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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 정승아씨의 허락 하에 취재기자가 시각장애인의 시점에서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자 주>

봄바람에 귓불이 간지럽다. 길섶 아물아물 아지랑이는 봄날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봄날의 오후 여유로운 산책. 삼청동이 어떨까. 산과 물이 맑고 인심 또한 맑고 좋다는 그 곳, 손색이 없으리라. 살랑살랑 봄바람 속으로 나섰다. 14년지기 소영 언니와 정안인 친구가 길벗이 돼주었다.

삼청동으로 간 삼총사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오니 덕성여고 돌담이 삼총사를 호위해준다. 그 샛길로 삼총사는 당당히 진군한다.

"왼쪽엔 중학교, 오른쪽엔 고등학교인데 학교 담장이 이렇게 멋진 돌담이라니…. 와~ 언니! 중학교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로질러서 이웃 고등학교 담장까지 닿아 있어. 참 멋지다."

소영언니에게도 그 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망막색소변성증(MD)로 인해 중심부 시야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사람 얼굴이나 글씨는 못 알아보지만 주변 시력이 아직은 남아있어서 따사로운 봄날의 경치는 흐리게나마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색색의 페인트를 칠한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다.
▲ 부엉이 깃털을 닮은 건물 색색의 페인트를 칠한 철판으로 만들어져 있다.
ⓒ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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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건물들이 뽐내는 거리 

삼청동엔 참 특이한 건물이 많다.

정안인 친구가 곁에서 어떤 건물인지 무엇을 파는 곳인지 알려주며 함께 걸었다. 한옥을 개조한 식당, 나무와 철을 이용해 독특하게 만든 건물, 커다란 못으로 나뭇가지 모양을 만들어 계단 난간을 장식해 놓은 곳도 있고 사각 철망 안에 돌멩이들을 가득 채워서 벽으로 사용하는 곳까지 음식점·카페·장신구점 등 다양한 건물들이 즐비하다.

부엉이박물관 근처에는 알록달록한 철판이 생선비늘 모양으로 켜켜이 덮인 특이한 건물도 있었다.

옷, 신발, 치렛감(액세서리) 등을 파는 자그마한 가게들도 많았는데, 봄날 나들이객들을 유혹하는 듯 뽐을 내고 있다.

한 가게 앞에서 소영 언니가 작은 가죽가방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가격이 4만 원 붙어 있어요."
"정말? 나 예전에 이거 2~3배 크기 가죽가방도 4만원 주고 샀는데…."
"수공예라 그런지 특이하긴 한데 좀 비싸네. 여긴 돈 벌려고 하기보단 그냥 분위기를 즐기려 하는 사람들이 장사해야 할 것 같아."


옹기종기 특이한 박물관 집합

삼청동에는 작은 박물관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다. 처음 만난 티베트 박물관부터 세계장신구박물관, 장난감박물관, 총포박물관, 그리고 부엉이 박물관까지. 특이한 구경거리와 함께 차분하게 따스한 봄내음을 느낄 수 있는 차를 마실 수도 있으니 입장료 5000원은 그리 비싸지 않은 것 같다.

청와대 지붕을 내려다보다

차량 통제 중인 길 앞에 접어들었다. 청와대 가는 길목이라 경찰들이 차량통제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와 총리공관, 그리고 감사원까지 이곳 삼청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니, 산과 물이 맑고 인심 좋다는 삼청동 명성답다.

청와대 옆길과 나란히 따라 계속 걷다 낯선 길로 접어들었다.

한옥마을 표지판을 보고 간 곳이었는데, 걷다 보니 세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기와지붕의 한옥집들이 쭉 펼쳐졌다.

우리그릇박물관, 실크로드박물관, 총포박물관이 나란히 한 건물에 들어앉았다.
▲ 박물관 건물 우리그릇박물관, 실크로드박물관, 총포박물관이 나란히 한 건물에 들어앉았다.
ⓒ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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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이 사람들 소리가 들리고 차도 다니는 것을 보니 정말 사람들이 사는 모양이다. 어느 집 앞에는 오래된 대나무도 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려 사각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기와도 만져 보고 담장도 더듬으며 한옥마을을 지났다.

걷다 보니 총포박물관과 실크로드박물관이 있는 건물에 다다랐는데 예전에 그 건물 카페테리아에서 청와대를 내려다보았던 것이 기억났다.

주인아저씨 말이 청와대 관계자들도 간혹 와서 둘러보고는 청와대보다 이곳 전경이 더 좋다고 했단다. 그리고 청와대로는 총 겨누지 말라는 농담도 남기고 갔다고 한다(이곳은 총포박물관 건물이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아래 저 멀리 우리가 지나온 삼청동 길이 내려다보였다. 살짝 오르막을 오른 듯했는데 꽤 높은 곳까지 올라온 모양이다. 좁은 계단 길을 찾아 삼청동길로 내려왔다. 두 시간가량 걸었더니 다리가 아파진다. 이제 저녁을 먹으며 좀 쉬어볼까?

해물 듬뿍 떡볶이 전골 대령이오


친구가 추천해준 김치말이국수를 먹으러 갈까 했지만 그 식당은 삼청동 골목 제일 안쪽에 있어서 다시 가기엔 너무 멀었다. 그래서 두 번째 추천 장소인 떡볶이집에 가기로 했다. 너무 맛있어서 사람들이 항상 줄을 선다는 그 떡볶이집은 다행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니 줄은 안 섰겠지' 하고 가게에 들어섰는데 이게 웬일? 이미 좌석이 가득 찼다며 밖에 있는 의자에서 잠시 기다리란다. 한참 만에 만찬의 장소로 들어섰다.

해물떡볶이·치즈떡볶이·불고기떡볶이, 그리고 쫄면사리·만두사리·못난이…. 정안인 친구가 메뉴를 읽어주었다.
삼청동 먹쉬돈나의 해물떡볶이
▲ 해물떡볶이 삼청동 먹쉬돈나의 해물떡볶이
ⓒ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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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못난이만두, 오랜만에 들어보네!"

해물떡볶이에 쫄면과 못난이 사리를 추가하여 주문했다. 오늘 거닐던 삼청동 길에 대해 잠시 수다를 떠니 맛있게 끓여진 떡볶이가 대령되었다. 빨간 국물에 홍합과 오징어가 듬뿍 든 모습이 마치 전골 같았다. 떡볶이는 소문만큼이나 맛있었다.

"근데, 못난이만두는 예전보다 맛이 좀 덜하네."
"속에 당면도 들고 그래야 하는데, 무늬만 못난이야."


예전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떡볶이의 뽀얀 김처럼 학창시절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나는 어릴 적부터 눈이 안 좋긴 했으나 내가 시각장애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일반학교에 다녔고, 중3 때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정확한 병명을 듣긴 했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1 때까지는 글씨도 알아보았고 교과서에 필기도 곧잘 했다. 하지만 고2, 3을 지나며 내 시력은 점차 악화되었고, 고3 무렵 내 교과서는 매우 깨끗했다. 필기를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내가 필기한 글씨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서야 맹학교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나보다 시력이 더 좋은 약시자들도 맹학교에 다닌다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삼청동에서 만난 봄꽃
▲ 봄꽃 삼청동에서 만난 봄꽃
ⓒ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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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영 언니도 일반학교에 다녔는데 언니는 그나마 주변시력을 먼저 잃었기 때문에 길은 혼자 못 다녀도 책은 잘 보았다고 한다. 소영언니를 처음 만났던 14년 전만 해도 언니가 큰 글자는 읽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망막색소변성증이 진행되어 거의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함께 나들이도 다니고 요즘은 함께 영어회화도 배우고 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정해진 코스대로 사람들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지만, 이번 봄나들이는 우리 마음대로 다니며 더 많은 것을 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제 완연한 봄인가 보다. 파릇파릇한 새싹을 피운 나무 내음이 봄바람에 실려온다.

덧붙이는 글 | 시각장애인을 위한 격월간 잡지 <손끝으로 읽는 국정> 4월호 게재.



태그:#삼청동, #봄 나들이, #시각장애, #한국점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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