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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쯤 일이다. 남편은 며칠 전부터 아들에게 말했다.

"이번 주말에는 시간을 비워라."
"왜요. 무슨 일 있나요?"
"그래. 논에 비료도 주어야 하고 약도 뿌려야 한다. 다리가 아파서 이젠 네가 거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
"네. 아빠."

논에서 해야할 일을 부자지간에 이야기 하고 있다.
▲ 아버지와 아들 논에서 해야할 일을 부자지간에 이야기 하고 있다.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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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이제 농사짓는 게 힘이드나 보다. 논농사는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서 다 했는데 작년에 발을 다쳐 수술한 이후 무리하게 걷는다든가 무거운 것을 들면 발이 아파다더니 이젠 아들에게 일을 거들어 달라고 한다.

힘든 일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아들이다. 남편은 아들이 행여 잊기라도 할까봐 몇 번을 주말에 꼭 시간을 내라고 당부를 했는데 아들은 전날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다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늦게 들어온 아들에게 내일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라고 한다.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일곱 시에 깨워도 일어나기 어려워 하는 아들인데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든 아들을 보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아침 일을 걱정하였다.

논에 들어가기 전 논을 살피고 있다.
 논에 들어가기 전 논을 살피고 있다.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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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반이 되자 남편은 먼저 논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와서 마당에서 아들과 할 일을 준비 중이다. 시간이 되자 마음이 안절부절 견딜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야 잠든 아이를 깨우기도 어렵고 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섯이나 되어서 논에 나가지. 동네 사람들 다들 자는 꼭두새벽부터 일 한다고 그래요?"
"해가 퍼지면 뜨겁고 논에서 일하기 어려워서 그래. 일찌감치 일을 해치우면 편하지 뭘 그래."

나는 아들이 잠을 못 자서 그런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었다.
드디어 다섯 시가 되어서 살그머니 아들 방으로 들어가 아들이 자는 모습을 보려는데….

"엄마. 몇 시예요?"
"응. 다섯 시. 일어나도 괜찮겠니?"
"졸려 죽겠는데 아빠와 약속을 했으니 일어나야죠."

아들은 못 일어날 듯하더니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달라고 한다. 난 아직도 우리 아들이 아이만 같아서 걱정했는데 이젠 아빠를 거들겠다고 선잠을 깨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기만 했다.

일하는 아들과 지켜보는 아버지
 일하는 아들과 지켜보는 아버지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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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들을 논으로 내보내 놓고 아침 준비를 했다. 논에서 일하는 아들이 어떻게 일을 하나 궁금해서 도대체 집에 있을 수가 없다. 남편과 아들이 좋아하는 찐 계란과 음료수를 가지고 논으로 향했다.

아침 햇살이 퍼지는 들판은 아주 예쁜 초록빛이다. 풀잎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영롱하다는 말이 딱 맞다. 동네를 지나 호조벌을 가로 질러 새로 만드는 길을 넘어서니 남편과 아들이 논에서 일하고 있다.

논에서 일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묻고 답하고 있다.
 논에서 일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묻고 답하고 있다.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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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논두렁에서 뭐라하며 아들에게 손짓하고 아들은 아빠에게 무엇을 묻는지 아빠를 향해 손짓한다.

모를 내고 모가 뿌리를 내리면 가지거름을 주는데 요즘은 거름 뿌리는 일을 기계로 한다. 내가 논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아들이 거름 뿌리는 기계로 거름을 다 뿌렸다고 한다. '조금만 일찍 나왔더라면 아들이 멋진 모습으로 거름을 뿌리는 것도 보았을 텐데'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아들은 논 가운데를 성큼성큼 걸으며 약을 뿌리고 있다. 모를 밟지 않으려고 몸을 기우뚱거리지만 그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논에서 일해도 남편은 일반 장화만 신고 일한다. 그런 남편이 며칠 전부터 아들이 논에서 일하면 발을 다칠까봐 아들 장화를 준비하라고 했다.

꼭 긴 물 장화를 사오라고 해서 아들 발에 맞는 물 장화를 사느라고 신발 가게 몇 군데를 갔다. 발 치수가 커서 웬만한 신발가게에는 맞는 장화가 없었다. 그렇게 사온 물 장화를 길게 신고 논에서 일하는 아들을 보니 그동안 긴 장화는 불편하다며 만류하는 남편에게 저렇게 편한 물 장화 하나 준비 안 해준 게 미안하기만 하다.

뒷마무리를 하고 있다.
 뒷마무리를 하고 있다.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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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소독약 봉투를 들려서 논 가운데로 내보내고 거름이 덜 간 곳을 마무리하는 남편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하고 이젠 다 큰 아들을 보면서 대견해 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고 누군가의 힘이 필요해진 것에 마음이 허하리란 생각도 해본다.

젊은날 무료하게 지치도록 저 들판에서 종횡무진 세월을 다 보내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도록 농사밖에 모르고 살면서 남편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농사 짓지 마라."
"열심히 공부해서 힘 안 들이고 편하게 살아라."

자식들에게 농사 대물림 안 하려고 말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참 세월이 빠르게도 지나왔다.

마지막 한 고랑을 남기고 아버지와 아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 한 고랑을 남기고 아버지와 아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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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약 한 봉투를 가지러 나온 아들과 남편이 마주 앉아서 찐 계란과 음료수를 들며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 아침에 찐 계란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어요."
"그래 일찍 들판에서 일했으니 입맛도 날 것이다. 옛날에 농사꾼은 하루 다섯 끼를 먹었는데 일을 하고 나면 금방 소화가 되니 다섯 끼니를 먹어도 부족했다."
"어휴. 아빠. 다섯 끼를 어떻게 먹어요? 요즘 그렇게 먹으면 비만에 걸려요. 하하"

"이 녀석 편한 소리 하는구나. 아침 새벽부터 일하면 여섯 시에 아침 먹고, 열 시에 새참 먹고, 열두 시에 점심 먹고, 세 시에 저녁 새참 먹고 그리고 저녁 먹는데. 그만큼 일하니까 소화도 잘되었던 거야. 요즘 아이들 그렇게 일하라고 하면 아마도 다 손들고 못 할 거다. 참 편한 세상이 되었지."
"아빠. 이젠 할 일 있으면 이번처럼 미리 말씀해 주세요. 시간 나는 대로 도와드릴게요. 논으로 나오면서 다른 논들을 보니 그래도 우리 논의 모가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아빠가 너무 부지런하셔서 그런가 봐요."

"이젠 네가 철이 든 모양이다. 그런 말을 다 하고. 그래 이젠 아빠도 발이 아프니까 걷는 일이 불편해서 네가 좀 도와야겠다."
"네. 아빠."

모처럼 부자지간에 정다운 대화가 아침 햇살 속에서 무르익는다. 아마도 올해 농사는 이렇게 해서 대풍이 들것이라는 예감이다.

논둑에 무리지어 피어서 폴짝 앉고 싶은 토끼풀
 논둑에 무리지어 피어서 폴짝 앉고 싶은 토끼풀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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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논에서 일 마무리를 하고, 남편은 아들이 빠트리고 지나간 곳마다 다시 짚어내며 마무리를 하고, 나는 논두렁 이곳저곳에 버려진 비닐이며, 빈 농약병, 일하다 버리고 간 음료수 병이며, 비료 포대 등을 주워 한쪽에 모았다.

남편은 말려서 태울 건 태워야 한다며 그대로 모아 두라고 한다. 논두렁을 다 돌며 쓰레기를 줍는데 논두렁에 피어 있는 토끼풀들이 싱그럽기만 하다. 아침 햇살을 인 키 작은 토끼풀들은 군데군데 무리지어 그 자리에 폴싹 앉아 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소복이 자라있다.

아침 햇살과 이곳저곳에 피어 있는 야생화와 토끼풀. 그리고 파랗게 자라는 논의 어린 벼들. 아빠와 아들. 그리고 정다운 대화. 부자간의 끈끈한 정. 아침이 정말로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을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을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춰주고 있다.
ⓒ 이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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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고 거름 뿌리는 기계를 지고 집으로 가는 아들에게 아침햇살이 눈부시도록 밝게 비춰주고 있다. 선잠을 깨고 새벽일을 한바탕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아들은 집으로 걸어가면서 아마도 아직 느껴보지 못한 노동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또 다른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건 아닐까? 또한, 신선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고요한 들판에서 자기와 나눈 대화는 어떤 대화였을까?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무쪼록 이 영롱한 햇살 아래서, 이 신선한 아침 공기 속에서, 더 참되고 더 신선한 젊은이로서 포부가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햇살처럼 돋아난다.

덧붙이는 글 | 시흥시민뉴스 (http://www.shpeople.net/)에도 게재합니다.



태그:#논, # 아버지, #아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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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민뉴스에 기사를 20 건 올리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마이 뉴스에도 올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올렸던 기사는 사진과 함께 했던 아이들의 체험학습이야기와 사는 이야기. 문학란에 올리는 시 등입니다. 이런 것 외에도 올해는 농촌의 사계절 변화하는 이야기를 사진을 통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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