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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추녀마루엔 웬 잡상(雜像 궁전이나 전각의 지붕 위 네 귀에 얹는 짐승 모양으로 만든 기와)들이 저렇게 많지? 근정전보다도 더 많잖아?“

“정말 그러네, 화재와 액운을 방지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잡상이 어떻게 임금의 처소보다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에 더 많을 수 있는지 모르겠네.”

 

지난 12일 찾은 경복궁의 경회루를 둘러보던 일행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일행들은 이날 궁궐 건축물마다 추녀마루에 얹혀있는 잡상들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경회루 추녀마루에는 다른 어떤 건축물보다 많은 잡상들이 얹혀 있었다. 궁궐의 추녀마루 위에 얹어 놓은 잡상은 중국 송나라 시대부터 등장한 것으로 화재와 액운을 방지한다는 일종의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궁궐의 건축물들도 그 위상이나 중요도에 따라 잡상의 수가 달랐다.

 

임금이 국가의 행사를 주관하던 근정전이나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경영하던 자경전의 잡상이 후궁들의 처소나 창고보다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잡상의 수는 일반적으로 홀수인 3개, 5개, 7개, 9개, 11개 등으로 설치되었다.

 

그런데 경회루 처마마루에 세워져 있는 잡상의 숫자는 경복궁 내에서 가장 많은 열한 개나 되었다. 보통 상식으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우리 일행들의 의견이 분분할 때 마침 근처를 지나던 문화해설사가 있어 물어보았다.

 

“네, 그것은 이 경회루가 청나라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청나라 사신들은 자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장소의 처마 마루 잡상의 수가 적으면 자신들을 홀대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생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경복궁 내에서 가장 많은 잡상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못된 사람들, 별걸 가지고 다 생트집을 잡았군. 겨우 저까짓 잡상으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행패를 부리다니.”

 

일행 한 사람이 끌끌 혀를 찬다. 비록 그 시대의 문화라지만 지붕에 설치하는 잡상 숫자까지 중국을 의식해야 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안타깝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국보 제224호인 경회루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세운 건축물이다. 조선 개국 초기에 처음 세워진 경회루는 지금 규모보다 매우 작은 건축물이었다. 그렇게 세워졌던 경회루를 태종 12년에 연못도 넓히고 다시 크게 지었다. 그러나 그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고종 4년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수할 때 돌기둥만 남아 있던 경회루를 지금의 건축물로 세웠다.

 

당시 경회루 공사를 할 때 연못에서 파낸 흙을 왕비의 침전 뒤뜰에 쌓아 만든 것이 아미산이라는 동산이라고 한다. 이날 살펴본 아미산은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경회루가 서있는 연못 주변에는 마침 피어난 벚꽃이 흐드러져 아름다웠다. 특히 이곳에 서있는 벚나무들은 가지가 축축 늘어져 있어 잎이 피기 시작한 수양버들과 매우 잘 어울렸다.

 

경회루와 함께 연못 가운데 조성되어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에는 몇 그루의 진달래와 함께 푸르고 청청한 소나무들이 늠름하게 서있었다. 그 소나무들 뒤로 바라보이는 북악산의 풍경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경사와 외국사신을 접대할 때 임금이 연회를 베풀었던 경회루는 크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연못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건축물이었지만 주변의 다른 궁궐건물들은 물론 훨씬 뒤쪽에 있는 북악산까지 어우러진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그 아름다운 배경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사람들은 너도나도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이 경복궁 경회루는 정면 7칸, 옆면 5칸의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가 이어진 모습이어서 더욱 멋스럽고 우람하다.

 

경회루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4대 누각으로 알려진 평양의 부벽루, 남원의 광한루, 진주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보다 규모가 훨씬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후기 건축물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걸출한 문화재다.

 

연못 옆 길가에는 땅위로 가로 누운 듯한 고목 한 그루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경회루를 둘러본 일행들은 경복궁 맨 뒤쪽에 있는 또 하나의 정자를 살펴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경복궁 뒤뜰 끝자락에 있는 향원정 주변에도 사람들은 많았다. 경회루에 비해 작고 아담한 정자가 역시 연못 가운데의 작은 섬에 서있는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향원정 주변에는 때마침 피어난 진달래꽃들이 곱고 예쁜 모습이었다.

 

향원정은 육각형 익공식 기와지붕 형태다. 추녀마루가 지붕 가운데로 뾰족하게 모아진 모습이 특이하다, 지붕형태가 마치 가운데 꼭지가 있는 어린아이 모자 형태를 하고 있어서 귀여운 모습이었다.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대원군의 정치적인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건청궁을 세웠을 때, 그 남쪽 뜰에 연못을 파고, 그 가운데 섬을 만들어 이층 구조의 정자를 세운 것이다. 육모정인 이 정자의 이름을 향원정이라고 지은 것은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 주돈이가 지은 애련설에 나오는 향원익청(香遠益淸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을 원용한 것이라고 한다,

 

경회루가 국가적인 경사와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연회 등 공적인 공간이었던데 비해 향원정은 왕과 왕비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사적인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경회루가 크고 넓고 우람한 남성적인 모습인데 비해 향원정은 작고 아담하고 섬세한 모습이 여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연못을 건너 향원정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남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래의 모습은 북쪽 건청궁 쪽에서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섬으로 걸어 세운 취향교(醉香橋)라고 불렀다. 향원정은 2층처럼 보이지만 누마루 밑 공간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되는 셈이다.

 

연못 한 쪽에는 벌써 작은 연잎이 피어 물 위에 떠있는 모습이 보인다. 향원정을 왼쪽으로 한 바퀴 돌아 나왔다. 그런데 때마침 기울어진 오후의 햇살에 정자의 그림자가 물속에 드리운 모습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옛날에 고종임금과 민비도 이곳에 앉아 그림 같은 저 경치를 보았겠지?”

연못 옆 벤치에 앉아 있던 젊은 커플이 하는 말이었다. 젊은 여성은 연못 속에 드리운 향원정의 그림자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그랬겠지, 그래서 저 연못과 정자를 세운 것 아니겠어?”

젊은 남성이 맞장구를 친다. 연못가에 서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도 제법 파란 잎들이 피어나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경복궁 안에 있는 두 개의 정자 경회루와 향원정, 이들 두 개의 정자는 크기와 모양도 전혀 다르고, 사용된 목적도 달랐다. 그러나 그 어떤 정자와 비할 데 없는 아름답고 멋진 모습은 두 건물 모두의 공통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경회루, #향원정, #추녀마루, #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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