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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성희롱 이슈를 첫 제기한 ‘서울대 우조교 사건.
 우리 사회에 성희롱 이슈를 첫 제기한 ‘서울대 우조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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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희 기자] 성희롱을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법과 제도가 시행된 지 올해로 10년째다. 하지만 사흘에 한번 꼴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성희롱 진정이 접수되거나 법원 판결이 나올 정도로 성희롱은 '일상생활'의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22일부터는 남녀고용평등법 전면 개정안(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됨에 따라 '고객에 의한 성희롱'도 처벌 대상에 포함됐다. 이를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졌다'고 보는 긍정적 시각도 있지만, 최근 '여교사 술 따르기' 판결에서처럼 모호한 판단기준으로 인한 시대역행적 관행이 여전하고, 인권위 권고를 강제할 수 없는 문제 등 과제가 더 많다는 지적이다.

국가인권위가 성희롱 시정 업무를 맡은 지 3주년을 맞아 지난 24일 토론회를 열었다. 성희롱 규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제안들이 쏟아졌다. 성희롱 관련 법·제도 개선부터 성희롱 예방교육의 현실화까지 토론회에서 논의된 쟁점과 개선방안을 정리했다. 개원 이래 처음으로 인권위 권고를 받은 국회 사무처의 문제도 짚어봤다.

성희롱 판단근거인 '합리적 여성의 관점'에 대해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여성 3명 중 1명만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는 이유로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결하거나, 비슷한 사건에 대해서도 다른 결정을 내리는 등 오히려 성희롱 판단에 혼란만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6월 회식자리에서 여교사에게 술 따르기를 권유한 초등학교 교감의 행위가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여성 3명 중 2명이 성적 굴욕감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1명이 느낀 감정은 합리적 여성의 관점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합리적 여성의 관점'이란 일반 여성이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진정인과 마찬가지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것으로 판단되면 성희롱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차혜령 변호사(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족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에 직장 내 성희롱의 대표적 사례로 명시해 놓고도 법원은 일관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인권위와 여성부, 노동부, 법무부 등 성희롱 업무를 다루는 정부부처가 협의체를 만들어 성희롱 판단에 대한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이 기준이 일관되게 적용되도록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성희롱 권고 및 기각 결정의 근거
 국가인권위원회 성희롱 권고 및 기각 결정의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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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그때 그때 다르다?'

'합리적'이라는 의미 자체가 모호하고 주관성이 크다는 지적도 높다.

국가인권위는 수업시간에 한 여학생을 가리키며 "너 정도면 난자 가격이 비싸겠는데…"라고 말한 대학교수에 대해 "교수가 수업시간에 난자가격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일반여성의 합리적 관점'에서 볼 때 심한 성적 굴욕감 또는 수치심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성희롱 결정을 내렸다.

반면 대형할인매장 까르푸의 한 남성 상사가 수납팀 여성 직원들에게 "이렇게 예쁜데 왜 아직 결혼을 안 하고 있느냐"고 말하고, 회식자리에서 여성 직원의 허벅지를 때리고 팔뚝을 깨문 행위에 대해서는 기각 처리했다. <표참조>

인권위는 "이 정도의 발언은 '일반적인 여성의 합리적 관점'에서 볼 때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할 정도의 성희롱은 아니며, 때리고 깨문 행위는 분명 불쾌감을 일으킬 만하나 성적 수치심이나 굴욕감,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성희롱의 판단기준인 '합리적 여성의 관점'은 입법 초기부터 의미가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실제로 두 사건에서도 결과를 달리할 뚜렷한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인권위의 성희롱에 대한 판단은 합리적 여성의 관점을 우선하고 있지만 사실상 판단자의 자의적 해석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까르푸 여성 직원들은 인권위의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냈고,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18일 "인권위가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가해자 과태료 부과 확대"

처음으로 회사의 책임을 물은 ‘롯데호텔 사건’.
 처음으로 회사의 책임을 물은 ‘롯데호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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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규제 강화를 위해 가해자 처벌 강화와 피해자 구제수단 확대를 위한 방안도 제안됐다.

차혜령 변호사는 "인권위 권고는 이행하지 않아도 제재조치가 없다"며 "현행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의 차별시정 절차를 참고해 인권위의 시정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법무부장관이 시정명령을 내리고, 이마저도 불이행하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행정처분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차 변호사는 인권위가 조정이나 권고를 통해 성희롱 사실을 확정하고 노동부에 통지하면, 노동부가 가해자에게 과태료 부과처분을 하는 규정을 신설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피해자 구제수단도 논의됐다.

이수연 국가인권위 차별시정본부 성차별팀장은 "가해자가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피해자의 권리회복은 달성되기 어렵다"며 "인권위 결정에 불복하는 가해자를 상대로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할 경우 비용을 정부가 보조해주거나 국선 변호인 제도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 장치를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위가 주최하는 인권교육의 실효성을 높이자는 지적도 나왔다.

이미경 소장은 "인권위가 권고결정을 내린 39건 중 82%에 달하는 32건에 대해 인권교육 권고가 내려졌지만 1회 4시간만으로는 효과가 없다"며 "최소 4회 이상 출석토록 해 꾸준한 교육을 받도록 하고, 더불어 교육대상의 성희롱 행위유형에 따른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전문 강사 인력풀의 운영, 이를 위한 예산과 인적자원 투자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회도 '성희롱' 무방비
"공식적으로 단 한 건의 성희롱 사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국회 사무처 총무과에 설치된 성희롱 고충전담기구 상담원의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국회 내엔 성추행과 성차별, 성폭력과 관련된 소문들이 빈번하게 떠돈다. 국회라는 공간 자체가 다른 조직보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어서 은폐되는 '비공개' 사건이 더 많고, 예방과 대처에 관한 제도와 규정이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 국회 관계자들의 일관된 지적이다.

이 때문에 지난 5월 19일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위원회가 국회 사무총장에게 성희롱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여 시행할 것을 권고한 결정이 눈길을 끈다.

지난 2007년 1월 모 의원실 여직원은 회식 자리에서 성희롱 및 성차별을 당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다. 이 여직원은 "진정을 내기 전 당 내에서 사건을 공론화해 국회의 권위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고 말했다.

국회 사무처에 수차례 문의했지만 "처벌 규정이 없다"는 답을 들었고, 가해자 면직처리 과정에서 "처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인권위에 사건을 진정했다. 이에 인권위는 지난 5월 19일 "성희롱 심의위원회가 구성조차 돼 있지 않는 등 국회 사무처의 성희롱 예방 및 처리지침의 관련 규정과 제도가 실질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고 보이는 바, 성희롱 예방에 필요한 조치 및 성희롱 사건 발생 시 조사, 피해자 보호, 가해자 처벌 규정 등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고 이를 직원들에게 상세히 안내하도록 관련 규정과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며 국회 사무총장에게 대책수립 시행을 권고했다.

이번 결정은 여성발전기본법에서 정한 국가기관의 성희롱 예방교육만으로는 충분히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 없음을 인정한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이와 같은 권고를 받은 국회 사무처가 개선 의지를 갖고 있느냐는 점이다.

국회 사무처는 일단 "검토 중"이라는 입장이다. 사무처 관계자는 "여러 성희롱 관련 사례집이나 관련 규정들을 살펴보고 정비하거나 보충할 사안이 있으면 추진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인권위가 문제로 지적한 '성희롱 심의위원회 구성'에 대해서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 사무처 성희롱 예방 및 처리지침 제11조에 따르면 '성희롱 관련 사안의 처리와 관련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해 사무총장 소속하에 성희롱 심의위원회를 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사무처 관계자는 "징계위원회나 승진심사위원회 등 인사 관련 위원회를 해당 사안이 있을 때 처리하기 위해 구성하는 것처럼 성희롱 심의위원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성희롱 사건이 접수된 경우가 한 건도 없어 성희롱 심의위를 구성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상시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명시적 근거나 상위 법률, 법령 규정이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간 크고 작은 사건이 지속적으로 터져 나왔음에도 공식적으로 피해 사례가 접수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위원회 구성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태그:#성희롱, #범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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