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에서도 차 한 번 안 굴려봤는데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유럽에서 중고차 여행을 막 시작하려던 당시, 나는 중고차고 신차고 간에 왕초보였다. 시쳇말로 운전면허증에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여행 한 달 전에 부랴부랴 면허증을 만드느라 도로연수를 빼고 나면 실전경험이라곤 전무한 셈이었다. 대한민국 도로에서도 바퀴 한 번 굴려본 적이 없는 놈이 물설고 낯설고 교통표지판까지 설은 이국땅에서 자동차 여행을 하겠다고 나선 꼴이라 하겠다. 

 

반면 아내는 5년 가까이 운전해 온 중견 드라이버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유럽의 자동차는 대부분 수동 기어라는 사실. 그리하여 아내 역시 우리 애마 앞에선 별 수 없이 또 다른 초보 운전자일 뿐이었다. 

 

 

어쩜 이리 교통법규를 철저히 지키지?

 

출발 당일. 둘 중에서 고수인 아내가 먼저 운전대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건널목에서 파란 신호등이 켜지는 순간 '푸르르르' 시동을 꺼먹고 만다. 다시 시동을 건다, 비상등을 켠다, 당황해서 법석을 떠는 사이에 신호등은 어느새 빨간불로 바뀌어 버린다. 이젠 덩달아 잔뜩 찌푸린 하늘까지도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도심을 거의 벗어나려는 순간, 오르막길에서 신호등에 딱 걸려버렸다. 초보에겐 최악의 순간. 뒤로 밀려 뒤차와 부딪치지 않을까, 가슴이 콩닥콩닥, 식은땀은 흐르고 조수석에 앉은 내 다리마저 잔뜩 힘이 들어가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다. 신호를 놓쳤다고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도, 오르막길에서도 차 꽁무니에 바짝 차를 들이대는 운전자도 없다는 것이다. 사실 운전습관만큼 그 사회의 삶의 속도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있을까.

 

지금 돌아보면 독일인 만큼 교통법규에 철저한 사람들도 없었다. 앞 차를 따라 주행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도로 표지판의 제한속도와 일치했다. 그러다 마을로 진입하면 사람이 있건 없건 50km(혹은 30km)로 속도를 뚝 떨어뜨리며 주행했다. 도무지 벌금딱지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뛰는 '차' 위에 나는 '오토바이' 있네!

 

하지만 그들에게도 또 다른 모습이 있다. 합리적인 그들의 운전습관 덕분에 별 탈 없이 5일 만에 할레(Halle), 라이프치히(Leipzig)를 거쳐 드레스덴(Dresden)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어느새 왕초보의 신분을 망각하고 기고만장해 있었다. 객기를 부린 것이다.

 

"이제 아우토반을 달려볼까?"    

 

겁 없이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그런데 이런! 모든 차들이 '슁!' 바람을 가르며 무지막지하게 달렸다. 내 차 운전대가 흔들릴 정도였다.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어서 차선 하나 옮기기도 쉽지 않았다. 신호등 앞이나 지방도로에서는 그토록 얌전하던 독일인들이 돌변해 있었다. 

 

실제 아우토반에서 작은 차들이 밀려나 옆 차선 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종종 일어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속도제한 논의가 늘 있어왔지만 반대 여론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한다. 법과 질서에 철저한 독일인, 그들에게도 아우토반 같은 비상구 하나쯤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가장 우측차선에서 트럭만 졸졸 따르던 나는 불끈 용기를 내고 무한질주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가속기를 질끈 밟았다. 120…130…140…150. 그때였다. 오토바이 두 대가 '슁' 소리를 내며 내 차를 순식간에 추월하더니 저만치 작은 점으로 사라졌다. 내 차의 속도계기판을 확인했다. 시속 150킬로. 그럼, 저 오토바이는? 아찔했다. 

 

그런데 휴게소에서 멈춰 섰을 때, 아내와 난 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좀 전 그 오토바이 폭주족 두 명이 그곳에 서있었는데, 헬멧을 벗은 그들은 다름 아닌 백발의 노인이었던 것이다. "노인연금 여행자가 많다"라고는 들었지만 백발의 폭주족이라니!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다시는 아우토반에 발(바퀴?)을 들여놓지 않았다.

 

 

헨델을 빼고는 생각할 수없는 도시 '할레'

 

이제 여행 첫날밤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겠다. 우린 숱하게 시동을 꺼먹으면서도 무사히 첫 도시 할레에 도착했다. 광장으로 빨간색 트람(tram)이 미끄러지듯 들어와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토해놓고 1세기 전의 고(古) 건축물들 사이로 사라져갔다. 그 자리에 헨델이 홀로 비를 맞고 서있었다.

 

할레는 헨델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다. 그의 동상, 그의 박물관, 그의 페스티발… 온통 그에 관한 것들이다. 아내와 나는 그의 박물관에 들렀다가, 안내 지도를 따라 그의 페스티발 코스를 걸은 다음, 그의 음악 테이프를 하나 사서 조용히 차로 돌아왔다. 도시를 돌아보는 내내 서로 말은 없었다.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어디서 잠을 자지?"

"골목에다 대면 주차위반일 테고, 비싼 돈 내고 주차장에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기세 좋게 텐트까지 싣고 온 중고차 여행자가 여행 첫날부터 호텔로 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독일 도시는 밤에는 주차가 무료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표지판에는 무료주차 시간이 적혀있다). 일단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어둠이 막 도로에 내리는 시간에 휴게소가 나타났다.

 

순간,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

 

무인휴게소였다. 차 열 대 정도를 주차할 만한 공간에 화장실만 덩그러니 있었다. 저녁밥을 지어먹고 씻는 사이에 서너 대의 차들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그리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곧 어둠이 몰려왔다. 그리고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차 뒷좌석에 잠자리를 만들고 준비해 둔 종이커튼을 붙였다. 차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가끔씩 도로를 질주하는 차가 '쏴아아아'하고 파도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스산했다. 쉴 새 없이 '따다당땅' 차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때문에 쉬 잠들 수가 없었다.

 

순간, 발자국 소리가 났다. 빗물에 첨벙거리며 걷는 소리. 다시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 쏴아아아. 따다다땅. 차 지나가는 소리와 빗방울 소리. 각 소리들이 엉켜 그 정체를 구분하지 못해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차 들어오는 소리 들었어?"

"아니, 혹시…귀신?"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지만 아무도 없다. 사실 이런 곳에서 귀신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이다. 아무도 없는 이런 한적한 휴게소에서 강도라도 나타난다면? 휴우, 낮에는 운전 때문에 긴장하고 밤에는 강도 때문에 걱정하고….

 

"우린 왜 이런 여행만을 선택하는 걸까?"

 

그날 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환청과 온갖 상상으로 잠을 설쳤을 뿐.

 

 

마치 동화 속의 아침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파란 하늘에서 아침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들판에는 노란 유채꽃이 바다처럼 출렁이고 키 큰 풍차가 하얗게 솟아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빨간 지붕을 머리에 인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아침 같았다.

 

아침햇살과 간지러운 바람 그리고 빵 한 조각과 커피 한잔. 지난밤의 스산함은 모두 물러나고 부러울 것 없는 아침이었다. 싱그러운 유럽의 5월이 도로 위에 펼쳐졌다. 도로는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부드럽게 오르내리고 유채꽃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아내가 창문을 열었다. 진한 향기가 차 안으로 날아들어 전날 구입한 헨델의 음악에 맞춰 춤추었다.

 

단 하루 만이었다. 아내와 난 자동차 여행이 정말 좋아지기 시작했다. 왕초보면 어떤가. 길 위의 숙소면 또 어떤가. 하늘을 나는 새처럼, 그물코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여행자의 길이 저 앞에 놓여있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양학용 기자는 아내 김향미 님과 함께 2003년에서 2006년까지 3년 동안 배낭 하나씩 둘러매고 세계여행을 했습니다. 그 중 유럽에서는 중고차를 타고 6개월 동안 유럽 19개국을 여행했습니다.  
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wetravelin


태그:#유럽 중고차여행, #자동차여행, #독일, #할레, #드레스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