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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관대의 사모, 모자처럼 생긴 사모바위
 사모관대의 사모, 모자처럼 생긴 사모바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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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대통령, 장로님인 줄 알았더니 보살님이셨던 모양이네."
"거 무슨 당치 않은 소리, 왜 갑자기 보살타령이여?"
"법당 안을 들여다 봐? 일련등까지 걸었으면 보살님 맞는 거 아녀?"

삼천사 법당 앞이었다. 안에서 참배를 하고 있는 일행을 살펴보다가 법당 천장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일련등 중에서 '대통령 이명박'이라는 일련등을 발견한 것이었다. 매달려 있는 일련등 중에는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다른 정치인들의 이름도 발견할 수 있었다.

"선거 중에는 그렇다 해도 취임 후에 저렇게 당당히 법당 안에 이름을 걸어 놓은 걸 보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먼, 설마 불교로 개종한 건 아니겠지?"
"이런 사실을 기독교계는 모르는 걸까, 아니면 설마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데 왜 불교계가 이명박 정부에 뿔난 겨? 거참 모를 일이네."
"정말 그러네, 왜 그런 거야? 뿔날 쪽은 불교계가 아니라 기독교 교회들일 것 같은데. 안 그려?"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인 법당 안에서 발견한 이 대통령의 일련등은 엉뚱한 추측까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여서 기독교 신자가 타종교인 사찰에 일련등을 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평범한 신자가 아니라 보수교단의 대형교회 장로가 아니던가.

탕춘대 성곽의 역사와 풍경

북한산을 찾은 날은 이틀 동안의 궂은 비와 안개가 걷히고 햇볕이 쨍했던 지난 8일이었다. 산행의 시작은 종로구 홍지동 상명대학교 교정을 거쳐 오르는 길이었다. 지하철 3호선 녹번역에서 내려 홍지문 쪽으로 가는 아스팔트 도로는 뜨거운 햇살에 더운 열기를 푹푹 뿜어내고 있었다.

홍지문 옆 개울을 가로지른 탕춘대 성곽 홍교
 홍지문 옆 개울을 가로지른 탕춘대 성곽 홍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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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여고 담장처럼 보이는 탕춘대 성벽
 상명여고 담장처럼 보이는 탕춘대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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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문에서 연결된 탕춘대 성곽은 개천을 가로지른 홍교 위를 지나 산자락을 타고 오르다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가파른 길을 걸어 상명대학교 교정을 지나 뒷산으로 오르자 오른편으로 이어진 성곽이 다시 나타났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평탄하고 쉬웠다. 탕춘대는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서울 장의문 밖에 지은 건물 이름이다.

"왕이 장의문 밖 조지서 터에 이궁을 지으려다가 시작하지 않고 먼저 탕춘대를 봉우리 위에 세웠다. 또 봉우리 밑에 좌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횡각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긴 회랑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를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여러 신하들에게 과시하고자 하여 놀고 구경하기를 명하였다."

연산군 일기에 나오는 글이다. 그런데 숙종임금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적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성이 바로 탕춘대 성이다. 숙종은 1718년부터 다음해까지 농번기를 피하여 석 달 동안 3∼4m 높이의 석재 산성을 쌓았다. 탕춘대 성은 도성인 인왕산에서부터 북한산성까지 5,1km를 연결한 성이다, 산성의 이름은 연산군이 세운 근처(현재의 세검정초등학교 터)의 탕춘대에서 따온 것이다.

숙종은 성내에 연융대를 설치하여 병사들에게 무술을 연마시키고 만일의 국란에 대비하여 지방에서 올라오는 식량 등을 비축하는 군사용 창고도 세웠었다. 성 안에 위치한 지금의 신영동(병영터)이나 평창동(창고터) 같은 이름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탕춘대 능선을 걸으며 왼편 앞쪽으로 바라보이는 하얀 투구처럼 생긴 바위봉우리는 지난번 등산길에 혼났던 족두리봉이었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매끈하게 다듬어 놓은 것 같은 겨대한 바위봉우리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탕춘대 능선에서 바라본 족두리봉
 탕춘대 능선에서 바라본 족두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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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춘대 능선에서 바라본 향로봉과 비봉
 탕춘대 능선에서 바라본 향로봉과 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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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사로 내려가려면 저 능선을 넘어야할 것 아냐?"
일행이 걱정스레 가리키는 능선은 향로봉에서 비봉으로 연결된 능선이었다.
"향로봉이나 비봉을 오르려면 힘들고 위험하지만 능선만 넘는 거야 어려울 것 없잖아?"
산에 오를 때면 항상 자신만만한 다른 일행이 걱정할 것 없다고 부추긴다.

섭씨 32도 무더위와 불볕 속을 뚫고 오른 북한산 향로봉 능선

향로봉 아래 이르러 방향을 오른편으로 돌렸다. 향로봉을 오르지 않고 골짜기를 건너 작은 능선을 타고 주능선으로 오르기 위해서였다.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팔랐다. 느지막하게 시작한 산행이어서 시간은 어느새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숲이 깊어 햇살을 직접 받지는 않았지만 푹푹 찌는 무더위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바지자락이 휘감긴다.

"어이쿠 힘들어, 좀 쉬어가지, 숨이 턱에 차서 죽을 것 같아."
산행을 시작할 때부터 힘들어 하던 일행이 주저앉는다. 그는 날씨가 너무 무더운데다 전날 과음을 해서 몹시 힘든 표정이었다.

"우리도 좀 쉬어 갑시다. 난 심장 박동소리가 가슴에서 들리다가 귓속까지 울려서 죽을 지경이네요."
우리 일행들의 뒤를 따르던 40대 남녀 10여 명 중에서 남성 한 명이 우리들 곁에 주저앉는다. 날씨가 너무 더웠기 때문이었다. 이날 최고 기온은 섭씨 32도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바위 사이에서 바위를 쪼개며 자란 나무
 바위 사이에서 바위를 쪼개며 자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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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능선에 올라서니 그래도 조금은 시원하다, 숲속으로 스며든 바람이 산들산들 품 속으로 파고들어 더위를 식혀주었다. 따끈따끈하게 달궈진 바위를 타고 오른 등산객 하나가 비봉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를 살펴본다.

우리 일행들은 비봉에 오를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옆길로 돌아 사모바위 쪽으로 향했다. 사모바위 아래 그늘진 곳에는 먼저 오른 등산객들이 도시락을 먹거나 땀을 식히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바위 좀 살펴봐? 꼭 모자처럼 생기지 않았어?"
"거 무슨 소리. 사모하는 연인들의 슬픈 전설이 깃든 바위여서 사모바위인데 웬 모자같이 생겼다고 하는 거야?"
"아니야, 자세히 보라고? 꼭 옛날 전통혼례에서 신랑이 썼던 사모관대 중의 사모처럼 생겼다니까."

일행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모양이다. 일행들이 거대한 사모 모양의 바위를 배경으로 늘어섰다.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정말 거대한 모자를 세 사람의 머리 위에 얹어놓은 모습이었다.

거대한 바위의 실금을 뚫고 뿌리 내린 작은 소나무
 거대한 바위의 실금을 뚫고 뿌리 내린 작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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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소나무 그늘 아래 잠깐 쉬며 간식을 들었다. 옆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가로로 실금이 나 있는 사이에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모습이 바라보인다.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며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솟아나는 모습이었다.

"방 빼시렵니까? 호호호 이제 저희들 차례네요."
"아, 예! 방 빼드려야죠. 바로 일어나겠습니다."

우리들이 일어나려고 하자 여성 등산객 세 명이 기다렸다는 듯 소나무 그늘로 다가온다. 그늘이 지고 바람이 서늘한 좋은 장소는 등산객들이 모두 좋아하는 쉼터여서 너무 오래 앉아 쉬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다.

삼천사 계곡으로 내려가려면 사모바위 광장에서 앞쪽으로 내려서야 한다. 저 앞쪽으로는 문수봉과 보현봉이 웅장한 모습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열하는 태양과 살인적인 무더위는 더 이상의 무리한 산행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름다운 삼천사와 골짜기풍경, 그리고 꼴불견

삼천사 쪽으로 내려가는 골짜기 길은 온통 나무그늘로 뒤덮여 있어서 풋풋한 싱그러움과 함께 무더위가 한결 덜했다.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골짜기 곳곳에서는 물에 발을 담그고 쉬고 있는 피서객들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드넓은 바위 위를 굴러 내리는 물줄기 옆에 모여 앉아 화투판을 벌이고 있는 중년 남성들 몇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웃통을 벗어 맨 몸을 드러낸 채 속옷과 양말, 수건 등을 빨아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널어놓은 모습이 여간 볼썽사나운 모습이 아니었다.

삼천사 산령각과 마애석거여래입상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
 삼천사 산령각과 마애석거여래입상이 새겨진 거대한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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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사 근처에 이르러 우리들도 잠깐 물가에 앉았다. 손을 물에 담그자 서늘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수건에 물을 적셔 얼굴과 머리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좁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삼천사는 뜨거운 태양 아래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커다란 바위에 새겨놓은 마애석가여래입상과 그 옆의 산령각 건물이 북한산의 바위 봉우리와 어우러져 정말 멋진 풍경을 펼쳐놓고 있었다.

서기 661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삼천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역사서 '고려사'에 의하면 1027년 6월 이 삼천사와 장의사. 청연사의 승려들이 쌀 360여 석으로 술을 빚은 것이 발각되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역시 역사서인 <동국여지승람>과 <북한지>에는 이 절에 한때 삼천여 명의 불자들이 수도할 정도로 번성했었다고 하는데 삼천사라는 사찰 이름도 이 숫자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의 집합장소가 되기도 했었으나 이후 화재로 소실되었다.

삼천사 계단 입구마다 놓여 있는 두 마리의 새끼를 업은 두꺼비상
 삼천사 계단 입구마다 놓여 있는 두 마리의 새끼를 업은 두꺼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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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다시 중창되었고 6·25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는데 1960년과 1978년 성운이 중수했다. 1988년에는 미얀마에서 부처 사리 3과를 얻어와 석종탑을 세우고 모셔 두었다. 특이한 모습은 오르내리는 계단 입구마다 새끼 두 마리를 등에 업은 두꺼비상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법당 안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장로 대통령의 일련등이 왜 낯설어 보일까?

"이 비좁은 골짜기에 어떻게 삼천 명씩이나 기거하며 수도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암튼 바위산 골짜기에 조화롭게 자리 잡은 모습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잖아?"
일행들은 너나없이 절집의 멋진 풍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인 지난 사월초파일에 이 절 법당 안에 일련등을 걸게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
"뭘?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장로 대통령이라서?"
"그렇잖아? 요즘 우리 기독교문화나 정서로 보면 장로가 사찰법당에 기원 일련등을 걸어 놓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거냐고?"

그러나 일행들의 이야기는 다 부질없는 추측이고 논쟁이었다. 한 때는 어떤 면으로는 지나치게 기독교적이었던 장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장로 대통령이 선거도 끝나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취임한 후에 사찰 법당에 걸어 놓은 일련등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저런 억측과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련등이 걸려 있는 삼천사 대웅보전 내부 모습
 이명박 대통령의 일련등이 걸려 있는 삼천사 대웅보전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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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을 나와 마당으로 나서니 개울 건너편으로 연결된 다리는 일반인들의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그 건너편 마당에는 전통옹기 항아리들이 즐비한 모습이다.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인 모양이었다.

절 마당을 나오자 입구에 서 있는 7층 석탑이 뒤쪽의 일주문과 멀리 하얀 바위봉우리들과 어울려 환상적인 절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태양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지만 뜨거운 열기는 여전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북한산, #삼천사, #장로 대통령, #일련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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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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