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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비버(사진은 발트 3국과 가까운 노르웨이에 서식하는 비버다).
 유럽 비버(사진은 발트 3국과 가까운 노르웨이에 서식하는 비버다).
ⓒ Harald Olsen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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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어떤 동물로 인해 발생한 재해들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숲속에 사는 동물 중 어떤 끔찍한 것들이 이런 해를 끼치는 것일까? 참고로, 늑대나 호랑이 같은 맹수의 짓은 결코 아니다.

▲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는 이 동물이 지하에 파놓은 굴 때문에 순찰하던 수비대원들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경수비대는 그 동물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순찰 지역을 변경해야 했다.
▲ 벨로루시의 한 마을에서는 이 동물 때문에 국도가 막히고 주변 마을 사람들이 대피해야 하는 일도 발생했다.
▲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 국경 지대에서는 이 동물의 활동 때문에 홍수가 발생해 한겨울에 이재민이 생기고 말았다.

홍수를 일으키고 국도를 폐쇄시키는 '숲의 악동' 비버

땅에 굴을 파서 추락 사고를 일으키고 길을 막아버리는 등의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이 동물은 무엇일까? 한강에서 뛰쳐나온 괴물처럼 덩치가 커다랗고 힘이 센 동물일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놀랍게도 이는 우리가 순수하고 귀여운 동물로 알고 있는 비버 때문에 생긴 폐해들이다.

비버는 숲에 살면서 강물을 막아 튼튼한 둑을 만드는 동물로 유명하다. 맑은 물이 흐르고 공기가 맑은 숲을 대표할 정도로 비버는 자연친화적이고 온순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발트 3국(그중에서도 특히 에스토니아) 및 그와 접한 벨로루시에서 비버는 자연 환경을 훼손하고 인근 농가에까지 해를 끼치는 숲의 악동으로 떠올랐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겨울이 시작할 무렵 비버들의 행태를 보고 그 해의 추위 정도를 짐작한다고 한다. 비버들이 겨울 양식을 많이 모으면, 그 겨울은 상당히 추운 날씨가 이어질 것이라는 해석이다. 작년 늦가을 비버들은 유독 겨울 양식을 많이 모았고, 그에 따라 상당히 추운 날씨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난 겨울 내내 에스토니아에서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었을 만큼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따뜻했던 지난 겨울, 왕성해진 비버들

비버는 일반적으로 강이 얼어붙어 있는 기간 동안에는 나무껍질 등으로 연명하면서 겨울을 지내고, 눈이 녹기 시작하는 3월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유독 따뜻했던 지난 겨울은 비버들이 얌전히 겨울을 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숲과 강이 유독 많은 에스토니아 남부와 동부 지역의 경우, 비버들이 농가에까지 내려와 재배하는 나무를 쏠아버려 큰 피해를 주었다. 

동부 지역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몇 년 동안 사과나무를 금이야 옥이야 키운 한 농부는 비버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사과나무가 세 그루나 잘려나가는 사고를 겪었다. 그중 한 그루는 비버들이 미처 자르지 못해 이빨 자국만 여기저기 남은 상태였고, 두 그루는 완전히 잘려 비버들이 밤새 강둑을 쌓는 데 사용됐다. 비버로 인한 이러한 피해 사례는 전국적으로 집계가 이뤄지는 수준이며, 강 부근에 사는 농부들은 비버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울타리까지 쳐야 했다. 

수십 년 간 농사를 지어온 농부들은 비버들이 밭의 나무를 쏠아다가 강둑을 막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그런 일이 자주 있다면야 그 이전에 철저히 대비했겠지만, 야행성인데다 강둑에 굴을 파서 사는 비버들이 강둑에서 5미터 이상 떨어진 인가에 나타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

비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숲. 에스토니아에서는 저렇게 비버들에게 쏠려 넘어진 나무들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숲. 에스토니아에서는 저렇게 비버들에게 쏠려 넘어진 나무들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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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동물을 부활시키려 한 것뿐인데...

비버는 몸길이가 100~125센티미터에 이르고 몸무게가 대략 30kg에 육박하는, 에스토니아에 사는 설치류 중 가장 큰 동물이다. 몸무게가 꽤 나가는 강아지 정도 크기라고 보면 된다. 자료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에서는 19세기 말 비버들이 멸종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1957년 생태계 복원 차원에서 인근 벨로루시에서 10마리의 비버를 들여와 숲에 풀어놓고 번식시키기 시작했다.

1978년에는 그 개체수가 250마리 정도에 불과했으나, 1994년에 7천 마리를 넘기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2002년 통계에 따르면 에스토니아 전체에 1만4천여 마리의 비버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비버는 물 흐름이 완만한 지점을 고른 후, 직접 쏠아서 넘어뜨린 나무들과 진흙을 모아서 비교적 튼튼한 둑을 만든다. 비버가 만드는 둑은 강물의 흐름을 완화시켜 습지를 유지시키고 각종 양서류나 수달, 밍크 같은 동물들의 서식지를 만들어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바로 이러한 둑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둑이 경작지에까지 휩쓸려와 농작물에 해를 끼치기도 하고, 강의 흐름을 막아버려 주변 지역을 지나치게 습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급격하게 늘어난 개체... 한겨울에도 홍수 피해

게다가 알칼리성이 강한 강물이 경작지에 범람하면 토양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농부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둑을 허물기까지 하지만, 영특한 비버들은 다음날이면 다시 둑을 쌓아놓는다. 새로운 둑을 쌓기 위해서 멀쩡한 나무를 베어가는 것은 기본이다.

올해 들어 비버들의 피해가 더욱 커진 것은 비버들이 미처 예상 못했던 날씨, 즉 지나치게 따뜻했던 겨울 탓이라는 분석이 많다. 올해는 겨울에도 강이 얼지 않아 비버들의 활동이 끊이지 않았고,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먹을 것도 심각하게 줄어든 상황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비버들이 이전에는 출몰하지 않던 민가에까지 나타나 '약탈(?)'을 해가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비버로 인한 피해 범위는 농가로 한정되지 않는다. 올해 1월에는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 국경 지대 주민들이 비버들이 만든 둑 때문에 한겨울에도 홍수 피해를 봤다. 지난해에는 비버들의 둑 때문에 벨로루시의 한 시골 마을을 흐르는 강이 완전히 막혀버린 일도 있었다. 그래서 강물이 범람해 국도가 물에 잠겼고 그 마을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대피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국경 지대는 비버를 비롯한 야생 동물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그렇지만 요즘 사람들에게 그곳은 천국과 거리가 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국경 지대에서 근무하는 수비대원들은 비버들이 만들어놓은 땅굴 때문에 순찰 도중 갑자기 땅 밑으로 가라앉는 일을 겪었다. 비버가 만든 굴은 대부분 깊이가 사람의 무릎 정도 되기 때문에 심각하게 다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수비대원들은 지뢰처럼 얽혀있는 비버들의 굴을 피해 순찰 경로마저 변경해야 했다.

비버들이 만든 둑. 비버들이 저렇게 쌓아둔 나무들이 강물에 휩쓸려 내려와 민가를 덮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비버들이 만든 둑. 비버들이 저렇게 쌓아둔 나무들이 강물에 휩쓸려 내려와 민가를 덮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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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 사냥 독려하는 에스토니아 정부

이처럼 비버로 인한 피해가 점점 늘자 에스토니아 정부에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비버를 상대로 한 전쟁'까지는 아니지만, 에스토니아 정부는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서 전국적으로 비버 사냥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비버 사냥은 9월에서 이듬해 4월 중순까지 허가되고 비버들이 새끼를 낳는 4월부터 5월까지는 포획이 금지되지만, 올해는 특별히 사냥 기간을 5월까지로 연장한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포획 작전 역시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비버 가죽은 중세에는 발트 무역상들의 주요 거래 품목이었을 만큼 인기 있는 물품이었으나, 최근엔 너무 무겁고 질기다는 이유로 비버 가죽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 사람들이 비버 고기를 즐겨먹는 것도 아니기에 사냥꾼들에게 비버는 입맛 당기는 사냥감이 아니다. 게다가 비버들은 낮에는 거의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사냥하기 어렵고, 비버들이 주로 활동하는 가을에도 사냥꾼들은 사슴처럼 돈이 되는 동물을 사냥하느라 바쁘다.

비버 사냥을 장려하고 있고 농부들로부터 비버 피해 신고가 들어오면 환경청에서 전담 사냥꾼을 보내주기도 하지만, 에스토니아 정부에서 '무차별' 포획까지 독려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와 관련, 비버가 새끼를 낳는 기간에는 가급적 포획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그동안 꾸준히 유지해왔다(그런 면에서 올해는 다소 예외적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버 사냥 장려 정책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몇몇 동물학자들은 현재 비버의 개체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라고 주장하며 가급적 포획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그렇지만 비버 포획을 당장 중지하라는 환경운동가들의 구호는 아직까지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비버들이 둑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학습용 안내판. 숲속 비버들의 둑 옆에 있다.
 비버들이 둑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학습용 안내판. 숲속 비버들의 둑 옆에 있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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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동물의 생태계 복원 문제,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비버를 숲 생태계에 복원하기 위해 방생한 후 수십 년이 지나 다시 포획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에스토니아인들의 경험은 멸종 동물 복원을 계획하는 다른 나라들에도 참고 사례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400년 전 비버가 완전히 멸종한 영국에서는 들고양이, 늑대, 비버 같은 야생 동물을 숲에 풀어놓아 번식시킨다는 계획을 세워둔 상태다. 그러나 1월 28일자 BBC 인터넷판은 현재 에스토니아에서 비버가 양산하고 있는 문제들을 거론하며, 이 사안에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언젠가 포획을 통해 개체수를 조절해야 할지도 모르는 동물종을 다시 들여오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문이다. 옥스퍼드센터에서 동물 윤리를 연구하고 있는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 교수는 BBC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나중에 죽일 수밖에 없는 동물종을 다시 들여오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은 일이다. 어떤 종을 새로이 들여오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 생태계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미 사라진 어떤 동물종을 수백 년이 지난 후 다시 들여오는 것은 그 생태계를 심하게 해친다. 우리가 완벽하게 재건할 수 있는 원시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에스토니아의 비버 문제를 사례로 들며 영국의 인위적 자연 복원 계획을 비판한 BBC 기사.
 에스토니아의 비버 문제를 사례로 들며 영국의 인위적 자연 복원 계획을 비판한 BBC 기사.
ⓒ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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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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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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