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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까지 피어있는 선운사 동백꽃의 색이 붉디 붉다.
▲ 선운사 동백꽃 늦은 봄까지 피어있는 선운사 동백꽃의 색이 붉디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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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쯤 1톤 트럭을 끌고 책배달 일을 하러 다닌 적이 있다. 새벽 같이 길을 나서 진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진주로 그렇게 하루 종일 뛴 거리가 1000㎞가 넘을 때도 있었다.

짐칸에 가득 실은 책들의 무게가 상당해 트럭 꽁무니를 당기는 듯 속도가 나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꽁무니를 따라오다 인상쓰며 추월하는 운전자가 많았다. 차창 너머로 그들에게 미안하다 멋쩍은 웃음을 지어야 하는 고달픔은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아야 하는 피곤함보다 더 컸다.

그 때만 해도 "이 놈의 운전대 내가 다시 잡나봐라" 다짐을 하곤 했는데 가만히 사무실에 처박혀 있으면 책 배달을 하더라도 길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 것도, 세월이 치료하지 못하는 마음의 병은 없다는 것도 맞는 말인 듯 싶다. 떠나고 싶을 땐 떠나야 한다. 묵은 병이 되기 전에 말이다.

선운사는 창건된 지 1500년이 넘은 고찰이다. 사진에 보이는 대웅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 선운사 대웅전 선운사는 창건된 지 1500년이 넘은 고찰이다. 사진에 보이는 대웅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돼 있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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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어디 길을 나설 때 기름값부터 셈하고 걱정해야 하지만 봄이 가기 전에 선운사 동백꽃이랑 청보리밭은 꼭 한번 보라는 후배의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

꽤 이곳저곳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전북 고창은 귀에만 익었을 뿐 한번도 밟아본 적이 없는 고장이었다. 선운사 동백꽃은 언제 한 번 보러가야겠다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잘 됐다. "매번 좋은 곳은 혼자만 간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아내와 함께 가자 마음을 먹었다.

진주에서 남해고속도로만 계속 따라가면 고창이 나온다는 사실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노동절 다음날인 5월 2일, 고속도로 주변으론 벌써 초여름 풍경. 차창 밖으로 내려쬐는 햇빛도 포근한 봄볕이 아닌 초여름 뙤약볕이었다. 이런 날씨에 휴게소에서 커피를 뽑아 컵 홀더에 꽂아두고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한산한 고속도로를 느긋하게 달리는 기분이 어떨지는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사천왕상 아래 깔려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인간을 표현한 목조상(왼쪽).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고 있는 듯한 광목천왕의 표정이 강렬하다.
 사천왕상 아래 깔려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인간을 표현한 목조상(왼쪽).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고 있는 듯한 광목천왕의 표정이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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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가는 길엔 벌써 초여름이 온 듯 녹음이 짙어지고 있다.(왼쪽) 선운사 담벼락에서 만난 다람쥐.
 선운사 가는 길엔 벌써 초여름이 온 듯 녹음이 짙어지고 있다.(왼쪽) 선운사 담벼락에서 만난 다람쥐.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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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대로 좋구나, 선운사 붉은 동백꽃

말로만 듣던 선운사 동백꽃을 마주하니 정말 흐드러지게 핀 한창 때 오면 얼마나 좋을까 무릎을 쳤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붉은 동백꽃이 빛 발하는 산사의 아름다운 밤은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다. 보지도 않고 미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지만 척 보면 멋진 그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좋다 좋다 귀로 들어도 막상 가서 눈으로 보면 마음에 차지 않는 명소들이 많은가. 하지만 선운사의 아름다움은 예사 귀로만 듣고 흘릴 헛말이 아니다.

지금은 동백꽃 지고 녹음만 짙어져 있을 것이다. 동백꽃 대신 부처님 오신 날 매단 연등이 대신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을지 모르겠다. 선운사 만세루에는 방문객들을 위해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다기가 준비돼 있다. 만세루 마루에 앉아 대웅전과 동백숲을 감상하는 재미 또한 선운사만의 매력이다. 선운산의 맑은 공기를 폐로 들이마시며 맑은 녹차 한 잔 입에 머금고 먼 산 바라보기 만한 신선놀음이 어디 있으랴.

떨어진 동백꽃도 곱다.(왼쪽) 시원한 만세루에 앉아 차 한잔 즐길 수 있는 것도 선운사만의 매력이다.
▲ 동백꽃과 만세루 떨어진 동백꽃도 곱다.(왼쪽) 시원한 만세루에 앉아 차 한잔 즐길 수 있는 것도 선운사만의 매력이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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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을 피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만세루 처마 아래 앉아 있으니 아내가 이제 일어서자며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먼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니 애가 타는 모양이다. 꼭 청보리밭 사진은 담아 가야한다 하니 더 재촉이다. 딱 눌러 붙여두었으면 했던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신발끈 묶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최영미, <선운사에서> 일부

떠나긴 쉬워도 다시 시간 내어 선운사를 찾긴 여간해선 힘들 것이다. 한참 잊고 있다 동백꽃 한창일 때, 꽃무릇 한창일 때 불쑥불쑥 선운사에 가고픈 마음이 들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 속에 담아왔으니 언젠가는 또다시 찾을 날이 있겠지.

이렇게 넓은 청보리밭을 볼 수 있는 곳은 전국에서 고창이 거의 유일하다. 관광객을 태운 꽃마차가 마을길을 돌고 있다.
▲ 고창 청보리밭 이렇게 넓은 청보리밭을 볼 수 있는 곳은 전국에서 고창이 거의 유일하다. 관광객을 태운 꽃마차가 마을길을 돌고 있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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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아~ 보리 이삭 떨어진다"

선운사 다음으로 찾았던 고창 청보리밭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바람이 일면 보리가 누웠다 일어나며 푸른 들판에 물결이 일었다. 손을 내밀고 보리밭 샛길을 걸으니 까끌까끌한 보리 이삭이 손바닥을 간질인다. 보이는 것은 모두 초록이라 눈까지 편안해진다.

고창에 가면 청보리밭도 빼놓지 말고 봐야 한다. 어디 요즘 보리밭 구경 한 번 하기 쉬운가. 어린 시절만 해도 고향에서 보리를 많이 키웠는데 요즘은 이런 관광지에 와야만 볼 수 있으니 아쉽다. 심어봐야 수매가 줄어들어 돈이 되지 않으니 농민들이 재배를 포기한 탓에 고창처럼 보리밭을 볼 수 있는 곳은 전국에 손꼽을 정도다. 그렇게 포기해야하는 작물들이 늘어갈수록 농촌도 힘을 잃어간다. 생산성과 이익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농민들이 기댈 곳이 어디 있으랴.

손을 뻗으면 보리이삭이 손바닥을 간질인다. 이런 느낌 참 오랜만이다.
 손을 뻗으면 보리이삭이 손바닥을 간질인다. 이런 느낌 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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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다닐 적 보리밭 논둑길로 등하교를 할 때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하면 들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이 "이 놈들아~ 보리 이삭 떨어진다"하고 야단을 치시곤 했다.

지금이야 관광지의 상품이지만 어르신 세대에겐 이삭 팬 보리는 보릿고개 넘길 생명이었다. 보리피리 한번 불어볼 요량으로 보릿대 뽑았다 들키는 날엔 눈물 쏙 뺄 각오를 해야만 했다. 보리를 수확하고 난 다음에는 비단쟁이(식중독 등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인다, '가래'라고도 한다)를 캐서 용돈벌이를 했다.

모두 추억 속에 묻혀버린 이야기다. 고향에 가봐야 호통치던 그 어르신들 떠나신 지 오래고 이젠 사람 냄새조차 나지 않는 폐가가 된 빈 집들만 늘어나고 있다. 5월의 고향 마을 들판이 고창의 청보리밭 같았으면 여기까지 길 떠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 좋은 곳에 와서 마음이 비딱해지는 심보란 무엇인가. 가만히 청보리밭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으니 보리밭 이쪽저쪽에서 꺄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흩어진다. 그래 언젠가 고향 돌아가면 보리를 심을 일이다.

청보리밭 축제장 간이음식점에서 사먹은 꽁보리 비빔밥. 한참 돌아다니다 배고파 먹는 음식은 무엇이나 맛있다.
 청보리밭 축제장 간이음식점에서 사먹은 꽁보리 비빔밥. 한참 돌아다니다 배고파 먹는 음식은 무엇이나 맛있다.
ⓒ 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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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를 타고 가다 고창IC로 빠져 무장면 방면(고창시가지 반대 방향)으로 가면 된다. 호남고속도로 정읍I.C에서 고창방면 22번 국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흥덕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고창에 도착해 795번 지방도로를 따라 무장을 거쳐 공음쪽으로 4Km 정도 가면 좌측으로 군도 4호선인 선동 방면의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한적한 시골길을 드라이브 할 수 있어 여유 있으면 이 길을 따라가는 것도 추천. 도로에 청보리밭 가는 길 이정표가 계속 보이니 길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창행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평균 50분 간격) 고창 고속터미널에 도착하면 무장행 지방버스로 환승(평균 20분 간격)해야 한다. 무장에서 군내버스(공음 방면)를 이용하여 선산에서 하차(행사장까지 약 10분 소요)하거나 무장에서 택시 이용(거리 6 Km 요금 약 7,000원)하는 것이 편하다.

자세한 내용은 청보리움 홈페이지(http://chungbori.gochang.go.kr)를 참고하면 된다.



태그:#고창 선운사, #고창 청보리밭,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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