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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시간의 힘든 산행을 무사히 마친 당신께 이 꽃을 드립니다.
 아홉시간의 힘든 산행을 무사히 마친 당신께 이 꽃을 드립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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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힘들어. 이런 곳에 발판이나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밧줄이라도 좀 걸어 놓던가."

"난 이대로가 좋은 걸, 조금 힘들긴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이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

7월 1일 강원도 인제와 양구 경계에 있는 대암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름처럼 날카롭고 위험한 칼바위 능선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오르내리는 바윗길이 만만치 않았는데 그 길 어느 곳에도 사다리나 발판은 고사하고 그 흔한 밧줄 하나 걸어 놓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산은 오르내리는 등산로 모든 구간이 그야말로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어느 산악회와 함께한 이번 산행도 역시 오지산행이었다. 우리일행들에겐 세 번째 오지산행인 셈이었다. 그래도 대암산은 명색이 산림청이 지정한 100대 명산 중 하나여서 등산로가 확실하게 만들어져 있는 산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양평을 거쳐 강원도 땅으로 접어들었다. 홍천과 인제를 통과하여 원통삼거리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잡은 후 깊은 골짜기를 따라 달렸다.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풍경은 온통 초록빛 천지다. 흐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햇볕이 쨍한 날씨에 길 양쪽에 병풍처럼 늘어서있는 산들은 마치 진초록 물감이라도 칠해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칼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대암산 주봉
 칼바위 능선에서 바라본 대암산 주봉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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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멈추어 선 곳은 서흥리라는 작은 산골마을이었다. 마을은 주민 한 사람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골짜기 입구 농가 마당가에 피어 있는 세 송이의 백합 모양의 꽃이 청초하고 그지없이 예쁜 모습이다. 걷기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4km, 9시간 등산을 무사히 마친 당신께 예쁜 꽃을 드립니다

등산객들은 골짜기를 따라 뚫린 도로를 따라 산 속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이렇게 도로를 따라 걷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햇볕 따가운 도로를 무려 4km 정도나 걷자 산길에 들어서기 전부터 불평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니, 이런 도로를 왜 걷게 하는 거야? 우리들이 등산하러 왔지, 행군하러 왔나?"
"이 산악회 이거 운영이 말이 아니구먼, 요즘 왜 이래? 이것도 기름 값 때문인가?"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그냥 걸을 수밖에.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에야 도로 옆의 왼편 산자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고 힘들었다. 더구나 등산로가 희미했다. 길이라기보다 우리들보다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길인 셈이었다. 그렇다고 길이 험하거나 길이 아닌 곳을 뚫고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산길은 나 있었으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고 사람들의 손으로 다듬어 놓지 않은 길이어서 산길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진짜 취나물을 찾아보세요
 진짜 취나물을 찾아보세요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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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길을 따라서 걷노라니 발바닥에 닿는 느낌이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대부분 흙길인데다 낙엽이 두둑하게 덮여 있었고 전날 비라도 내렸는지 젖어 있어서 발을 내딛는 감촉이 매우 좋았다. 주변의 숲은 그야말로 정글 수준이었다. 수십 년간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숲은 쓰러진 나무와 고목들이 썩어가고, 하늘을 가린 나뭇가지와 잎은 풋풋한 싱그러움이 넘쳐나고 있었다.

"우와! 이 취나물들 좀 봐! 이렇게 많은 걸 그냥 지나칠 수 없잖아, 발에 밟히는 것이라도 좀 채취하면서 걷는 게 어때?"

"그런데 저렇게 커다랗게 자라버린 취나물들 쇠서 먹을 수 있겠어? 공연히 헛수고나 하지."

"아냐? 저렇게 쇤 것 같지만 돼지고기 구워서 쌈 싸먹으면 향기가 그만이야. 맛도 좋고."

취나물,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까?

그렇게 한 사람이 취나물을 뜯으며 올라가자 다른 사람들도 몇 잎씩 뜯으며 산을 오른다. 등산로 주변은 그야말로 취나물 천지였다. 어떤 것은 너무 자라서 어른 손바닥보다 넓고 큰 것도 많았다.

"이쪽으로 와봐, 여긴 아예 취나물 밭이야. 여기서 모두 조금씩 뜯어가지고 올라가자고."
뒤따르던 일행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부른다. 그가 부르는 곳으로 다가가자 주변이 온통 취나물 밭이었다. 너무 크게 자라지도 않고 적당한 크기에 매우 싱싱한 모습이었다. 몇 사람이 그 취나물을 뜯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저 멀리 흰구름 아래 바라보이는 산이 설악산
 저 멀리 흰구름 아래 바라보이는 산이 설악산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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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취나물이 아닙니다. 어쩌면 독초일지도 모릅니다. 모두 버리세요."
그 사람은 우리가 취나물이라고 생각하며 뜯고 있는 식물이 취나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우리들이 조금 전에 몇 개씩 뜯어온 취나물과 자세히 비교해보니 잎 모양이 조금 다르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니 향기도 달랐다.

"저건 모양이 아주 비슷하지만 취나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취나물은 저렇게 잎이 겹겹이 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조금 다르지요?"
그의 말을 듣고 살펴보니 잎이 피어 있는 모습도 많이 달랐다. 우리들은 조금 전에 뜯은 잎들을 모두 버리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독초였으면 어떻게 됐겠어? 괜히 큰일 날 뻔 했네. 난 다시는 나물 안 뜯어."
모처럼 다른 일행들과 함께 취나물을 뜯어보았던 일행 한사람은 아예 나물 뜯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바위봉우리인 정상 가까이에서 조금 주춤거리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등산로는 여전히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어느 곳에도 인공 시설물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시설물은 고사하고 등산로에 손을 댄 흔적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칼바위 능선을 넘는 등산객들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칼바위 능선을 넘는 등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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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310m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그야말로 일망무제였다. 특히 동쪽 멀리 흰 구름이 둥실 떠있는 하늘 아래로 바라보이는 설악산의 모습이 장엄하기 짝이 없었다. 동서남북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좁은 골짜기 너머 크고 높은 산맥들이 줄기줄기 이어지고 있었다.

"저 아래 능선 어디 쯤 용늪이 있을 텐데 오늘은 아쉽지만 그냥 내려가야 될 것 같네요. 미리 탐방승인을 받아 놓아야 하는데, 그런 절차를 마치지 않아서."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는 능선 길 중간에 그 유명한 생태보고 '용늪'이 펼쳐져 있다고 했지만 정말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시설물을 만들어 놓은 산이 좋습니까?

하산길은 올랐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 능선 삼거리에서 동남쪽 산줄기를 타는 길이었다. 능선길로 접어들자 곧바로 칼바위 능선길이 앞을 막아섰다. 바윗길은 장난이 아니었다. 손으로 붙잡고 오르내리기가 마땅찮은 바윗길이 곳곳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길은 위험하고 힘들었다.

"이런 길은 인공시설물이 꼭 필요한 곳인데 말이야."
어렵사리 바위를 타고 내려온 일행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마땅히 붙잡을 곳도 없는 바위를 내려오며 생명의 위험을 느낀 것 같았다.

칼바위 능선 높은 바위에 오른 여성등산객
 칼바위 능선 높은 바위에 오른 여성등산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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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사다리를 만들어 놓던가 아니면 발판이라도 만들어 놓았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산은 어느 곳에도 사람들이 시설물은 고사하고 밧줄 하나, 아니 등산로에 삽질 한번 안 한 것 같던데요."
"그래도 명색이 100대 명산인데 이렇게 방치해 놓은 것은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식은땀을 흘리며 뒤따라 내려온 등산객 한 사람은 몹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묵묵히 바윗길을 오르내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오늘 이 대암산 정말 좋은데요. 무엇보다 산이며 등산로가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위험한 바윗길에 안전시설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저만큼 뒤에 쳐지자 가까이 따르던 다른 등산객이 내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등산 안전시설물을 설치해 놓지 않았다고 불평하던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힘들어하며 하는 말이어서 반대의견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똑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생각의 차이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이어서 그들에겐 직접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싸리꽃이 이렇게 예쁜 줄 모르셨지요?
 싸리꽃이 이렇게 예쁜 줄 모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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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리 올라오세요. 바위에 오르니 기분이 정말 짱이네요. 야호!"
그때 칼바위 능선 앞쪽의 높직한 바위 위에 오른 여성등산객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밑에서 바라보기에는 매우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여성등산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깔깔거리다가 내려간다.

칼바위 능선을 벗어나자 길은 다시 평탄해졌다. 우거진 숲속에는 여전히 취나물이 지천이었다. 취나물 몇 개를 뜯어 손에 들고 내려가며 가끔씩 코 가까이 댔다. 댈 때마다 특유의 진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든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작은 봉우리를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났다.

산행시간을 5시간으로 잡았던 산악회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있었다. 산행시간이 길어지자 모두들 지친 표정들이 역력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머리에서도 땀방울이 흘러 모자 챙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빗물이라도 흐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내려오자 등산로 주변이 온통 싸리꽃으로 뒤덮이기 시작한다. 붉은 싸리꽃은 사실 별로 볼품이 없는 꽃이다. 꽃도 작고 오종종한 것이 푸른 잎 사이에 듬성듬성 피어 있어서 화려함도 아름다움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카메라를 가까이 대고 들여다본 모습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요염하기까지 했다.

땀에 젖은 모자와 거대한 소나무와 붉은 접시꽃
 땀에 젖은 모자와 거대한 소나무와 붉은 접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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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자 골짜기를 향한 급경사 길이 나타났다. 시간은 어느새 등산을 시작한 지 일곱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내리꽂는 듯한 미끄러지는 경사 길을 겨우겨우 지나자 정말 거짓말처럼 골짜기 길과 함께 맑은 개울물이 나타났다.

일행 몇 사람은 개울물에 첨벙 뛰어들어 그대로 물을 마신다. 말릴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심산 오지의 개울물은 정말 깨끗하고 맑아서 괜찮을 것 같았다. 개울물에 얼굴과 발을 씻고 다시 길을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펜션에 밀려난 농가 마당에 우거진 개망초꽃

조금 더 걷자 집이 한 채 나타났다. 조그만 펜션이었다. 그리고 계속 내려오는 동안 몇 채의 펜션들이 더 나타났다. 길가에는 작은 다락논들도 보인다. 논두렁과 맞닿은 짙푸른 숲이 석양 그늘에 검푸른 빛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해가 서산마루 너머로 기울어지자 골짜기에는 차츰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골짜기는 깊었다. 한 시간 이상을 걸었지만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층층이 펜션들이 자리 잡고 있는 골짜기를 내려오자 다시 농가들이 나타났다.

산과 골짜기에서 만난 꽃들, 이 골짜기에선 철늦은 장미가 한창입니다.
 산과 골짜기에서 만난 꽃들, 이 골짜기에선 철늦은 장미가 한창입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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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들은 골짜기 위쪽에 세워져 있는 아름답고 멋진 펜션들과는 달리 초라하고 우중충한 모습이었다. 길가의 어느 농가는 텅 비어 있었다. 창문들이 덜렁거리며 떨어져 나간 걸 보면 폐가였다. 주인이 떠나버린 텅 빈 농가 마당엔 수북하게 자란 개망초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어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산자락 아래 약간 경사진 제법 넓은 밭은 경작을 하지 않아 역시 개망초로 뒤덮여 있었지만 뒤쪽의 하얀 꽃을 피운 밤나무 밭과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골짜기 입구가 가까워지자 몇 채의 농가들과 함께 논밭이 조금 넓어졌다.

길 아래로 가축을 기르는 축사가 보여 다가가보니 누렁이 한우들이다. 한우들을 보노라니 벌서 두 달째 계속되고 있는 미국산 미친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가 떠올랐다.

조금 더 내려오자 손바닥만 한 다락논가에 서있는 초라한 농가 마당에 꽃들이 피어 있었는데, 왠지 청초해 보인다. 붉은 접시꽃과 낮은 전신주를 타고 오른 넝쿨장미였다. 5월의 여왕 장미가 이 골짜기에선 뒤늦은 7월초에 한창인 모습이 이채로웠다.

마당 가득 개망초가 흐드러진 쓸쓸한 모습의 폐농가
 마당 가득 개망초가 흐드러진 쓸쓸한 모습의 폐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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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이제 다 왔구먼, 오늘 아홉 시간을 걸었잖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이제 다시 또 이 산악회 따라오나 봐라!"

산을 내려올 때부터 몹시 힘들어하던 일행이 드디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골짜기를 벗어나는 지점에 이르자 '소재골'이라는 마을 안내판이 서 있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강 건너 주차장 저만큼에 우리들이 타고 돌아올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이승철, #대암산, #칼바위 능선, #골짜기, #취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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