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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아끼지 않는 우리들

 

 문득문득 헤아려 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책을 안 아끼거나 덜 아낀다고들 말하는데, 지난날 사람들은 책을 얼마나 아끼면서 살았을까 하고. 요즈음 사람들은 책을 안 읽는다고 하는데, 지난날 사람들은 책을 얼마나 읽으며 살았을까 하고. 요즈음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 지난날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읽어 얻은 앎’을 얼마나 우리 세상에 넉넉하게 펼쳤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자기 혼자만 머리속에 가두어 넣는 지식쪼가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 흐뭇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슬기로 거듭 키우고 가꾼 움직임은 얼마나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글쎄, 지난날은 오늘날보다 나았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요. 또, 오늘날은 앞으로 다가올 날들보다 낫게 흘러간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요. 지난날과 오늘날을 견주는 사람들을 헤아리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앞으로 태어나며 살아갈 뒷사람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를 곱씹어 봅니다. 지난날 모습과 오늘날을 억지로 견주는 일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한편으로, 우리 스스로 뒷사람 삶을 오늘날 우리 삶하고 억지로 견주지는 않겠느냐 하고.

 

 지난날과 앞날을 떠나서 오늘날 모습을 찬찬히 짚어 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책을 얼마나 아끼고 있습니까. 책을 책 그대로 바라보거나 껴안으면서 아끼고 있습니까. 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습니까. 책 하나가 우리 삶에 어떻게 스며든다고 느끼면서 읽고 있습니까. 책은 놀이감입니까. 책은 한갓진 사람이나 읽습니까.

 

바쁘면 안 읽어도 되는 책입니까. 누구 말마따나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책입니까. 돈이 없어서 못 읽는 책입니까. 돈이 많아서 다른 데에서 쓸 데가 많으니 안 읽는 책입니까. 비싸서 못 사는 책입니까, 싸도 안 사는 책입니까. 오래된 줄거리라서 낡았다고 느끼십니까, 오래되었기에 두고두고 읽을 만하다고 느끼는 책입니까.

 

 (2) 헌책방에서 얻는 책

 

 하루 일을 마치고,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찾아갑니다. 책방 아주머니한테 꾸벅 인사를 하고, 골마루를 두리번두리번 살피면서 이 책 저 책 구경해 봅니다. 《존 L.하일브론/정명식,김영식 옮김-막스 플랑크》(민음사,1992)라는 책이 보입니다. 독일 과학자 한 사람 삶을 다룬 책입니다.

 

..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었을 때, 플랑크는 독일의 과학 체제 속에서 두 개의 핵심적인 직책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서기이자 빌헬름 황립학회의 회장으로서―둘 다 국가로부터의 자금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는 새 정권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권 쪽에서도 플랑크로부터 얻을 바가 있었다. 새로운 독일을, 흠없는 인격과 국제적 평판,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는 인종적 혈통을 가진 애국자와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플랑크는 자신이 과학의 이익을 대변하여 절충을 이끌어내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음을 인식하였고, 처음에는 자신의 전략적 행동이, 스스로에게는 아무리 싫더라도, 일부 동료들의 고난을 덜어 주고 그들의 기관들의 중요한 요소들을 보존시킨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  (163쪽)

 

 우리한테도 플랑크 같은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으흠, 글쎄, ‘스스로한테는 싫어도 동료와 후배한테 길을 터 주며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독재부역을 하거나 친일부역을 한 사람이 있었을는지. 글쎄,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데.

 

.. 슈미트-오트나 플랑크 같은 나이든 사람들은 구조 위주의 정책, 즉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플랑크는 아인슈타인에게 이 표현을 썼다―을 가진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과학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그들의 방침으로 삼았다. 그들은 사소한 일들에 대해서는 내놓고 순응하였으며 커다란 불의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반항하지 않았고, 무능한 자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젊은 동료들에게도 같은 노선을 취하도록 설득하려고 애썼다 ..  (164쪽)

 

 작은 일에는 내놓고 따르고, 큰 일에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던 사람들, 이렇게 하면서 한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과학과 교육 곳곳에서 어른으로 내세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우리 둘레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가서 뒷북을 치든 떠드는 어른들, 이런 분들 또한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森田敏隆(사진)-日本國立公園 (2) 關東甲信越/中部》(每日新聞社,1985)라는 큼직한 사진책을 하나 봅니다. 여러 달 앞서, 서울 낙성대에 자리한 헌책방에서 짝잃은 이 사진책들을 여러 권 장만한 적 있습니다. 그때에는 2권이 빠지고 없었는데, 마침 오늘은 딱 이 2권 하나가 보입니다.

 

 짝잃은 책을, ‘잃어버린 짝만 찾는’ 일이란 몹시 드문데, 더구나 다른 책도 아닌 나라밖 책을, 게다가 흔히 나라안으로 들어올 듯하지 않은 큼직한 사진책을, 이렇게 가깝지 않은 두 동네에서 따로따로 만나는군요.

 

 

 《日本國立公園》은 일본 어느 신문사에서 야무지게 펴낸 묶음책입니다. 그저 아름다운 사진만 실은 사진책은 아닙니다. 한 나라 국립공원에 깃든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편, 이 국립공원에 깃든 나무와 목숨붙이가 무엇인가를 그림과 이야기로 함께 일러 줍니다. 왜 국립공원으로 지키며 가꿀 만한지, 이곳에서 우리들이 맛보거나 느낄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문득, 우리 나라 국립공원을 놓고서, 이렇게 야무지며 튼튼하고 알뜰하게 엮어낸 책이 있었던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있었나? 국립공원을 다룬 사진책이 한두 번쯤 나온 듯하기는 하지만, 국립공원을 하나하나 따로 떼어놓고 다룬 사진책은 없었다고 느끼는데. 그러고 보니, 사진책이 아닌 글책으로는? 그림책으로는?

 

 우리 나라 출판사들은 이러한 묶음책은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나라 정부는 이와 같은 묶음책은 출판사가 알아서 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3) 헌책방에서 얻는 삶

 

 책 두 권을 고르고 책값을 셈합니다. 책값을 셈하는 자리에서,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이런 말씀 저런 이야기 들려줍니다.

 

 “〈삼우서적〉 아저씨는 책을 예우하면서 가져가셨지. 나까마한테 책을 가져가는 데도, 소매 값 비슷하게 쳐서 가져가셨거든.”

 “지금 우리들은 성과를 말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사람들 생각을 바꾸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도시를 지키는 숲인데, 다 도시에서 겨우겨우 견디면서 가는 것 같애.”

 “몸으로 느껴지는 사람 사는 맛이 있어야지.”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이 내가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잖아.”

 “책방이 삼백육십오 일 열 필요가 없어요. 책방이 하루 내내 열 필요가 없어요. 책방이 커야 하지 않아요.”

 “늘 먹어야 하는 밥을 파는 곳이 있고, 어쩌다 한 번 사먹는 밥을 파는 곳이 있어요.”

 

 아주머니 이야기는 끊이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우리들 가슴에 한 마디라도 남아 주었으면,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당신이 책방 살림 꾸리면서 보고 듣고 겪고 헤아린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바쁘고 힘든 틈틈이 다문 한두 쪽이라도 읽으면서 가슴에 새긴 이야기를 내어놓습니다.

 

 “다들 기록하고 또 기록하고 사는데,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나, 기록을 안 하며 사는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일본 국립공원을 다룬 일본 사진책을 생각하게 되고, 우리네 책마을을 생각하게 됩니다. 참말로 우리들이 적바림해 놓고 있는 우리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참으로 우리들이 새기어 놓고 뒷사람한테 남겨 주려고 하는 우리 발자취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그 많은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과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 놓고 있지요? 우리들은 그 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우리가 살아온 어떤 이야기를 그려 놓고 있지요?

 

 저마다 자기가 살아가는 대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일자리를 얻어서 돈을 벌고 살림을 꾸린다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누는 삶보다는 자기 혼자 움켜쥐고 싶어하기에, 자기도 움켜쥐며 살고 아이한테도 더 많이 움켜쥐라고 가르친다고 느낍니다. 더 사랑하는 삶보다는 미움을 받더라도 돈과 이름과 힘을 얻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에, 자기도 사랑이 아닌 미움받는 길을 걷고, 제 딸아들한테도 미움받는 삶을 걷도록 다그친다고 느낍니다.

 

그릇된 일에는 불같이 일어나고 올바른 일에는 환하게 웃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아니 이렇게 움직였다가는 자기한테 불똥이 튈까 싶어서, 언제나 팔짱을 끼고 살아가는 우리네 매무새를 우리네 아이들한테 고스란히 물려준다고 느낍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좋은 책’이 좀처럼 나오기 힘듭니다. 나와도 읽히거나 팔리기 어렵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인천 창영동 〈아벨서점〉 / 032) 766-9523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태그:#헌책방, #아벨서점, #인천, #배다리,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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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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