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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 차창 밖의 경치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알프스의 산줄기와 호수를 지나는 이 철길은 스위스의 3대 관광철도 노선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이 높은 길이다. 이름 하여 골든 패스. 몽트뢰(Montreux), 쯔바이짐멘(Zweisimmen)을 출발하여 스위스의 대표적인 관광도시인 인터라켄(Interlaken)과 루체른(Luzern) 사이를 연결하는 이 철길의 풍경은 세계 어느 곳도 따라갈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나는 이 철길 구간의 창밖을 보면서 왜 이 구간을 골든 패스라고 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인터라켄 동역(Interlaken Ost)에서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창문을 위로 열어 제켰다. 창문을 통해 알프스 고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하고 때 묻지 않은 공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출발할 때 기차의 왼쪽 좌석에 앉았지만 기차의 오른쪽으로 호수의 절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이 앉지 않은 빈 좌석이 많기 때문에 나는 기차의 오른쪽 객석으로 옮겨, 오른쪽 창문도 열었다. 그런데 아내가 나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여보, 앞자리의 스위스 할머니가 기차 안에 바람이 들어오는 게 싫은가 봐. 아까 이쪽 창문 올릴 때도 당신을 보고 뭐라고 그러는 거 같던데?"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할머니와 같이 앉은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창문을 내려달라는 시늉을 했다. 노인을 공경하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나는 두 말 하지 않고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을 쐬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차창 유리창 안에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창문의 유리를 통과한 사진이 조금 뿌옇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객실에 들어오려던 한 동양인 부부가 우리를 보고 인사를 하려다가 머뭇거렸다. 같은 일본인인줄 알고 반가워했는데, 아무래도 한국인임을 느낀 모양이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인사를 나누기가 부담되었을까?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그들이 우리 좌석에서 꽤 떨어진 좌석에 가서 앉는 바람에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창 밖에 이어지던 브리엔츠(Brienz) 호수는 점점 더 크기가 커지면서 광대한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호수 변의 민가 앞에는 작은 요트들이 비닐 커버에 덮힌 채 정박해 있었고, 호수의 대단한 절경을 보기 위함인지 꽤 높은 언덕 위에도 집과 방갈로들이 올라가 있었다. 철길 아래로는 승용차 도로가 호수를 따라 함께 달리고 있었고, 호수에 점점이 떠 있는 요트들은 한가하기만 했다.

푸른 옥빛 같은 물색이 신기하기만 하다.
▲ 브리엔츠 호수. 푸른 옥빛 같은 물색이 신기하기만 하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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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호수의 신비한 색깔이다. 에머랄드 색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하고 푸른 옥빛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맞지 않는 듯한 신비한 색이 호수에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물 속에 녹아 있는 석회질이나 산소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런 색상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힘이 신기할 따름이다. 물 색깔에 감동을 받는 것은 사람도 결국 물에서 출발한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차는 어느새 브리엔츠 역에 도착했다. 정말 대단한 것은 이 관광열차가 호수가 바로 옆에 만들어진 역에 멈춰 선다는 사실이다. 산의 경사가 심해서 호수 옆에 역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하여튼 호수 변에 멈춰진 기차의 차창 밖으로 유리 같은 호수가 손에 닿을 듯이 다가왔다.

호수 옆에 기차가 정차한다.
▲ 브리엔츠 역. 호수 옆에 기차가 정차한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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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전면을 호수가 막고 서 있어서 마치 기차가 호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듯 했다. 바로 옆 호수 변 산책로에서 조깅을 하고 있는 건장한 스위스 아가씨들의 숨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이 아름다운 철길을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시간은 밤 늦은 시간이었다. 멀리서 민가의 불빛만 조금 새어나올 뿐 그 아름답다는 골든 패스의 차창 밖 정경을 구경하지 못했었다. 당시 내가 탄 겨울날 밤의 골든 패스 객실에는 여행객이 한 사람도 없었고, 옆 객실에 탄 남미 여행자들의 구슬픈 피리 소리가 나의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사진으로 여러 번 감상했던 브리엔츠 호수였지만, 직접 보는 호수의 정경은 역시 느낌이 판이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진 정경 백번 보는 것보다 직접 한번 보는 것이 나은 것이다.

골든 패스는 브리엔츠 호수를 뒤로 하고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철길 옆으로는 석회질로 온통 희뿌연 시내물이 따라오고 있었다. 마치 회색빛 스포츠 음료가 시냇물에 가득 풀어져 있는 듯 하였다. 시냇물의 물길은 폭이 좁지만 물이 넘칠 듯이 가득했다. 산이 높기에 물이 가득한 것이다.

나의 영웅 셜록 홈즈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폭포이다.
▲ 라이헨바흐 폭포. 나의 영웅 셜록 홈즈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폭포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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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차가 달리는 오른편으로 큰 2단 폭포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 폭포의 이름은 라이헨바흐 폭포(Reichenbach Falls)였다. 높이 250m에 이르는 이 폭포는 계단같이 내려오다가 마지막에는 한줄기 물줄기를 땅 아래로 쏟아 붓고 있었다. 실제로 본 폭포는 엄청나게 큰 규모였다. 거대한 폭포가 절벽에 걸려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 폭포는 내 나이 어릴 적 영웅이 죽었던 현장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셜록 홈즈(Sherlock Holmes)'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추리소설 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나는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 전집을 용돈을 모아서 한 권 한 권 사서 읽었다. 셜록 홈즈의 해박한 지식과 흥미진진한 추리, 그리고 당시 영국을 묘사하는 세세한 문장에 나는 흠뻑 매료되어 있었다. 

나의 영웅이 숙적이었던 모리어티(Moriarty) 교수와 만나서 싸우다가 함께 죽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주인공이 죽다….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 나쁜 사람을 물리친다는 도식에 젖어있었던 나에게 그의 죽음은 충격이었다.

벌써 삼십년 전에 읽은 책이었다. 주인공이 악당과 싸우던 음산한 폭포는 여름의 태양 아래 너무도 힘차게 물줄기를 쏟아 붓고 있었다. 나는 왠지 내 어릴 적 기억이 너무나 밝은 실제 정경 앞에서 깨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기차는 한 작은 마을, 작은 역 앞에 멈춰 섰다. 마이링겐(Meiringen)이다. 이 작은 마을에 코난 도일의 별장이 있었고, 코난 도일은 라이헨바흐 폭포의 작렬하는 물줄기와 소용돌이 속에 셜록 홈즈를 등장시키게 된다. 셜록 홈즈는 이 마이링겐의 폭포를 배경으로 죽게 되었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독자들이 이 작은 도시를 찾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지금 기차가 멈춰 선 기차역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현재 마이링겐은 셜록 홈즈의 박물관까지 만들어 여행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한 작가가 절경에서 영감을 얻고 그 영감은 작은 마을에 문화적 풍요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역 앞의 작은 벼룩시장이 인상적이다.
▲ 브뤼니히-하스리버그 역 앞의 작은 벼룩시장이 인상적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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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패스는 아주 천천히 브뤼니히 고개(BrÜnig Pass)를 올랐다. 방금 지나온 마이링겐과 라이헨바흐 폭포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고개 위에 위치한 브뤼니히-하스리버그(BrÜnig-Hasliberg) 역에는 조그마한 벼룩시장이 펼쳐져 있고, 물건들 앞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이들이 얼마나 근검절약하면서 사는지를 알 수가 있다.

잠이 부족한 아내는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이 기막힌 절경 앞에서 눈이 감기고 있었다. 신영이는 기차의 좌석 앞 선반 위에 일기장을 내 놓고 연필로 열심히 일기를 적고 있었다. 개학 후 초등학교에 제출할 일기 속에는 알프스에서의 감동이 적혀나가고 있었다.

기차가 고개를 내려오자 왼쪽 차창 밖으로 숨 막힐 듯이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났다. 쉔브엘산(2,011m)을 배경으로 룬게른 호수(Lungernsee)가 펼쳐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출간된 <세계 50대 절경>에 세계적인 절경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호수였다. 높은 산과 호수가 푸른 초지의 낮은 구릉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구릉 위에 전형적인 스위스의 가옥들이 예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호수 뒤의 병풍 같은 알프스 산맥은 이국적이면서 장엄했다.

세계적인 절경으로 뽑힌 호수이다.
▲ 룬게른 호수. 세계적인 절경으로 뽑힌 호수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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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패스는 산기슭을 달리고 있었다. 기차에서는 호수와 교회, 그리고 갈색 삼각형 지붕의 민가를 잘 조망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온 젊은 신부는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룬게른 호수의 정경에 넋을 잃고 있었다.

저 호수 너머 산 너머에 요정이 살고 있을까? 룬게른은 너무 평화롭고 조용하며 아름다웠다. 룬게른 호수의 정경은 정녕 나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나는 자연의 녹색 능선을 전혀 무너뜨리지 않고 잘 보존하며 사는 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호수 변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흥겹다기보다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정경이다. 나는 이 고요한 정경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서울의 거대한 물류 속에서 살아온 내가 이 조용한 호수 옆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야 된다면? 눈앞에 보이는 산과 호수가 너무 아름다워서 슬퍼지고 죽고 싶어질 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호수를 보면서 스위스에 우울증 환자가 많은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는 한 폭의 수채화 속에 들어와 있었다. 아니 달력에서나 보던 알프스의 호수 속을 달리고 있었다. 그 달력 속의 사진은 이상했다. 점점 움직이면서 알프스의 다양한 모습을 슬라이드 지나가듯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달력 속의 사진은 점점 멀어지면서도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스위스, #브리엔츠, #마이링겐, #룬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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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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