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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17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울과 평양에 각각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현재 남북관계를 볼 때 실현 가능성이 상당히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북한이 남한 대통령을 '역도'라고 부르는 상황인데 남북연합 초기단계에서나 가능한 연락사무소를 느닷없이 내놓은 것은 이명박 정부의 '무모한 강심장'을 보여줬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더 나아가 요즘 통미봉남'(通美封南:북한이 미국과는 대화하고 남쪽은 철저히 배제하는 전술) 우려가 부쩍 나오자 이명박 정부가 연락사무소 제안으로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역도라고 불리는데, 웬 '연락사무소'?

 

미국 방문 첫날인 지난 15일에는 "위협적인 발언 때문에 북한을 도와주고 협상하는 것은 앞으로 없다"고 북한을 자극하더니, 불과 며칠 뒤에는 연락사무소를 제안하는 등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연락사무소 같은 중대한 발표를 하려면 남북한 사이에 사전 접촉으로 실현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며 "이런 작업이 없는 연락사무소 제안은 과시용 한건주의, 전시행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더구나 미국에 나가서 미국 신문과 인터뷰하면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은 국내 정치용 돌출 발언으로 보여 남북 신뢰구축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이명박 정부 출범 뒤 남북 당국간 신뢰가 많이 깨졌다"며 "불신을 해소하는 조치 없이 이런 제안을 하면 북한은 '핵 신고 문제가 잘 풀리니까 남한 정부가 조급해졌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따라서 북한의 입장만 더 강화될 뿐"이라며 "이제 느긋해진 북한은 개성공단 폐쇄 등과 같은 남북관계를 완전 중단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렇다고 현재보다 개선하지도 않으면서 남한 정부의 애를 타게 만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연락사무소는 남북연합 초기 단계에서나 가능

 

연락사무소는 정식으로 국교를 맺지않은 국가 사이에 외교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전 단계로 상호간에 설치하는 기관이다. 대사급 외교관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대사관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남북한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서울과 평양에 두는 연락사무소는 현재 판문점 연락관을 통한 접촉보다 훨씬 더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 소통 체계를 구축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특히 남북연락사무소의 소장은 양쪽 모두 최고 지도자와 바로 통하는 거물급이 임명될 가능성이 높다. 또 연락사무소에는 각각 국기를 건다. 평양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서울에 인공기가 항상 휘날리는 것이어서 정치적 상징성도 엄청나게 크다.

 

이 때문에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한 정부는 여러차례 연락사무소 설치를 제안했지만 북한은 수용하지 않았다.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 두는 것을 남북간에 두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한은 아직 남북관계가 연락사무소를 설치할 수준에 이르지 않았다고 봤던 것이다.

 

화해·협력 기조였던 지난 10년간도 이랬는데 북한이 남쪽 공무원을 추방하고 대통령을 '역도'로 부르는 현재 연락사무소 개설이 가능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노무현만 아니면 된다?

 

현재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는 남북관계를 잘 아는 참모들이 적고 무엇보다 지난 10년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 기류가 강하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지난 2005년까지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이 한 것 빼고는 다 좋다) 정책을 추구해 북한의 항복만을 요구했던 것과 똑같다.

 

이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연락사무소를 제안하면서 "북한이 지난 10년간 상대했던 정부와 이번 정부는 매우 다르다"면서 "그래서 적응기간 동안 남북한 대화가 원만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또한 이 대통령은 "북한은 한국과 나에 대해 호전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며 "남북한 모두가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북한이 그들의 오랜 방식에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밝혔다. 방미 첫날인 지난 15일에는 "위협적인 발언 때문에 북한을 도와주고 협상하는 것은 앞으로 없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현 정부는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좌파정권이 버릇을 잘못들여 북한은 갑, 남한은 을의 위치에 있었다. 이제 남한은 갑으로, 북한은 을로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동안 남북경협 등은 북의 위협에 남쪽이 깜짝 놀라 저자세로 도와주고 협상한 것에 불과하다. 새 정부가 이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남북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

 

앞에 인용한 이 대통령의 발언도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북미 비밀 합의 자체가 통미봉남의 한 사례

 

그러나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 라인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김정일은 독재자"라고 불렀던 부시 대통령이 2006년 이후 태도를 바꿨던 이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 부시는 클린턴이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보상을 해줬다며 맹비난했으나 지금은 그 역시 '잘못된 행동'에 막대한 보상을 제공하려 하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17일 북핵 검증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거나 적성국교역법 적용 대상에서 배제하는 작업을 미리 시작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지난 8일 북한 김계관과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은 싱가폴에서 만나 플로토늄 신고서는 6자 회담국 사이에 공개하되 시리아와의 핵 협력 의혹과 농축우라늄 문제는 북미사이의 비밀의사록에만 담도록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안보 분야의 한 관계자는 "북미 비밀 합의에 대체 무슨 내용이 담길지 어떻게 아느냐"면서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끼지도 못하고 경수로 비용을 덤터기 썼던 악몽의 재판"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과거 사례를 보면 미국은 핵심 정보는 결코 한국에 주지 않았다"며 "북·미 비밀합의 내용은 북중관계로 볼 때 중국에게 어느 정도 흘러갈지 몰라도 한국 정부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북·미 사이의 제네바 합의와 김영삼 정권의 경수로 비용 덤터기 쓰기는 남한이 북한의 '통미봉남' 전술에 당한 대표적 사례다.

 

현재 북·미 사이는 관계는 순조로운데 남북은 극도로 냉랭해 '통미봉남'이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 동맹이 튼튼하기 때문에 다시 통미봉남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 핵의 직접적인 위협을 받고 있고 북핵 문제의 가장 직접 당사자인 한국이 북미 사이의 비밀합의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 자체부터가 통미봉남의 한 사례다.

 

"6·15-10·4선언 무시한 인상... 이것부터 해결해야"

 

따라서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있는 것처럼 북한의 선(先)대화 제의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남한 정부가 먼저 능동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김창수 민주평통 전문위원은 "남북관계를 풀려면 먼저 6·15 정상회담과 10·4 정상회담을 이명박 정부가 무시한다는 인상을 준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며 "이 대통령이 간담회 등의 자리에서 '남북이 기존에 합의했던 사항을 이행하겠다'는 식으로 언급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남북이 기존에 합의했던 사항'에는 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남북비핵화공동선언, 6·15 선언과 10·4 선언 등이 모두 들어간다. 김 위원은 "이렇게 하면 북한은 남한 정부가 진짜 대화를 원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은 1차 남북정상회담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김정일 위원장의 최대의 업적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고 있으며, '6·15 시대'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남쪽 정부의 6·15와 10·4 폄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곧 김정일 위원장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 전문위원은 "다음은 쌀과 비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특히 쌀은 지금이 제공할 적기"라면서 "북한 핵신고 문제가 풀려가는 지금 순수 '인도적 차원'에서 쌀을 제공하겠다며 이를 위한 실무 협의를 갖자고 북한에 제안하면 남북 대화가 복원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도 인도적 지원 자체를 부인한 적은 없다. 또 남북관계 발전의 전제로 걸었던 북핵 문제도 일부 진전이 있어 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태그:#이명박, #연락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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