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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요즈음처럼 욕을 먹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보수 종교 지도자가 지나치게 정치적이거나 왜곡된 사회적 시각을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는 종교인의 행동과 사고에 의해 판단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정교일치'를 주장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일부 종교의 보수적인 인사들의 행태와 행동이 종교를 종교인만의 ‘종교’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생활과 마음의 평화를 위한 하나의 도구일 따름이다. 종교를 통해 얻는 행복과 삶에 대한 만족이 바로 종교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의 행복을 위한 역할은 세상이 어려울 때, 그리고 생활이 힘들 때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가 사람의 행복과 삶에 대한 만족을 앗아가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개신교)나 이슬람 근본원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세계 평화는 바로 전쟁을 통한 평화이고 학살과 무력을 통한 평화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종교 때문에 세상이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종교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있다. 그래서 종교가 불안하다. 아니 종교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해야 옳을 성싶다. 사회가 불안할 때 종교의 자리는 더 커지고 더 넓어진다. 그러나 요즘 사회와 사람들이 종교를 걱정한다. 물질과 세속을 벗어난 생활 속에서 영혼의 순수성과 평온을 위한 안식처가 바로 종교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논란의 여지가 많고, 민감한 주제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루기를 주저하고 꺼려한다. 그러나 종교는 우리의 생활이자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는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종교를 피상적으로 살펴보면 상당히 걱정스러운 측면이 많다. 종교의 진정한 의미와 종교의 바람직한 모습, 현시대의 종교의 역할을 '구렁이 담 넘어 가듯' 들여다보자.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부터 접근해야 한다. 지구상에 수많은 종교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결국, 종교도 문화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우열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종교도 문화의 일부라고 본다면 결국 종교의 본질상 우열을 따져서는 안 된다. 물론 상위문화와 하위문화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의 분류는 같은 문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무탄트 메시지>(Mutant Message Down Under, Marlo Morgan)에서 서양인들이 식인종들에게 미개인이고 야만적이라고 비난을 한다. 그러나 호주 원주민은 문화의 차이를 그들 방식으로 설명을 한다.

 

우리는 먹을 것이 부족할 때 사람을 죽인다. 사람을 식량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당신네 서양인들은 먹지도 않으면서 사람을 죽인다. 누가 더 야만적이고 누가 더 미개인인가라고 되묻는다. 문화도 종교도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 문화와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문화와 종교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다음' 국어사전 참조)라고 종교의 의미를 사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종교는 가지고 있다.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나 마찬가지다. 인간과 종교는 서로 그만큼 관계가 깊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고 끊임없이 영원을 갈망하여 찾아나서는 가장 근본적이며 실존적인 인간의 욕구와 직결되는 것이다. 종교는 영원을 희망하는 인간들에 대한 응답이며, 이러한 희망을 통하여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결국 종교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깊이 물어 보고 따지는 데서 생기는 인간 실존의 사건이며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가톨릭교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 의미를 떠나 인간의 삶에 보탬을 주고 생활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의미는 아닐까?

 

종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할까? 부처와 예수, 알라 등의 절대자를 위해서 종교가 존재하는가? 우문 같지만 요즘 혼란스럽다.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종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원래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보다 강한 면을 가진 존재를 숭배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이 나오게 된 것이다.

 

종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나는 원시신앙을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생각했다. 러시아에 사는 몽골리안 중의 한 부족인 울치족은 자신들을 곰의 자손으로 여긴다. 그들은 곰을 숭배하면서도 그 곰을 잡아먹는다. 곰을 죽일 때면 남자들은 춤을 추며 곰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곰이 자신의 지역에서 다시 태어나 주기를 기도한다고 최성현은 <바보이반의 산 이야기>(도솔)에서 말한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는 다시 우리나라 종교를 생각해 보았다. 종교의 존재론적 의미는 무엇인가? 왜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이다. 우리 현대인은 솔직해져야 한다. 종교에 관한 한 말이다. 현대 종교들도 이들 원시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인도에서의 종교를 보면 종교가 변화하는 대상이지 영원무구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는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고 그 시대의 생활에 맞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의 종교를 보면 이런 면이 많이 무시되고 있다.

 

종교는 신념이다. 신념이란 무형의 존재이다. 이러한 신념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사람마다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이런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나 신념이나 종교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할 까? 내 생각으론 불가능하다. 문화와 생각과 생활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 배타적인 종교는 결국 갈등과 다툼을 만들어 낸다. 이런 갈등과 다툼을 야기하는 종교가 과연 진정한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생각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존과 협력은 불가능하다.

 

종교(宗敎)를 풀이해 보면 '으뜸' 종과 '가르칠' 교이다. 즉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종교는 다른 어떤 지식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가 이런 기본적인 가치를 가지지 않다면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요즈음 일부 보수 개신교의 한 종교집단의 집회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들의 집회내용이나 집회방식이 통상적인 인식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본질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종교집단의 집회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종교는 개인적 신념과 관련이 있다. 종교가 집단적인 경향을 띠면 종교의 존재의미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종교의 가장 우울한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지나치게 사익을 추구하고 상업적이고 권력 지향적이다. 대형화를 지향한다든지 조직의 이익이나 정치성 주장을 위해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종교는 더 이상 으뜸가는 가르침은 아니다. 종교의 본질적 의미를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종교가 아니라 압력단체인 이익집단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종교에겐 큰 불행이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집회내용도 마찬가지다. 집회에서 주장한 내용을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지할 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종교집회에서 주장할 내용인지도 의문이 간다. 미국의 성조기를 흔들면서 미국 쇠고기는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정치색을 띠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옹호하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을 '사탄의 무리'라고 비난하는 그들의 주장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보수집단이나 수구보수언론을 제외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리고 종교가 가져야하는 객관성이나 포용성을 갖지 못한 그런 주장은 종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물론 그런 집회를 대서특필하면서 자사의 이익과 주장을 부각하려는 일부 수구보수언론은 더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본래의 존재의미를 상실한 이런 일들이 결국 종교와 언론을 국민이 걱정스럽게 보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언론이나 종교가 사회와 국민을 어려운 현실에서 구해주어야 하는데 우리의 종교와 언론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종교는 지나치게 비대화되어 있다. 아니 대형화만을 추구하는 교회나 사찰이 너무 많다. 어떤 종교 통계를 보니, 규모(신자수)면에서 세계 10대 교회에 우리나라의 교회가 1위에서 4위까지 차지하고 있고, 세계 50대 교회 중에 24개 교회가 우리나라 교회라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종교의 비대화가 상식을 벗어났고, 외형과 허세만 중시하고 있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특정종교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경제적인 의미로 볼 때, 대형화는 효율성을 확보하기가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종교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형화는 곧 세력화를 의미하고 결국 권력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결코 바람직한 종교의 모습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에 대한 사회적 교육적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사회와 인간은 종교를 필요로 한다. 모든 종교는 우리 인간에게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종교도 사회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종교 자체가 갖는 절대성 때문에 인간은 종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간사회의 시작과 더불어 종교적 의식이나 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간과 신은 서로에게 필연적 존재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인간사회에서 그런 필수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종교나 신은 완벽하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완벽하다. 인간이 닮아가야 하는 완벽한 대상이 신이고, 종교의 원리와 방식에 따라 생활할 때 인간세계는 완벽한 이상향이고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세계가 된다. 문제는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 종교를 잘 못 이해하고 잘못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의 행동과 사고가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문제라면 이것은 교육의 문제다. 교육이 풀어야 하는 문제라는 거다. 교육이 종교를 다루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학교에서 종교를 다루어야 한다. 단지 철학이나 윤리 교육차원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정규 교육과정으로 다루어야 한다. 물론 종교가 윤리와 철학사상과 중복되는 영역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윤리와 철학사상과 종교는 분명 다르다. 특히, 종교인들은 종교를 철학이나 윤리의 문제로 절대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학교에서 다루는 종교교육도 단지 윤리나 철학 차원의 교육은 별 의미가 없다. 종교를 종교로 이해해야지 두루뭉실하게 철학이나 윤리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학생들의 종교에 대한 이해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나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나 분쟁의 대부분은 종교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모른 체하고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종교적 대립이나 갈등은 우리 의식 속에 상당히 많이 내재되어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서 종교문제는 곧 사회문제, 정치문제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당연히 교육은 미래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교육이 역할을 해야 한다. 물론 종교가 종교의 본래 존재의미를 찾는 것이 더 시급하다. 바로 종교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태그:#보수기독교, #종교의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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