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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광우병의 위험성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 국가는 안전성을 내보여 시민들의 염려를 잠재우고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정부나 보수언론은 도리어 시민들에게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성이 있다는 증거를 대봐"라며 삿대질한다.

 

'제조물책임법'이라는 법이 있다. 소비자는 공산품의 안전성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다는 문제만 제기하면 되고, 제조업자나 유통업자는 "이래서 안전하다"는 점을 입증토록 하고 만일 입증하지 못하면 당연히 책임을 지도록 했다(법 제4조).

 

이 법 취지대로라면 소비자이자 시민은 광우병에 대한 위험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생산자나 유통업자 그리고 협상의 책임자인 정부가 나서서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해보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정부가 이를 입증해내지 못하면 작게는 정부의 정책실패요, 크게는 시민에 대한 나라의 보호의무 포기라고 평가해도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문제제기가 잘못됐다는 탓만 하며 모든 책임을 시민에게 떠넘긴다. 정부가 안전에 대한 입증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위험성에 대한 판단과 '궁극적' 책임은 오로지 시민의 몫이다. 광우병 관련 헌혈의 책임소재도 결국은 개인의 탓으로 돌리겠다는 태도다.

 

[위험 입증] 광우병 겁나는 국민들이 알아서 증거 찾아야 하나

 

같은 광우병 발생 국가이면서도 영국에 살던 사람은 헌혈이 금지된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대한적십자사가 2007년 발간한 <헌혈기록카드 문진항목 판정기준 소책자>의 내용을 다시 보자.

 

"최근 영국을 중심으로 발생하고 있는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variant Creutzfeldt-Jakob disease: 이하 vCJD)은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의 섭취나 vCJD에 감염된 환자의 헌혈혈액을 통하여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다.(중략) 따라서 수혈 혈액의 안전성 강화를 위하여 혈액을 통한 vCJD의 전파가능성과 안정성 문제가 확인될 때까지 채혈금지 대상국와 체류기간을 다음과 같이 확대, 적용하기로 한다."(필자, 〈정태인씨 가족이 헌혈할 수 없는 이유>, 오마이뉴스 2007.9.12자)

 

영국에 살다 온 시사평론가 정태인씨 가족은 여전히  헌혈 금지대상자다. 반면 이번 정부의 공식발표는 정반대다.

 

- 혈액에 대한 전염도 가능하나?

"기본적으로 광우병에서는 현재까지 혈액에 의한 어떤 전파 요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5월 2일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에 대한 정부 합동기자회견)

 

이 역시 본질적으로 혈액을 통한 광우병 발생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에 맡기겠다는 태도다. 곧 헌혈기준도 바꿔놓을 것이다. 광우병의 잠재적 위험으로부터 '정부는 없다.' 오로지 '시민의 책임'만 있을 뿐이다.

 

 

[재협상권한] 협상 다해놓고 "일본·대만 지켜본 뒤 개정"?

 

"재협상은 국제 관례상 있을 수 없다. 다만 일본 대만 등의 협상 결과를 지켜본 뒤 우리보다 강화된 기준이 채택됐다면 우리도 그 기준에 맞게 개정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5.4. 박재완 대통령정무수석)

 

도대체 시민들의 재협상 요구는 안중에도 없다. 이럴 바에야 처음부터 일본·대만을 핑계대며 그 기준대로 나아가, 일본 대만보다 나중에 협상을 했더라면 이런 극단적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던 정부가 이제 와서는 재협상 여부가 일본과 대만의 협상결과에 달려 있다는 식으로 변명한다.

 

국민건강을 기준으로 하는 우리의 협상기준 자체가 없었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읽혀진다. 나아가 더 큰 문제는 이 발언 자체도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번 협상의 핵심은 모든 검역기준을 OIE(국제수역사무국)에 맡겨버린 데 있다. 이제 와서 미국을 상대로 그 기준의 변경이 가능할까? 우선 모면하고 보자는 '떠넘기기'의 전형일 뿐이다.

 

[정책홍보] 미국산 쇠고기 홍보를 왜 한국정부가 하나

 

주권자인 시민에게 정책을 설명하고 소통하는 일은 국가기능의 핵심이다. 그러나 정부가 소통을 포기하고 뒷방으로 물러나 앉은 사이, 극우보수세력의 철지난 논리가 횡행한다.

 

'색깔론'이요, '음모론'이요, '배후론'이다. 결국엔 전가의 보도처럼 '반미론'을 들고 나선다. '공안의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면 모든 사물은 빨강색이다. 시민들의 쇠고기 반대 문화제도 주권자의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저 불법일 뿐이다. 시민은 사법처리의 대상자다. 공안의 시대이다. 하지만 도대체 지금의 공공의 불안을 누가 조성했나? 시민인가 아니면 협상을 책임진 정부인가? 공공의 안전을 지키려는 자 도대체 누구인가?

 

구체적 홍보 기능은 우리 정부가 아닌 미국 정부와 재외국민의 몫이 됐다. 미 농무부 식품안전담당 차관이 한국특파원단과 긴급 기자회견을 갖더니만, 연이어 뉴욕한인회와 LA 한인상공회의소, 캘리포니아 지역의 한인단체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나섰다. 왜 우리의 문제를 국내에서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 해결하지 못하고 재외국민들의 걱정어린 시선, 또는 공급자의 일방적 시각에서 풀어나가야 하는가?

 

정부의 정책홍보 기능은 더 이상 없다. 일방통행식 협상에서부터 이미 예견됐던 일이기는 하나, 더 이상 시민은 소통의 상대방이 아니라, 통치의 신민(신민(臣民)으로 격하되고 있다.

 

[검역주권]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하겠다고 선서했는데...

 

검역주권을 포기하는 일은 국민의 보건권과 건강권, 나아가 생명권을 포기하는 일이다. 대통령의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증진하는 데 대한 대통령으로서의 의무(대통령 선서 중)를 게을리 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고 있다(헌법 제10조), 이에 대해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제10조 후단) 또한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제34조 제6항) 하며,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제36조 제3항)고 정한다.

 

국민을 건강의 위험성 보건의 위험성 생명의 위험성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 의무다.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만큼이나 각종 사회적 위험성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라는 제도의 존재 그 자체이다.

 

나아가 시장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생산품의 품질향상을 촉구하기 위한 소비자보호운동을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한다."(제124조)

 

광우병 쇠고기 파동에 있어, 생명주권·건강기본권 보장에 있어 정부는 없다. 이 모든 기능을 시장에 떠넘겨 버렸다. 그것도 공급자에게만 떠넘겨 버렸다. 더 이상 소비자는 없다. 더 이상 시민은 없다.

 

국민의 생명권을 담보하는 대한민국의 검역주권은 더 이상 없다. 검역주권은 OIE에 있다. 국민은 위임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정부는 그렇게 해치웠다.

 

"미국은 지난해 5월 광우병위험통제국으로 국제적 인정을 받았고, 우리가 OIE 기준을 반박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우리는 OIE 회원국으로서 OIE 기준을 '존중'해야 하는 입장"(5.2. 농림수산식품부)

 

이 뿐 아니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된다 해도, 우리는 독자적 판단으로 수입금지조치를 내릴 수 없다. 이 권한도 OIE에게 '사실상' 양도했다.

 

하지만 미국은 검역주권을 OIE에게 전혀 넘기지 않았다. 주권 문제만큼 '보수의 핵심'이라는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말을 빌려오자.

 

"2002년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발생했다. 그때 미국은 우리나라를 쇠고기 수입금지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얼마 후 OIE는 우리나라를 구제역 청정지역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구제역을 이유로 우리나라로부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검역주권의 문제를 선명하게 대비시킨 대법관 출신다운 날카로운 설명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에 한걸음 더 다가선 셈이다. 검역관련 모든 규제를 완화하고, 검역관련 모든 정부 조직을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은 이렇다. 정부는 뒷감당 못할 일을 저질러 놓았다. 미국정부와 재외국민이 나서서 수습해보려 애쓰지만 재협상 자체가 사실상 봉쇄된 형편에서 이 또한 우리 시민들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이번 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위험성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시민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확률'만을 믿고 그 확률에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없다.


태그:#미국 쇠고기, #OIE, #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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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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