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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북한강 상류에선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5월 5일)를 전후하여 고추모를 냅니다. 지금 모종들은 하우스에서 싱싱하고 토실토실하게 잘 자라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습니다. 작년에 탄저병에 걸려 고추농사를 맹랑스레 허탕을 친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옵니다.

 

탄저병을 예방하기 위한 농약도 많고 방법도 다양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땅 심을 길러 모종이 튼실하게 자라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농부의 역할입니다. 건강하게 자라 어느 바이러스가 날아와 널름거려도 절대로 기생하지 못하도록 많은 거름과 퇴비를 넣어줍니다.

 

요즘엔 시간만 나면 부엽토를 파러 갈참나무 숲을 찾아갑니다. 5월의 갈참나무 숲속이 사람 기분을 얼마나 가볍고 시원하게 하는지 올라본 사람은 다 압니다. 이름 모를 멧새들의 지저귐과 솨-하고 갈참나무 잎 갈리는 소리는 산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행복입니다. 서걱거리는 떡갈나무, 속살대는 졸참나무 잎,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부엽토 냄새만으로도 이 여름을 기분 좋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한참 부엽토를 파다 보니 어린 생명이 땅속을 비집고 세상 구경을 나옵니다. 도토리 한 알이 지난한 몸짓으로 갈색 껍질을 벗고 있습니다. 하도 귀여워 낙엽 속을 자꾸만 드려다 봅니다. 모든 씨앗은 몸이 썩어야 싹이 나오는 법인데 신통하게도 작년 가을에 보았던 탱탱한 알몸 그대로 새 생명을 열고 있습니다. 두 쪽으로 쫙 갈라져 새싹을 틔워내는 모습이 사뭇 신비롭습니다.

 

그때입니다. 어린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이나 하듯 지장보살이 한참 열반 세상을 열어 보입니다. 긴 추위 속에서 얼마나 동안거를 잘했으면 꽃 열매마다 사리처럼 작은 구슬들이 맺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저 꽃을 보고 지장보살을 어찌 생각해 냈는지 웃음이 저절로 나옵니다.

 

불교경전에는 지장보살을 '대원본존지장보살마하살'이라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일체 중생이 착하게 살려고 노력만 한다면 그의 편에 서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모든 소원을 들어주고 챙겨준다 합니다. 그렇다면 나도 조그만 소원 하나 빌어봅니다.

 

"지장보살님, 소원하나 빌어도 될까요?"

"…."

 

아무 말이 없습니다.

 

"올해도 고추를 심으려 합니다. 작년엔 태풍과 장마에 고추 농사 허탕을 쳤습니다. 바라옵건대 올핸 탄저병과 무름 병이 들지 않게 하시고, 뿌린 만큼만 거두게 하셨으면…."

"착하게 살려고 노력은 하는 게냐?"

"…?"

 

지금, 내가 살고 하고 있는 일이 잘하는 일인지, 착한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 땅 일구고 남에게 욕된 일이나 먹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이옵니다.

 

"…."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 대답이 없습니다. 묵묵부답이니 한참 피어난 지장보살 앞에서 꽃 내음만 하염없이 맡아봅니다. 어리석은 물음에 이미 대답은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쪽 자작나무 밑엔 언제부터인가 윤판나물 피어나 운판(雲版-날짐승 등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구름모양을 본 떠 만든 법구)을 두드리며 불쌍한 중생을 위해 숲 속을 환하게 비추고, 종지 꽃은 지장보살님께 저녁공양 시주를 올리려는지 종지 속마다 꽃물을 자꾸만 퍼 담습니다.

 

어느새 뻐꾹새 날아와 '호곡, 호곡' 어서 밭으로 내려가 곡식의 씨를 뿌리라며 하산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원생활, 북집 네오넷코리아,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태그:#지장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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