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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기상대에서 바라본 사항포구
▲ 사항포구 백령도 기상대에서 바라본 사항포구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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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첫 날에, 우리는 백령도 여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악명 높은 안개가 전날에도 여객선 발을 꽁꽁 묶어 놓았다는 소식. 떠날 수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암튼 꼭두새벽부터 서둘러 인천 연안부두로 갔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6시 15분. 7시 10분 배인데 역시나 안개 땜에 대기상태였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배가 못 떠나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릴 참으로. 8시면 결정이 난다기에 기다렸더니 꿩구워 먹은 소식. 멀뚱멀뚱 스피커만 쳐다보고 있기도 싫증 날 즈음 9시까지 대기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참 징하다. 여객선 터미널은 안개가 걷히기를 아니, 안내 방송이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인파로 초만원, 앉을 자리도 없다.

8시 45분 드디어 기다리던 출항 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9시 10분 출항. 안개 속을 더듬어 더듬어 먼 바다로 나가던 배, 기우뚱 철컥 파도에 밀려 출렁거리며 물살을 헤쳐나간다. 울렁거리는 여객선에 울렁거리는 머리와 뱃속. 다행히 우리는 심하지 않았지만 냄새며 소리는 배 안에 요상하게 퍼져 있었다.

4시간 반이면 닿는다는 섬은 가도가도 보이질 않고, 다섯 시간을 바다에 떠 있었는데도 1시간 이상을 더 가야 한단다. 6시간 반 만에 도착한 섬에서는 안개가 또 뿌옇게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바닷물에 절어 짠지가 된 얼굴로 배에서 나오고. 이를 어째! 사진 찍으려고 왔는데. 내 옆사람은 투덜투덜, '그러니깐 남해안으로 가쟀잖아', 어쩌구 하면서 심통이 난 표정이 역력하다.

우린 자유여행이 아닌 패키지 여행. 어른까지 모시고 왔다. 날씨는 또 왜 그리 추운지. 어른은 차 안에서 나오실 생각을 못하신다. 안개 때문에 유람선은 운행을 못한다 하고 몇 군데 버스 여행을 하기로 했다. 심청각과 콩돌해안 그리고 두무진이다.

작은 돌들이 빛나던 해안
▲ 콩돌해안 작은 돌들이 빛나던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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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딜가도 안개에서 자유롭지 못한 눈. 시야는 50m도 채 확보하지 못하는 상태. 두무진포구에서 기암괴석을 둘러보고 앉은 김에 자연산 회로 자유롭게 저녁을 먹었다. 자연산인데도 비싸지 않았고 '이게 진짜 자연산이냐 아니냐'로 따질 일도 없는 청정지역의 놀래미와 우럭. 정말 값에 비해 푸짐한 저녁이었다.

다음날 바다 사정은 또 대기. 안개 속에서 천연동굴해안을 보고 사곶 천연비행장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유람선은 운항을 한다고 해 다시 두무진 항으로 갔다. 사곶해변에 뽀얗던 안개는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두무진 바다는 그야말로 독야청청이다.

두무진 바다의 기암괴석은 우리나라 어떤 명승지와 견주어도 탁월, 대체 어떤 손이 저런 비경을 만들었을까! 모두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선장님의 서툰 말솜씨도 이런 기암괴석 앞에서는 흠이 되지 않을 정도. 그런데 11시 되기 전 여객선이 다시 통제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 머나먼 섬에 우리는 모두 발이 묶인 것이다.

다른 비경이 와서 본다면 울고 갈만큼 웅장한 두무진의 기암괴석
▲ 두무진의 기암괴석 다른 비경이 와서 본다면 울고 갈만큼 웅장한 두무진의 기암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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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백령도에서 20분이면 닿는 대청도로 갈 예정이었으나 안개는 이 짧은 거리도 허락질 않으니 꼼짝없이 갇혔고, 다른 팀들은 오늘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안개가 그대로 주저앉혔다. 점심을 먹고 삼형제 바위와 감람암분포지를 보고나니 일정은 끝. 시간만 남았다. 마침 숙소 가는 길에 본 도서관엘 가 보기로 했다.

읍내를 한 바퀴 돌아 낯선 풍경을 눈에 익히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니 분위기는 썰렁. 몇몇 학생들만 모여 앉아 좌담을 겸한 공부를 하고 있다. 자치센터 겸 도서관이라 그런지 신문도 잡지도 없다. 한 사람은 춥고 피곤하다며 가 버리고 나 혼자 앉아 끝까지(6시) 책을 봤다. 간혹 오가는 사람만 있을 뿐 도서관조차 고립무원이다. 도서관 시설 때문인지 모두 바빠서인지 도서관은 또 다른 섬을 연상시킬 만큼 외롭고 고독해 보였다.

기상이변으로 찾게 된 두 곳. 오지의 도서관이 더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 백령도 도서관과 성당 기상이변으로 찾게 된 두 곳. 오지의 도서관이 더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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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위 골목으로 백령성당 이정표가 있다. 내 발길은 어느새 그리로 향해고, 섬이나 산간 지방을 여행하면서 은근히 기상재해를 기대했던 나를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문도에 갔을 때도 이틀이나 발이 묶였었고, 추자도에 갔을 때 역시 이틀이나 묶여 있었지만 조금도 불안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고 남은 시간을 잘 즐겼다, 혼자서.

거문도에서는 삼지사방 맑은 바다를 즐기며 찾아다녔고, 추자도에서는 섬내 버스를 타고 다리로 연결된 두 섬을 오가는 여유를 부렸고 남은 시간은 갯바위 낚시 구경을 하면서 지냈다. 명승지만 찾다가 돌아오는 여행보다 시간을 갖고 섬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는 여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는 까닭이다.

성당은 언덕배기 고즈넉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천주교 박해 때 선교사들이 육로로 이동하기 위험해지자 중국에서 해로를 선택해 들어오면서 백령도가 중간 경유지가 되었다 한다. 그 시절 백령도에서 육지로 나가려면 12시간 이상이 걸렸다는데, 종교란 참 목숨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닌 것 같다. 과연 작지만 유서 깊은 성당다웠다. 주변 정원도 손질이 잘 되어 있었고. 제일 앞자리로 나아가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전화가 왔다. 저녁 먹을 시간이라며.

다음 날 아침, 바다는 여전히 대기상태. 그리고 8시 40분 통제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우리는 과감하게 차를 빌리기로 했다. 내 길동무의 불만은 패키지에 있었다.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못가고, 내리고 싶은 데 마음대로 내릴 수 없는 단체 관광의 단점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전국을 헤짚고 다니는 게 내 꿈인데 패키지가 어찌 마음에 차겠는가.

기상대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바다풍경이 아름다웠다
▲ 기상대 기상대 올라가는 길에서 내려다 본 바다풍경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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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빌린 낡은 아반테는 한 나절에 4만원이고, 기름값은 2만원 정도. 그러나 다시 오기 힘든 곳이니 그렇게라도 해서 섬을 샅샅이 뒤져 보기로 했다. 내가 제일 가고 싶었던 곳은 기상대. 그 다음 단체 여행에서 제일 내리고 싶었던 곳은 바로 염전. 그 다음은 작은 포구들을 하나하나 순례하고 싶었다.

기상이변은 여행의 또다른 묘미를 제공해준다. 위 왼쪽은 연하리 해안가에서 미역을 줍는 할머니의 행복한 미소. 그 아래는 갓 잡아 올린 까나리. 나머지는 까나리를 끓는 물에 데쳐 말리는 모습
▲ 백령도의 일상 기상이변은 여행의 또다른 묘미를 제공해준다. 위 왼쪽은 연하리 해안가에서 미역을 줍는 할머니의 행복한 미소. 그 아래는 갓 잡아 올린 까나리. 나머지는 까나리를 끓는 물에 데쳐 말리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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얏호! 우리는 달렸다. 기상대 올라가는 길에 멈춰서 저 멀리 멋지게 보이는 사항포구를 바라보았고 기상대도 보고 두무진에도 다시 가 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쪽은 화창한 초여름날씨. 내친김에 연화리 바닷가로 해서 화동염전을 지나 사곶으로 향했다.

안개에 싸여 사뭇 몽환적 분위기를 풍기던 작은 포구
▲ 중화동포구 안개에 싸여 사뭇 몽환적 분위기를 풍기던 작은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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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의 일상 속 풍경...
▲ 까나리 액젓과 화동염전 백령도의 일상 속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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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화창하던 날씨는 사라지고 서서히 안개가 꼭 풀어놓은 햇솜처럼 우리 시야를 흐려놓는다. 안개의 절정은 사곶해변이었다. 전날도 뿌였던 그곳은 여전히 안개, 안개에 싸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꺼번에 보여주기 몹시 아깝다는 듯. 섬 하나의 날씨가 이렇게 딴판이라니. 우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안개낀 사곶해변과 안개가 걷힌 사곶해변
▲ 사곶 해변 안개낀 사곶해변과 안개가 걷힌 사곶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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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곶천연비행장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잔차. 나도 달리고 싶었다
▲ 사곶해변 사곶천연비행장에서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잔차. 나도 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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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예정대로 배가 출항을 한다는데 우리에겐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다. 사곶해변이었다. 다른 팀들 점심 먹으러 갈 시간, 우리는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그곳으로 갔다. 정말 우리의 성의가 갸륵해서일까? 안개는 다 물러가고 천연비행장 그 단단한 모래사장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버스가 해변으로 달려 나갔고 곧이어 자전거도 그 단단한 해변으로 들어가며 여유롭게 드라이브를 즐겼다.

하지만 1박2일이 3박4일이 되었기에 백령도는 우리에게 더 친숙한 섬이 되었다. 감춰두었던 마지막 모습까지 다 보여 주었고. 그러나 백령도를 찾고 싶은 이에게 은밀하게 알려 줄 말이 있다. 백령도의 봄은 이렇게 안개에게 포위당하는 날이 많다는 것이다. 보통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한 20일간.

7, 8, 9월이 백령도를 찾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지만 그때는 성수기라서 관광객이 너무 많아 이 섬이 몸살을 앓는단다. 혹시 우리처럼 기상이변을 즐기고 싶으시다면 주저할 필요는 없다. 일정 넉넉히 잡아서 안개를 만나러 가 보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섬 백령도로.


태그:#백령도,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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