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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프라하)
▲ 거리의 악사들 (체코, 프라하)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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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자 어느새 풍경이 바뀌었다. 5일 만에 구 동독 지역의 할레(Halle), 라이프치히(Leipzig), 드레스덴(Dresden)을 지나 체코 국경을 넘은 날이었다. 길가의 낡은 집들과 털털거리며 달려가는 트럭, 그리고 몸을 파는 아가씨들이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점심을 해결할 요량으로 작은 카페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내가 라면 끓일 준비를 하는 사이에 길을 물어보고자 들어선 카페…. 나는 깜짝 놀랐다. 아래 위 속옷만 입고 가슴을 거의 다 드러낸 아가씨가 불쑥 나온 것이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뭘 원하느냐는 손짓을 해보였다. 당황한 나는 두 손까지 내저으며 황급히 돌아서 나왔다. 그 순간 찬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프라하의 봄. 소련의 탱크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유를 위해 저항했던 프라하가 돈 몇 푼에 그 소중한 자유를 팔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슬퍼졌다.

사실 나의 감상은 새삼스러운 것이다. 닫혔던 국경이 처음 열리던 날, 이 국경길을 따라 가장 먼저 찾아든 것이 자본주의의 돈과 경쟁, 그리고 몸을 파는 자유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체코에 들어선 첫날, 싱그러운 오월에 마주한 겨울 풍경은 오늘날 동유럽의 상징처럼 쓸쓸하게 차 꽁무니에 따라 붙고 있었다.

(체코, 리토메리스)
▲ 기품 있는 국경도시 (체코, 리토메리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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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난 국경도시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기로 했다. 리토메리스(Litoměřice)는 작지만 기품을 가진 도시였다. 광장을 둘러선 19세기 건물들은 색이 바래서 더욱 은근한 매력을 내보였고, 작고 꼬부라진 골목길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아치형 문을 지나 들어선 성당에는 옅은 어둠 속에서 오래된 성스러움이 숨쉬고 있었다.

은행에 들러 유로화를 체코 코루나(koruna)로 환전했다. 휘발유를 비롯한 대부분의 물가가 절반이나 뚝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애마는 이미 포식을 한 상태였다. 혹시라도 주유소가 없을까 봐 국경을 넘기 전에 휘발유를 가득 채워 두었던 것이다. 바보처럼 사막이나 아프리카 오지를 여행하는 것도 아닌데…. 국경을 넘나들며 옷을 갈아입고 재주를 부리는 '돈들의 패션쇼'에 여태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마을로 들어설 때 보아두었던 '페니 마켓(Penny Market)'으로 갔다. 물가가 떨어졌으니 생수나 식료품 등속을 좀 사두려던 참이었다. 영업 시간은 6시까지였고 매장 입장은 폐점 20분 전까지만 허락했다. 정확히 20분 전. 우린 후다닥 장을 볼 수 있었다.

(체코, 리토메리스)
▲ 예쁜 교회 (체코, 리토메리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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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곤 주차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개울가를 산책하고 돌아왔다. 30분쯤 지났을까. 그 사이에 마켓 직원들이 다 퇴근하고 그 넓은 주차장에는 우리 차만 남아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벌어진 상황이 꼭 마술 같았다. 저녁 6시에 영업을 끝내는 마켓도 그렇지만, 단 30분 안에 모든 직원이 퇴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국과 일부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은 다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일요일은 문을 열지조차 않았다. 한국의 자정 너머까지 영업하는 마켓, 24시간 편의점, 주말이면 더욱 붐비는 쇼핑센터에 비하자니 참으로 낯선 풍경이었다.

저녁 6시면 문을 닫는 마켓.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겠지. 반면 마켓이나 여러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들은 저녁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겠지. 야간이나 교대근무가 없으니 고용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고.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는 5시에 퇴근할 수 있어야 장을 볼 수 있겠군. 동네 식료품점이 살아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고. 쇼핑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재앙일 수도 있겠지. 대신 그 빈 시간에 무언가를 하게 되겠지…. 또 소비가 상당히 줄어들겠군. 기업들은 싫어하겠지만,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와 대량쓰레기에 지친 '지구별'은 좋아하겠지.

 프라하의 골목길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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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텅 빈 주차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본다.

다음날 아침,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주차장을 빠져나와 608번 도로를 타고 프라하로 향했다. 3시간 만에 도착한 프라하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로 여행자를 압도하며 마음을 들뜨게 했다.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틴 성당의 두 첨탑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묵직하면서도 아련하고 밀도 깊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곳 프라하 광장을 스쳐간 체코 현대사의 부침들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두 첨탑이 저토록 묘한 빛깔이 지녔다 한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라.

그 아래 광장에는 자유와 낭만이 넘쳐흘렀다. 젊은 5인조 악단은 바닥에 둔 캔 맥주를 마셔가며 익살스럽고도 성실한 표정으로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다. 광장을 청소하던 아주머니는 빗질을 잠시 잊고 긴 빗자루에 턱을 괸 채 들으며 섰고, 한 발짝 떨어져서 감상하던 경찰관은 아리따운 아가씨가 내민 손을 거절 못하고 춤을 추고 있다.

(체코, 프라하)
▲ 찰스 다리 위의 성인들. 그리고 인파 (체코,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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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낭만의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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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쪽에는 광장 배수 구멍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낚아 올리는 것은 나무 물고기였다. 그의 기발한 연기에 웃음을 챙긴 사람은 낚싯밥으로 지폐 한 장을 던져주었다. 프라하는 자유와 낭만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국경에서 본 스산했던 겨울 풍경을 잊어 버린다고 한들 문제될 일은 없었다. 프라하는 과연 봄이었다.

3일 만에 프라하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국도를 잡아탔다. 도로는 마을을 관통해 가기가 일쑤였는데, 마을이 원래 생겨먹은 대로 닦았는지 구불구불 마을 광장을 지나쳐가곤 했다. 무엇이든 직선으로 쭉쭉 뻗어야만 좋아하는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온 흔적 그대로 자연이 자라난 모양 그대로 이어지는 길과 마을이 고맙기만 했다.

그렇게 몇 개의 마을을 지나고 텔츠(Telč)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이 예쁜 마을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았지만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언덕 위에 보이는 작은 성당으로 올라갔다.

마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언덕 아래로는 샛노란 유채 꽃밭이 흘러내리고 그 아래로는 그림같이 예쁜 마을이 놓여 있었다. 성당 앞의 잔디밭 한 쪽에는 펌프질하는 우물이 하나 있고 그곳 우물가에서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체코, 텔츠)
▲ 우물 위의 아이들 (체코, 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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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텔츠)
▲ 성당에서의 하룻밤 (체코, 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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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와서 얼음처럼 찬 우물물로 멱을 감고 있자니, "뎅~뎅~" 종루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저녁미사를 위해 모여들었다. 산골학교 교실처럼 자그만 성당에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의 미사. 이토록 신성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또 있을까.

눈 째진 이방인의 갑작스런 출현에 아이들은 기도 시간에도 실눈을 뜨고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내가 두 손을 모아보이며 기도에 열중하라고 짐짓 눈을 부라리자, 아이들은 웃음을 참지 못해 입을 가리고도 킥킥거린다.

미사를 마치고 손짓발짓으로 성당 앞마당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있냐고 허락을 구한다. 어른들은 웃음을 남기고 아이들은 손을 흔들며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우린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폈다. 지상에서 모닥불이 타오르고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워질 것 같아. 오늘밤. 그리고 이 마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야."

불빛이 잦아드는 마을을 굽어보며 아내는 감상에 젖어들었다. 나 역시 체코에서의 마지막 밤에 프라하와는 또 다른 봄을 느끼고 있었다. 프라하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평화롭고 따스한 봄이 이곳 시골마을에도 내려앉아 있었다.

(체코, 텔츠)
▲ 시골마을 성당에서 멱감기 (체코, 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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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양학용 기자는 아내 김향미 님과 함께 2003년에서 2006년까지 3년 동안 배낭 하나씩 둘러매고 세계여행을 했습니다. 그 중 유럽에서는 중고차를 타고 6개월 동안 유럽 19개국을 여행했습니다.
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중고차유럽여행, #체코, #프라하, #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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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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