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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가 '사는' 법의 차이를 밝혀내는 동시에, 쇼핑을 '즐기는 것'이 젊은 여성들이나 돈 많은 귀부인들만의 영역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풀어주는 이 책의 겉그림.
 남자와 여자가 '사는' 법의 차이를 밝혀내는 동시에, 쇼핑을 '즐기는 것'이 젊은 여성들이나 돈 많은 귀부인들만의 영역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풀어주는 이 책의 겉그림.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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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그러나 필자를 비롯해 은근히 많은 여성들이 탐독하는) 잡지 <GQ KOREA> 편집장 이충걸의 새 책 <갖고 싶은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위즈덤 하우스 펴냄)가 나왔다.

현실의 지갑을 떠올리면 한없이 주눅들게 만드는 '신상', 그것도 값비싼 신상 중의 신상이 그득 실려 있는  잡지 제작자가 '쇼핑'에 대해 쓴 원고 1800매 분량의 글 가운데 일부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대중에게 쇼핑을 조장하는 직업을 가진, 스스로 쇼핑 마니아임을 자인하는 이충걸의 책 속 목소리를 그대로 담은 가상 인터뷰로 쇼핑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 당신이 생각하는 우리 시대의 '쇼핑'은?
"현대 사회는 속도전이다. 다들 너무 바빠서 쇼핑할 시간도 없다. 그래도 늘 뭔가를 애타게 원하고 열망한다.

집에서 마우스를 몇 번만 클릭하고, 수박을 먹으며 홈쇼핑의 자동주문전화 버튼만 누르면, 며칠 후엔 감격적인 땅콩빛 상자 하나가 배달된다.

이젠 누구나 찰나의 수고만으로 몸 속에 일렁이는 차갑고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다. 포장을 열면 좋아하는 사람한테서 선물을 받은 듯한 착각으로 감미롭다. 주문한 사람이 자기라는 것도 잊고."

- 밖에 나가지 않고도 살 수 있는 홈쇼핑은 '쇼핑의 혁명'에 가깝다. 초고속 인터넷과 총알배송으로 무장한 온라인 쇼핑에 비해 텔레비전 홈쇼핑은 고전적인 상행위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래도 텔레비전 채널 여러 개를 점령한 그들의 파워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당신 눈에 비친 홈쇼핑은 어떤 매체인가? 
"놀랍게도 홈쇼핑의 어느 것 하나 명품 아닌 게 없다. 브랜드라고 하기엔 어딘지 쇠락한 제품에도 부활의 생명력이 움트며, 비싸든 싸든 꺾일 줄 모르는 자부심은 상황에 따라 유연해진다. 홈쇼핑에는 인생의 우울과 비탄도 없다. 모든 게 즐겁다. 쇼호스트뿐 아니라 패널들, 써보니 좋다는 체험단 모두 반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미 반한 상태다.

이보다 더 싸고 좋은 조건으로 이 상품을 줄 데는 없다는 불가침의 자부심, 이 구성 이 가격으론 다시는 만나볼 수 없다는 즐거운 협박, 결국 경쟁력 있는 가격이 안정된 투자라는 회유,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는데 11분 더 드리겠다고 시간을 늘려주는 인심, 공짜도 아니면서 '어서 빨리 가져가라'고 종용하는 무료 급식 창고 직원 같은 배려, 꼭 간택된 300분께만 이 혜택을드리겠다는 넓디 넓은 마음.

쇼호스트들이 수선스럽고도 간드러진 목소리로 구사하는 단어들은, 이 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초조와 강박으로 얼룩져 있다. 차라리, 인생은 길지 않고 이 순간만 소중하다는 현대적 선(善)이다."

- 자신들의 소비행위에 대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값비싼 물건을 소비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투자로 이해하는 사람들 말이다. 쇼핑도 투자가 될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에 대해 듣고 싶다.  
"신용카드의 한도를 넘길 경우, 쇼핑중독자들은 구매의 정당성을 위해 마음 속의 재무 보고서를 조작한다. 일반적인 트릭은 눈독 들이던 외투를 사고는 술 몇 번 안 마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어휘를 조작하기도 한다. '이 이음새를 정교하게 감춘 수트는 하나의 습득이야. 내 컬렉션의 마지막 부분이야. 무모한 과소비가 아니라 투자야. 우린 특별한 것에 대한 투자를 이해해야 해. 언젠가 유산이 될 거니까' 물론 그 말은 사실일 수 있다. 모자가 달린 빨간색 디올 쿠뛰르 수트라면!

또는 쇼핑의 황금률과 궁극의 역설을 발명한다. '좋은 걸 사느라 돈을 많이 썼다는 건, 오랫동안 돈을 아끼는 것과 같아. 시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지. 비싼 시계는 매일 차면 지불비용을 만회할 수 있어. 이 오디오를 살까 말까 고민하는 데만 10개월을 보냈으니 앞으로 10년을 더 즐기면 되는 거 아냐? 가격을 앞으로 쓸 횟수로 나누기도 한다. 20만 원짜리 재킷은 200번쯤 입으면 본전은 뽑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쇼핑중독자는 쇼핑백에 희망찬 내일을 담는 사람들

- 쇼핑 중독이 끼치는 해악이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중독된 쇼핑 마니아들을 위한 변명 한 마디를 선물한다면?
"중독이란 게 무엇이든 한 가지만 줄곧 생각하는 어떤 열정적인 상태라면, 아주 멋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쇼핑중독자들은 열심히 번 돈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개선하는 동시에 사회 경제가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들이며, 쇼핑백에 희망찬 내일을 담는 사람들이며, 영원히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쇼핑만이 시든 욕망에 다시 불을 당길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순수한 사람들이 아닐까? 굳이 그들과 나를 위로하는 말이긴 하지만……."

- 당신이 만드는 잡지를 보면 패션은 물론 생활 전반에 걸쳐 트렌드 리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는 것조차 아무 데서나 사먹으면 곤란하다며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맛집' 역시 '머스트 해브 아이템' 목록에 추가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들 정도다. 잡지 기자들이 일러주는 '핫'한 음식점 선정 과정이 궁금하다.
"'거기 레스토랑'은 몇 단계를 거쳐 알려진다. 처음엔 패션 리더들, 즉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들, 라이선스 잡지의 패션 에디터들이 들르고 나면, 청담동 주부들이 다음 순서를 잇는다. '기지 바지' 입은 장삼이사 부대들이 레스토랑을 점거할 때쯤이면, 더 이상 전율을 느낄 수 없는 김 샌 패션 피플들은 새 서식지를 찾아 길 떠나는 은장도가 된다. 먹는 데조차 앞서겠다는 야심은 우월감만큼 중요하니까."

-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메뚜기떼처럼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하나 같이 매끈한 사람들로 법석대는 이 '동물 농장'의 관용구는 '내가 뉴욕에 있을 때'이다. 형용사뿐 아니라 통째로 영어를 구사하는 이들에겐 외국 학교에 낸 수업료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얼마나 반가울까마는. 그래. 문화적 과도기엔 노골적으로 새 것을 숭상하고도 싶겠지. 이렇게 들쑥날쑥 흥망성쇠를 거치다 보면 정통은 정통대로, 퓨전은 퓨전대로 제자리를 찾겠지. 하지만 그때도 철새들은 새로운 도래지를 찾아 날아들 가겠지."

- 책에 보면 쇼핑에 관한 한 남성용 거짓말과 여성용 거짓말이 미리 준비돼 있는 것 같다.
"여자들은 거짓말을 날조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아예 새로운 공장 하나를 짓는다. 쇼핑에서도 똑같다. 아내가 남편에게 셔츠 하나가 10만 원이라고 말한다면 가격도 정말 10만 원이다. 그러나 그게 실은 아내 아닌 다른 여자가 생일 선물로 사준 것이며, 그건 또 자신이 전에 그녀에게 사주었던 소나타에 대한 감사의 표시란 사실은 생략해 버린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선 그렇게 단위가 큰 남편이, 아끼고 아끼다가 겨우 뭔가 사자고 드는 아내에겐 꼭 묻는 것이다. '그게 그렇게 필요해? 집에 똑같은 건 없어?'"

- 당신의 책은 쇼핑이라는 행위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특히 '럭셔리 베이비'라든가, 결혼한 부부의 쇼핑에 대해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쇼핑을 통해 본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 듣고 싶다.

"쇼핑만큼 성적 역할을 각성 시키는 행위도 없다. 여자와 아이들을 우선시하는 남자들은 밀린 청구서들과 주택자금 대출금과 아이들 학자금을 처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를 위해 쇼핑하는 건 거의 인류학적 경향이다.

전통적으로 한 가계의 구매 전담 대행자인 여자가 쇼핑을 할 땐, 잡화나 식료품처럼 가족 모두의 필요라는 공동의 연관성을 따른다. 여자들의 타고난 조심성은 가족 양육자로서의 전통적인 역할로부터 결정(結晶)되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때 여자들이 산 선물의 태반은 반대의 성을 위한 것이다. 여자는 아무리 과감한 구매자라 해도 결국 이타적인 족속이다."

책 속 부록부터 읽어도 좋을 쇼핑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우리 시대의 쇼핑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에 다름아닌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는 밑줄 팍팍 그으며 흉내내고 싶은 그만의 비유법과 재기발랄한 입담과 자학적 유머가 페이지를 넘기기 무섭게 경쟁하듯 등장하여 책장을 술술 넘어가게 한다.

물론 잡지 편집장으로 오래 일해 온 그가 보낸 '책 속 부록'도 마련돼 있으니, 1800매에서 쳐낸 길고도 짧은 글을 너무 아쉬워 마시라.

'소비 조정자들과의 인터뷰'에는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자동차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 산업 디자이너 필립 스탁과 나눈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질문과 대답 모두 까맣게 속이 채워진 별 다섯 개를 다 내줘도 아깝지 않으니, 성질 급한 독자들은 부록부터 읽어도 좋겠다.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이충걸 지음, 위즈덤하우스(2008)


태그:#쇼핑, #쇼핑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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