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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넘어 차라리 슬픔으로
 
날씨가 벌써 초여름을 방불케 할 만큼 덥다. 겨울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로가 화단을 장엄했던 철쭉 등 온갖 꽃들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선시대 12가사 중의 하나인 <권주가>가 떠오른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워마라 명년 삼월 봄이되면 너는 다시 피려니와 가련하다 우리 인생('권주가' 일부)"이란 구절이 삶의 덧없음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어디 날씨만이 더운가. 우리네 마음도 후끈 달아올라 있다. 온라인에서 벌이는 대통령 탄핵 서명 열기가 오프라인으로까지 번져버린 것이다. 식탁에 오르는 쇠고기 하나도 지켜주지 못하는 약소국가. 알아서 길 줄 아는 '센스'를 가진 정부. 서울이란 곳이 여차하면 코 베어 가는 곳이라 하니 과천부터 기었다는 옛 시골 선비의 환생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누가 어쩌자고 이런 정부를 선택했는가. 분노가 사그라지면 어느새 슬픔이 찾아온다. 슬픔이란 무엇인가. 슬픔이란 감정은 어느 때 찾아와서 우리네 마음의 창을 두드리는가. 온라인 곳곳엔 풍자와 패러디가 넘쳐난다. 변형된 슬픔의 얼굴이다.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이렇게 시작되는 '눈물'이란 시를 썼던 김현승 시인(1913~1975). 난 아직도 그가 죽던 날의 신문 기사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은 요즘 무슨 재미로 사시요? 나는 요즘 슬퍼하는 재미로 살고 있소"라면서 강의 첫 머리를 열던 시인은 채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불귀의 길을 가고 말았다고 그날의 석간신문은 전하고 있다. 그가 재직하던 숭전대학교 학생들이 꽃상여를 떠메고 운동장을 돌던 사진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의 나 역시 슬퍼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그렇구나. 우리에겐 슬퍼할 권리가 있었구나. 그 권리를 대통령이 되찾아 주었구나. 참 좋은 대통령이다. 국사 다망하신 분이 그런 사소한 권리까지 되찾을 수 있도록 신경 써주기가 어디 쉬운 일이냐 말이다.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우린 슬퍼할 권리조차 잃은 채 살 뻔 했어.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다

 

나는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이건 하소연인가, 아니면 강력한 주장인가. 시인이라는 존재들이란 얼마나 웃기는 존재들인가. 걱정거리가 없으면 일부러라도 걱정거리를 찾아야 하는 게 그들이다. 걱정거리야말로 시인들이 일용할 양식인 셈이다. 자, 이젠 어떤다? 우리들의 친애하는 대통령께서 몸소 슬퍼할 권리를 찾아주셨으니 말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삶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은 시. 이제 그런 시는 시인 자신이 알아서 용도 폐기해야 하지 않을까.

 

수일 내로 시인의 고뇌에 찬 결단을 기대하면서 '슬퍼할 권리'라는 시의 전문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다시는 이런 '나쁜 시'에 대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하여.

 
슬퍼할 권리를 되찾고 싶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

지나친 욕심일까―그러나 울어 보지 못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한 번도 소리내어 울지 못하고 아니야 울고 싶은 마음조차 먹지 못하고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마련하여 눈물나는 영화를 보러 가서는

남의 슬픔을 빙자하여 실컷실컷 울고 오는 추석날의 기쁨.

고작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 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물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

- 노혜경 시 '슬퍼할 권리' 전문  

 

이 시를 쓴 노혜경은 1991년 '현대시사상'에 '상뚜스' 외 4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시인이다.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 <뜯어먹기 좋은 빵>,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등의 시집을 상자한 바 있는 그는 시인으로서 보다는 시외적인 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부산언론운동시민연합 부의장, 안티조선 우리 모두 사이트 운영위원,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대표, 제17대 열린우리당 부산 연제 국회의원 후보,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국정홍보비서관(2004년 8월~2005년 7월) 등의 이력이 그것이다.

 

내가 노혜경이란 시인이 있다는 걸 안 것은 2000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난 막 인터넷이란 거미줄에 얽혀들기 시작한 초보 네티즌이었다. 초보답게 조심조심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이곳저곳을 주유하면서 돌아다녔다. 굳이 명명하자면 사이버 김삿갓이라고나 할까.

 

가장 많이 들락거리면서 댓글을 달았던 곳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여성문화동인 <살류쥬>라는 곳이 생각난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 쑥쓰럽지만, 그곳에서 내 간단한 댓글들은 꽤 인기가 있었다. "대학교 때 자신이 짝사랑했던 김영하라는 소설가의 문체를 닮았다"라면서 "한 번만 만나달라"는 스토커가 생길 정도였다. 그래도 그 스토커 덕분에 우리나라에 김영하 라는 소설가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노혜경씨도 자주 들어와 심심치 않게 댓글을 남기곤 했다. 그래서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가 <뜯어먹기 좋은 빵>(세계사)을 펴낸 직후가 아니었나 싶다. 그곳에 "방을 한 칸 내주겠다"라는 것을 굳이 거절하고 발길을 뚝 끊어야 했던 것은 스토커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족이 너무 길었다. 요사이 내가 슬픔에 자주 노출되다 보니 판단력이 마비된 탓이니 너그러이 이해하시길…. 이 시는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고려원.1995)에 실려 있다. 시의 내용에 특별히 어려운 것은 없다. 다만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건 "슬픔이란 게 도대체 뭐냐?"라는 것이다.

 

분노가 사그라진 자리엔 어느덧 슬픔이...

 

백과사전은 슬픔을 가리켜 "자신, 또는 남의 불행이나 실패의 경험, 예측 또는 회고를 수반한 억울한 정서"라고 말한다. 백과사전은 "혈액순환이 약해지고, 호흡이 완만해지며, 안색이 창백해지고, 흔히 눈물을 흘린다"라고 그 증상까지 친절하게 부연 설명한다. 이 설명을 참조하면 현재 자신이 처한 슬픔의 심도(深度)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엔 특별히 "실패의 경험"이란 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오래 산 까닭에 내겐 좋은 대통령을 뽑지 못한 실패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덧붙인다면 슬픔이란 분노가 사라지고 난 뒤에 엄습하는 감정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슬픔이란 분노가 좌절된 감정인지도 모른다. 좌절된 분노의 변형.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분노할 권리를 행사하고 나서야 비로소 생기는 것이 슬퍼할 수 있는 권리인 셈이다.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는 그렇게 슬픔으로 잠복한다. 그리고 오랜 잠복기를 거쳐 비등점에 이르게 되면 마침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남의 울음에 위탁한 울음"이든지 남의 분에 위탁한 분노든 간에 그게 무슨 상관인가. '위탁'이란 말을 '연대'라는 말로 바꾼들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지금은 다만 분노를 넘어 "잔잔하게 눈물 흘릴 권리 하며, 많은 위로를 받으며 흐느껴 울 권리, 핑핑 코를 풀어대며 통곡할 권리"를 행사하고 싶을 뿐이다.

 

도대체 우린 앞으로 얼마나 자주 알아서 길 줄 아는 정부의 '기민성'에 분노하고 슬퍼해야 하는가.


태그:#노혜경 , #고려원 ,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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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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