐인 걸까.
▲ 과외 전단지 전단지에서 돋보여야 하는 것은 대학이름뿐인 걸까.
ⓒ 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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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지를 만들 때 '학생을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어디에 다니는 지'만이 저를 나타내주니까요. 저희 학교 이름 세 자를 커다랗게 박고, '**대생다운 성실함으로'따위의 말을 적으면서 자부심보다는 까닭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영어에 자신이 없지만 '한국외대 통번역학과 정시 합격'이라는 문구를 넣으니 그럴 듯해 보였습니다. 단지 수능점수만으로 그 학과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저를 '영어 잘 하는 애'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또한 무서웠지요.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니까'라며 저를 다독이고 전단지 50매를 복사해 근처 아파트 단지에 붙였습니다.

그렇게 이틀을 기다리던 중 한 집에서 전화가 왔어요. 바로 옆 단지라서 바로 계약을 하고 과외비는 주 3회에 25만원으로 정했습니다. 나중에 '100만 원 받는 친구'가 너무 조금 받았다고 타박했지만, 첫 시도인 저에게는 일단 하기로 했다는 게 중요했죠. 사실 시간당 만 원을 웃도는 이 금액이 결코 적은 것도 아니었고요.

선생님 되고 싶었는데 '25만원짜리 기계'로 전락?

드디어 첫 과외날, 중학교 3학년인 이 어린 친구와 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교과서를 넘어서 나의 경험을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는 수업을 하겠다는 초심을 간직하며 반갑게 인사했어요. 현우(가명)는 자기가 80만 원짜리 영어과외와 40만 원짜리 독서과외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얼마 전까지 30만 원짜리 수학과외 했었는데요, 30만 원 돈 값을 못 하는 것 같아서 그만 하자고 했어요. 돈 받으려고 와서 하는 거면 그만큼 열심히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도 수업 잘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렇지라고 대답하면서도 등골이 오싹해지며 땀 한 줄기가 흘렀습니다. '난 **대생임을 내세우며 나를 팔았고, 이 아이는 25만 원을 주고 나를 샀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사실 그게 정확한 건데, 제가 쓸 데 없이 낭만적으로 저를 '선생님'이라고 여겼던 걸까요.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데 현우가 샐쭉한 목소리로 현우 어머님께 한 마디 합니다. "엄마, 박유미 선생님 오늘 공부도 별로 안하고 시간이 갔어." 순간 현관 앞에 제 발걸음이 우뚝 섰습니다. "하하하, 다음 시간에는 공부 많이 하자." 집에 오는 내내 털이 쭈뼛 서있던 건 왜일까요.

두 달로 정한 과외 계약 기간이 만만치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겪어본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현우는 저를 '엄마가 사다 놓은 공부 기계'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수학문제 풀어주는 시간이 좀 더디면 "돈 받고 하는 건데 잘 하셔야죠, 저도 선생님이랑 하는 거 돈 들여서 하는 건데"란 말을 거침 없이 쏟아내는 아이였거든요.

독서계획표를 짜서 보내주고, 함께 도서관에 다녔다.
▲ 현우에게 보낸 메일 독서계획표를 짜서 보내주고, 함께 도서관에 다녔다.
ⓒ 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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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내고 하는 일'과 '돈 받고 하는 일'이라는 당연한 공식을 넘어서 이왕이면 더 좋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노력해 보았습니다. 현우가 읽으면 좋을 법한 권장도서의 목록을 만들어 같이 도서관에 가기도 하고, 신문에서 본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생각을 열어주었습니다. 물론 그럴 필요까지 없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현우에게, 아니 제 스스로에게 '25만 원 짜리 기계'가 아닌 '괜찮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결국 '두 달의 고행'이 날 바꾸었어요

현우와 풀었던 문제집들. 내게 25만원 어치 수학을 배우고 싶었겠지.
 현우와 풀었던 문제집들. 내게 25만원 어치 수학을 배우고 싶었겠지.
ⓒ 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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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태도는 과외가 끝나갈 무렵까지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저는 '두 달의 고행'을 마치고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답니다. 일단 '25만 원'이 아닌 '무한대'의 가치를 지닌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학습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저소득층의 지체장애 중학생 송이(가명)예요.

이 아이는 제가 무슨 대학교를 나왔는지가 아닌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먼저 봐주는 고마운 아이랍니다. 아마 과외 알바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25만원이라는 큰 돈을 차마 꺼내 쓸 수 없는 송이네 집에 학습봉사를 하러 쉽게 올 수 없을 겁니다. 또 과외 대신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요.

송이 어머님께서 얼마 전 저에게 그룹과외를 맡아서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어머님의 지인분들께 제 칭찬을 하셨더니 부탁이 들어왔나봐요. 하지만 저는 갑자기 그 겨울의 날카로운 추억들이 생각나 손을 내젓습니다.

"아뇨, 어머님. 저 안 해요, 못 해요!"


태그:#과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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