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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ASIA 평화를 위한 ‘한일 지역 NGO 교류회’는 ‘개항에서 한류까지’ 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 2008 한일교류회 세미나 동ASIA 평화를 위한 ‘한일 지역 NGO 교류회’는 ‘개항에서 한류까지’ 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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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동ASIA 평화를 위한 한․일 지역 NGO 교류회'가 23일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 세마나실에서 '개항에서 한류까지' 학술세미나를 시작으로 26일까지 열린다.

갈등과 협력을 반복해온 한일 간 역사적 사회적 배경 가운데 경기와 교토 양 지역 시민단체는, 시민 차원에서 이해와 협력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는데 기여하려는 목적으로 '한일 지역 NGO 교류회'를 개최하고 있다.

일본교토자유대학 측은 서승(교토자유대 부학장) 단장을 비롯, 히시키 자즈요시(히로시마 슈도대) 교수, 엄창준(교토자유대) 강사 등 17명이 참가했다. 지난 2006년부터 경기시민사회포럼 국제교류회는 일본 교토자유대학교 NGO와 상호방문을 하며 학술 포럼 및 역사 탐방 등을 교류해왔다.

윤조덕 경기시민사회포럼공동대표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양국의 시민단체가 뜻 깊은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한일 이해와 협력을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야스카와 주노스케(나고야 대학교) 명예교수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관'과 정혜선(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선임위원의 '한류를 통해본 한일관계'가 발제됐고, 이희환(인하대 한국학 연구소) 연구원과 가와무라 요시히로(전 <교토신문> 논설위원) 교토자유대 강사가 토론자로 나섰다.

일본의 노골적인 우경화가 아시아 국가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즈음,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된 야스카와 주노스케 교수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멸시관' 발제문을 발췌, 정리 게재한다. <기자 주>

아시아 멸시관-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관

일본 최고가 지폐 일 만 엔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
▲ 일 만 엔 일본 최고가 지폐 일 만 엔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
ⓒ 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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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 최대의 계몽사상가이며 일본 '민족주의' 사상의 위대한 선구자로 평가받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소위 '아시아 멸시관'으로 아시아 침략을 적극적으로 선도한 인물이다.

후쿠자와는 '우리만족의 근대화 과정을 짓밟고 파탄으로 몰아넣은 우리 민족 전체의 적'(백기완 <항일민족론>), 타이완에서는 '가장 증오할 만족의 적'으로 불리고 있다.

야스카와 주노스케 교수는 "일본인들은 가장 가까운 아시아 국가들에게 후쿠자와가 증오와 비판의 눈으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른다"며 "1994년 일본 최고액 지폐 만 엔 권에 후쿠자와가 선정된 이래 2004년 다른 지폐의 인물은 대거 교체됐음에도 후쿠자와만은 면했다"고 지적했다.

요지부동의 최고 계몽사상가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마루야마 마사오(전후 일본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가장 저명한 학자, 사상가)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내 후쿠자와 신화를 신봉하며 있으며 거기에 경배하고 있다.

후쿠자와 평가를 둘러싼 한국인-일본인 사이에 놓여진 역사인식의 거리는 들여다보면 몸이 젖혀질 정도로 깊다. 양국 역사 인식의 심각한 균열의 전형적 사례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후쿠자와 연구를 재검토하여 후쿠자와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이야말로 '전후 민족주의 사상의 재검토'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조작된 일본 전후민주주의 신화

일본인들은 누구나 후쿠자와가 '아시아를 멸시하고 침략을 선도한 인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잘못된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통해, 후쿠자와는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인간평등론·천부인권론을 주장한 인물로 배우기 때문이다. (나고야 대학교의 신입생 92%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 

실은 후쿠자와의 이 구절은 미국독립선언서에서 따온 인용체이며, 후쿠자와 자신은 그런 주장에 동조·동감하지 않는다는 이 중의 의미를 표명했다. ('학문의 권함' 초편에 후쿠자와는 '인민이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는 인용체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하고 '하늘이 사람 위에…' 구절을 전체적 정신의 압축으로 표현해 후쿠자와이즘의 결정판 등을 멍청하게 주장하며 신화를 창출했다. 또 거의 모든 연구자가 마루야마의 학문적 권위와 명성에 엎드림에 따라, 전쟁책임의식이 희박한 전후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이 신화가 부동의 존재로 돼버렸다.

1990년대 이후, 이 신화는 일본의 전쟁책임을 고발하는 아시아 민중의 물음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야만국 조선, 차이니스 걸식 천민"

후쿠자와의 국제관은 약육강식이 당연하다는 인식이다. 1874년 타이완 출병으로 배상금을 획득하게 되자 '원래 전쟁이란 국가의 영욕에 관한 바, 국권에 다라 성쇠를 초래하는 곳'이라며 기뻐했다. 조선의 강화도 사건(강화도조약)에서는 '소(小)야만국' 조선이 "입조하여 아국(일본)의 속국이 된다 해도 아직 이를 기뻐하기엔 이르다"고 설파했다.

후쿠자와가 주장한 유명한 정식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에서 '일신 독립'의 참의미는 '나라를 위해 재산을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조차 버릴지 언정 애석해 할 필요가 없다'는 국권주의 '보국의 대의'이다. 즉, 일본의 침략전쟁에 일본인은 목숨을 서슴없이 내던져야 한다는 후쿠자와의 주장은 많은 일본인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목숨을 잃게 했다.

2001년 2월 3일, 후쿠자와 '사후 백년'을 맞아 아사히의 천성인어(天聲人語), 일본경제신문의 춘추, 적기(赤旗)의 조류 등 일본 대표 언론들은 1면 칼럼에서, '일신 독립하여 일국 독립한다'의 "독립의 기력이 없는 자는 나라생각이 심절치 못하다"를 인용하여 보조를 맞춘 듯 후쿠자와를 미화하는 글을 실었다.

후쿠자와 정식이 '나라를 위해 재산을 잃을 뿐 아니라 목숨조차……'라는 본래의 뜻을 무시해버렸다(야스카와 교수가 저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인식>에서 '후쿠자와 연구사상 최대의 오독이다'라고 지적한 이래 누구도 반론을 하지 않고 있다. 이 저서는 초판 3개월 만에 3500부가 매진되고 야스카와 교수는 게이오 대학 강의에 2번 초빙돼 뉴스로 보도되는 등 반향을 일으켰다. 2004년 중국어판 출판됨).

후쿠자와의 부국강병근대화

초기 계몽기에 '일신 독립'도 달성하겠다던 후쿠자와는 자유민권운동(민중적 기반 위에 서서 일본의 또 다른 근대화를 모색하려했던 운동)과 대면하자 천황제를 선택하여 부동의 보수사상을 확립했다.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을 호기가 도래했다고 환영한 후쿠자와는 자신이 운영한 <시사신보> 지에 "천황이 '직접 원정'과 북경공략까지" 요구하는 결렬한 주전론을 펼쳐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는 <시사신보>에 "사양할 것 없이 그 땅을 취할" 아시아 침력노선을 제시한 후, 이듬해 논설에서는 "조선국 … 미개한 것이라면 이를 권유하고 인도할 것이고 그 인민이 완루하다면 … 무력을 써서라도 그 진보를 도와야한다"고 주장, '문명'으로 유도한다는 명목으로 침략을 합리화했다.  

전후 일본인의 민주주의 인식과 전쟁 무책임주의에 결정적인 사상을 제공한 후쿠자와의 이런 인식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일본이 조선을 다스린 것은 미개한 민족을 '문명'의 세계로 유도한 '은공'이다.' 그리고 이 합리화로 제국주의 논리가 성립된다. 대외강경책과 표리일체의 보수사상을 확립한 언론인 후쿠자와는 조선과 중국에 대해 그야말로 완전한 멸시와 편견, 마이너스 평가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조선은 미개한 백성, 지극히 완우(頑愚), 흉포' '조선인의 무기력, 무정견' '지나 인민의 겁유 비굴이 실로 비길 바 없다' '차이니스, 마치 걸식 천민' 등등.

또 1894년 <타임즈> <월드> 지 등이 전 세계에 보도한 일본군의 뤼순학살사건은 "실로 아무 증거도 없는 오보, 허언이다", 조선 왕궁 점령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왕성에 난입한 것은 소인배들의 "야외유흥, 무익한 살생"으로 시치미를 뗐다. 심지어 명성황후가 살해돼 마땅한 인물이었다는 영문 논고를 미국신문에 게재하려고까지 했다. 

야스카와 주노스케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들어보이며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미화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침략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 세미나 야스카와 주노스케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들어보이며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미화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침략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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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병사 죽음을 유도하는 천황 신사참배 제의

청일전쟁 직후 후쿠가와는 '죽음은 홍모보다 가볍다'는 일본병사의 대정신으로 판단했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영광의 전사사 및 유족들'에게 '전장에서 쓰러짐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느끼게 하기 위해 "대원수 폐하가 몸소 제주(祭主)가 되어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를 할 것"을 건의한다.

일본인들을 전장에 내몰아 목숨을 기꺼이 버리게 한 '대정신'은 후쿠자와가 주장한 것이다. 동시대인들에게 후쿠자와는 '허풍장이 후쿠자와, 거짓말쟁이 유키치'(히노데 신문)이라고 조롱 받았고, 요시오카 고키(전 외무 권소승)에 의해 "후쿠자와의 길(부국강병 근대화 노선)은 구할 길 없는 재앙을 후세에 남길 것이 틀림없다"는 준엄한 비판을 받았다.

오늘날 고이즈미 수상이 아시아 격분을 초래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역사는, 당시 후쿠자와가 군국주의적 정치 이용을 주장, 1개월 뒤에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의 임석"이 실현됐다.     

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침략의 선구자가 명확한 후쿠자와에 대해 왜 일본의 학계가 그 실상을 밝히지 못했을까?

야스카와 교수는 "학문적 방법론으로는, 마루야마를 필두로 <후쿠자와 전집> 가운데 민주화 추진이라는 선의의 의도라는 전제 하에, 자설에 유리한 부분만 인용하는 자의적이고 자국중심주의적 연구가 지배적이었다"지만, "결정적 원인으로는, 목전 민주화 추진에 급급해 패전의 그날까지 지속됐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전쟁책임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방치, 망각해왔기 때문이다"라고 거침없이 비판했다.

"미 보복 전쟁에 일본 동참 옳지 않아"

또 마루야마 마사오는 공산당의 전쟁 책임을 논하면서 정작 자신이 강제 출정 당했던 학도병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적으로 조국의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고 외치며, '제자'를 전쟁터로 내보낸 자신의 전쟁책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마루야마는, 일본에도 이처럼 민주주의의 선구자가 있었다는 식으로, 아시아에 대한 멸시와 편견을 쏟아내고 참략의 선두에 섰던 후쿠자와를 민주화 계몽의 모델이나 챔피언으로 꾸며내게 됐다.    

야스가와 교수는 마지막으로 "전쟁 책임과 전후 보상도 해결하지 못한 채 전쟁 국가의 길을 걷던 일본이, 9·11 사건(야스카와 교수는 9·11 사건을 미국의 음모성 자작극으로 보고 있다)에 대한 미국의 보복 전쟁을 계기로 참전한 사실은 마루야마 마사오 등의 전후 책임과 전후민주주의의 근원적 재검토를 요구하는 사태"라고 단정했다.     


태그:#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우경화 , #일본 계몽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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