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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도 바지락 양식장에서 채취한 바지락
▲ 바지락 선재도 바지락 양식장에서 채취한 바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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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선재도는 바지락이 많이 나는 섬으로 유명했다.
섬 어느 곳을 가든 곳곳에 바지락이 많았다. 바지락이 많은 때에는 바지락을 2종류로 분류해 채취했다. 섬 주민(어촌계원)이 정해진 일정한 중량(어촌계에서 채취해야할 중량을 알려줌)을 채취해 파는 바지락과 집에서 까서 소금에 절여놓았다가 바지락젓으로 숙성해 대량으로 파는 바지락이 있었다.

일정한 중량을 정해놓고 채취하는 바지락 생산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젓바지락 생산은 지금은 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노는 없어지고 모터를 달고 운행을 하고 있는 땜마
▲ 날라리 땜마 지금은 노는 없어지고 모터를 달고 운행을 하고 있는 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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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바지락을 생산할 때는 집집마다 마당과 창고에 채취해온 바지락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쌓여있는 바지락은 집집마다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의 차이였다. 그래서 젓바지락을 채취하는 날이면 가족 모두가 양식장으로 출동해 조금이라도 더 채취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채취한 바지락을 쪽배(선재도에서 날라리 땜마라고 불림-노 젓는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가득 싣고 돌아오거나 소달구지에 싣고 돌아와 온가족이 모여 바지락을 까곤 했다.

섬 마을 아이들은 철들면서부터 바지락과 함께 생활하였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와 부모님을 따라 종태(바지락을 담는 용기)와 호미를 들고 바지락 양식장으로 가서 바지락을 채취했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채취해놓은 바지락을 까곤 했다. 낮에는 아이들끼리 놀기도 하지만 밤에는 친구의 집 골방에 모여 각자 집에서 가져온 바지락을 까면서 놀았다.

장난끼가 발동하면 각자 가져온 바지락으로 홀짝놀이를 해서 한 집에 몰아주고 빈 그릇을 가지고 몰래 집에 돌어왔던 기억도 있다. 갯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지락을 캐다가 친구들끼리 모이면 홀짝놀이는 시작된다. 운 좋으면 한 종태(약 10kg)를 순식간에 얻게 된다. 잃은 친구는 옆에서 열심히 바지락을 캐서 가져온다. 그러다가 동네 어르신들에게 혼이 나고서야 게임은 끝이 나곤했다.

바지락을 까서 먹음직 스런 알맹이만 모아 바지락 젓을 담근다.
▲ 바지락을 까는 모습 바지락을 까서 먹음직 스런 알맹이만 모아 바지락 젓을 담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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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아이들에게 젓바지락은 좋은 추억도 있는 반면에 놀 자유를 빼앗긴 채 집에서 바지락을 까야하는 아픔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바지락 까는 것이 싫었던지... 그러나, 부모님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것은 분명 많은 시간을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바지락을 까야하는 중 노동이었다.

집 앞에 쌓여있는 몇 백 킬로의 바지락을 다 까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다 까 가면 또 채취해 와서 수북하게 쌓이는 바지락에 지치기 마련인데 그래도 그 당시에는 바지락이 가장 중요한 소득원이다보니 고생을 하면서 채취하고 밤을 세워가면서 바지락을 까곤 했다. 그 돈으로 가정을 이끌었으며, 아이들의 학비를 다 보태셨다.

섬 마을의 특성상 중고등학교가 없다보니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인천에 홀로 나와 학업을 계속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친인척이 있는 집은 그나마 인천에 집을 구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덜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인천에 전세집이나 월세 집을 얻어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다.

바지락만 캐서 두 집 살림과 아이들 공부 시키는 것이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인데 그 고생 인내하시면서 고생하신 부모님들이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다 되셨다. 얼굴과 손에는 그 시절의 고생들이 고스란히 주름이 되어 남아있다.

바지락 속 살이 먹음직 스럽네요^^*
▲ 바지락 속살 바지락 속 살이 먹음직 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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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바지락을 담그던 그 시절 내가 사는 동네는 "젓국동네"로 유명했다. 바지락을 숙성시키면 액젓이 나오는데 그 액젓은 다른 액젓과 간장보다도 더 인기가 좋아 인천의 지인들을 통해 주문을 받아 팔기도 했고, 물물거래를 하기도 했다. 물물거래는 대부도 사람들과 많이 했는데. 선재도의 농가는 몇 종 안 되는 작물을 재배했다. 넓은 밭에는 대부분 땅콩이 주류를 이루었다.

지금은 포도도 유명해져 있지만 그 당시 선재도에는 포도농가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액젓을 가지고 대부도로 가서 액젓과 포도 등 각종 작물을 바꾸어 가지고와 먹기도 했다. 냄새나는 젓국 동네였지만 인심 좋고, 살기 넉넉한 동네였다.

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선재대교와 영흥대교라는 거대한 다리로 육지화되어 동네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다에도 변화가 있었고, 사람 사는 동네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처럼 아옹다옹하는 정겨움도 많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에 바지락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태안의 기름유출 사고와 비슷한 사고도 있었고, 한 때는 바지락이 이유 없이 폐사되어 썩는 아픔도 있었다. 그 아픔은 곧 섬 마을 주민들의 아픔이었다. 바지락이 없어지면서 바다에는 어족이 고갈되는 현상이 일어나 바다에만 의존하던 섬 마을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었다.

그때 주민들은 주저하지 않고 바다를 살리기 위한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었다. 그 정성에 바다는 다시 주민들에게 돌아왔다. 예전의 만큼의 풍성한 바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왔다. 모든 섬 마을 주민들이 바다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양식장에서 채취한 바지락을 운반하기 위해 망태에 담아놓고 있다.
▲ 바지락 망태 양식장에서 채취한 바지락을 운반하기 위해 망태에 담아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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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예전에 비해 바지락 생산량이 많이 줄었다. 생산량이 적어지면 그만큼 계원(어촌계에 등록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수입이 줄어든다. 주된 원인은 태안 기름유출 사고와 관련해 사고지역을 포함해 인접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에 대한 잘못된 편견으로 생긴 소비위축과 더불어 전국에서 유통되는 바지락의 60%이상이 수입산 이라는 점에 있다.

수입산이 가격이 싼 이유도 있겠지만 기름유출사고와 관련한 소비위축으로 인해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바지락의 수요와 공급이 감소되다보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바지락의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간 유통업계에서는 수입산을 선호하고 있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도 아침부터 섬마을 주민들은 종태와 호미를 들고 바다로 나간다. 나이 들어 힘에 부쳐서 바지락 채취하는 것이 버겁지만 바지락은 평생을 함께한 동지이자 삶이었고, 희망이었기 때문에 편안한 휴식을 뒤로하고 바다로 나간다. 바다로 향하는 섬마을 사람들의 뒤 모습을 바라보면서 왠지 안쓰러움을 느꼈다.

힘들게 생산하는 바지락은 바지락을 생산하는 주민들에게는 삶이고, 희망이라고 했다. 그 바지락이 수입산에 밀려 푸대접을 받아 그나마 생산되는 바지락의 양마저 위축되지 않기를 바라며, 온 국민이 우리의 바다에서 생산되는 바지락을 애용해 바지락과 함께 살아온 어민들에게 웃음을 찾아 주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지킴이, #바지락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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