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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월 어느 날. 경기도 수원 아주대학교 앞 한 건널목에서 나는 죽음 냄새를 경험한 적이 있다. 빨간색 신호등이 건너지 말라는 신호를 끝내고, 초록색으로 바뀌면서 건너가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른 때는 그냥 걸었지만 그 날은 나도 모르게 옆으로 눈을 돌렸다. 저 멀리서 택시 하나가 달려왔다. 떨어졌던 발을 되돌렸다.

 

하지만 옆에 있던 한 남자는 그냥 걸어갔다. 죽음에게로. 죽음이 0.01초 사이에 갈렸다. 그 이후 나는 초록색 신호등이 들어와도 결코 제일 먼저 건너는 법이 없다. 0.01초가 죽음을 갈랐다. 아직도 그 남자가 부르짖었던 소리가 귀에 선 하다. “야 이 새끼야!” 과연 그 외침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 택시 기사, 아니면 ‘죽음’에게. 아스팔트는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 죽음이 남긴 핏자국은 죽음냄새를 더욱 짖게 했다.

 

2008년 3월 28일 1년 7개월 만에 처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아흔아홉 살(白壽)’을 사셨다. 아니 일백한 살을 사셨다. 죽음이 그 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의식 없는 멍한 눈빛은 이미 죽음을 풍기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처 할머니 죽음을 알리는 부고(訃告)가 왔다. 일백한 살을 살든, 한 살을 살든 길고 짧음이라는 차이뿐 죽음은 항상 그 자신에 앞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명’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과 평생을 싸운다. 죽음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드리워진 장애다.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존재. 죽음 앞에 ‘무기력,’ ‘무능력,’ ‘비굴.’ ‘담대함,’ ‘태연함’은 교차한다. 죽음과 끊임없는 싸움을 하면서 서서히 인간 모두는 죽음 앞에 자신을 놓아주게 된다.

 

이 죽음과 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가 있으니 ‘모리’다. 그는 ‘죽음’이다. 어느 날 무엇인가를 가진 존재, 권력과 금력, 학력, 환경에서 죽음과는 관계없던 방송국 성 감독은 시청률 때문에 고민하는 중 ‘모리’를 섬뜩함, 소름만 경험되어지는 살아있는 죽음, 곧 모리를 만난다.

 

<죽음대역배우 모리>는 인간에게 죽음과 가장 밀접하지만 죽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만나게 해주는, 죽음 그 자체를 보여준다. 죽음과 싸우지 않고 죽음 그 자체인 모리를 통하여.

 
그 놈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태어나면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이름’이 없다. 성 감독은 사람이라면 있어야 할 따뜻함과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섬뜩함과 소름만 느껴지는 존재, 그냥 그 자리에 있는 냄새나는, 구역질나는 더러운 냄새보다 더 역한 죽음냄새 풍기는, 이름 없는 그에게 ‘모리’ 곧 ‘죽음’이라고 불러준다.

 

죽음을 만난 경리, 간호사, 해미. 그들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면서도 왜 동지애가 아니라 섬뜩함과 소름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놓고 만다. 생명으로 태어났지만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이들이 죽음을 만나자 섬뜩하여, 역겨워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가혹하리만큼 섬뜩함 때문에 결국 생명을 놓았다. 나 자신이 죽음과 만났을 때도 달리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종필과 진수, 연주는 죽음이 자신 앞에 있지만 역겨움을 느끼지만 조금 다르다. 성공과 자본을 위하여, 연민과 따뜻함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죽음 그 자체를 연기 해 달라고 한다. 모리는 그냥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죽음이 죽음을 보여주는 행위는 쉽다. 아무리 탁월한 연기자라 할지라도 죽음은 연기일 뿐 그 자체가 아니다. 꾸며진 상황에서 나오는 죽음이라는 연기는 사람에게 큰 감흥을 줄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이 죽음을 보여주는 행위는 섬뜩함, 음습함, 소름 그대로다. 전 사회는 이 죽음 앞에 온갖 것을 다 동원하여 논쟁하였다.

 

“이 세상에서 오직 모리 너 한 사람만이 완벽한 죽음을 생산할 수 있어. 죽음 그 자체를 온몸으로 재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뿐이야. 숨도 쉬지 않고 체온도 죽은 사람처럼 낮고. 사람들은 카메라 앞으로 바짝 당긴 진짜 죽음을 보게 될 거야. 멀리서 대강 보여주는 가짜 죽음이 아니라 클로즈업된 죽음. 하긴 드라마를 통해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거야. 너의 존재에 대해서 말야.”

 

이 강력한 요구는 어쩌면 돈 때문에, 성공 때문에 요구되는 인간 깊숙이 묻혀 있는 돈에 노예가 되어버린 근성이 폭발한 것인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직접 경험할 것이지만 죽음을 연기해달라는 이 요구는 이미 죽음보다는 돈에 자신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것을 요구하는 이들의 결과가 어떨지 암시하고 있다.

 

“구더기가 들끓는 것처럼 더러웠고 인육을 삼킬 듯 잔인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것처럼 포악했다. 또한 악의 근원이 현현한 듯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모리에게서 풍기던 어둠의 냄새, 죽음의 냄새는 무겁게 내려앉은 먹구름으로 바뀌었고 배어나던 슬픔은 예리한 칼날의 광기로 변했다.”

 

읽는 이들은 점점 죽음으로 인도된다. 모리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을 보여주는 것 일뿐이다. 어둠의 냄새, 광기 같은 슬픔. 과연 죽음 앞에 놓인 독자는 어떤 마음일까? 단어 하나하나를 읽어가면서 모리와 만나는 독자는 어떤 느낌일까?

 

그에게 죽음 냄새가 아니라 연민 어쩌면 사람냄새를 맡은 연주는 <죽음대역배우 모리>에서 독특한 캐릭터다. 스스로 죽음이라는 길목에 들어선 경험 때문이었을까? 죽음에게 연주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으로 접근하여 인간이 가진 생명을 향한 갈망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왠지 이는 낯설다. 죽음에게는. 

 

그리움, 기다람, 애절함, 기쁨, 행복, 괴로움, 외로움은 사랑이 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사랑. 연주를 향한 사랑, 연주를 껴안고 싶은 욕망. 모리는 인류가 지닌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라잡고 있던 공동체적 감성을 자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 공포! 연민! 이 모든 것! 아니면 악마적 기질. 모리는 섬뜩한 죽음을 나타내어야 했다.

 

공포와 연민으로 얼룩진 죽음을, 그런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0.01초라는 찰나 같은 시간을 통하여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포를 스스로 경험한다. 1995년 1월 어느 날 나에게 자리 잡은 그 죽음처럼 말이다.

 

사마디 앙트가 ‘죽음’을 만난 공포와 섬뜩함에서 온 몸으로 뿜어내는 그의 강렬한 죽음을  깨달음과 영감으로 바뀐다. 연주와 함께 죽음은 죽음을 연기하면서 사마디 앙트와 핸리를 통하여 죽음을 단순히 공포와 두려움, 섬뜩함이 아니라 깨달음과 영감을 부여해주는 ‘삶과 죽음’을 만들어가는 장면은 독자들에게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연주는 모리에게 가슴과 목을 내어준다. 연주 목을 뜯어먹지 않을까? 이는 이미 인간이 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살점을 깨물어서 피가 흐를 때보다 더 섬뜩하고 위태로운 장면이었다. 모두는 말리고 싶어 했다. 연주 뒤에 선 모리는 이미 죽음 그 자체였고, 죽음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죽음과 입맞춤, 슬픔이 밀려오는 상황 연출. 사실 죽음은 삶을 알게 한다. 죽음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 인생은 연기라고 했던가.

 

핸리 교수는 말한다. ‘삶과 죽음’을 다 만든 후에

 

“죽음이 없다면 누가 삶을 극진히 사랑하고, 누가 연인을 아끼며, 누가 그토록 애써 땀을흘리며 누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밤을 지새우며, 누가 그토록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누가 그토록 세월을 아쉬워하고 누가 그토록 실패를 두려워하겠는가? 어떤 사람들에겐 죽음이 독이 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겐 죽음은 삶에서 도망치려는 길목뿐이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겐 최선의 선택이기도 하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죽음을 무시하거나 잊어서도 안 되며 죽음을 피할 이유도 없고 죽음을 기다릴 필요는 더더욱 없다.”

 

아흔아홉 살을 사신 처 할머니가 한 줌 재가 되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문득 든 생각은 ‘허무’였다. 정말 한 줌 재였다. 그 재로 남기 위해서 우리는 아웅 거리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산다. 하지만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삶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죽음대역배우 모리>는 우리에게 죽음, 곧 흙으로 돌아가는 우리 자신을 반추하게 한다. 1995년 1월 수원 아주대학 앞에서 나에게 들려왔던 “이 새끼야!” 역시 죽음을 외면하지 말고, 진지한 삶을 살아야 함을 경고한 소리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한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다. 죽음은 섞은 냄새가 아니다. 죽음은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삶의 가르침이다. 죽음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고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 삶 되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원인임을 <죽음대역배우 모리>는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  <죽음대역배우모리> 이세벽 저 | GOODBOOK(굿북) | 2008년 04월 ㅣ 9,000원
 


모리 - 지구상에 단 한 명뿐인 죽음대역배우

이세벽 지음, 굿북(GoodBook)(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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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죽음, #대역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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