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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K 주가조작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경준씨가 특검 조사를 받기 위해 22일 오후 서울 역삼동 '이명박 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BBK 주가조작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경준씨가 특검 조사를 받기 위해 22일 오후 서울 역삼동 '이명박 특검' 사무실로 출두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오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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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살기 위해서 잊는다. 살아가면서 잊는다. 또 언젠가는 대부분 잊히는 존재들이다. 잊는 일은, 잊혀지는 일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인간답게 살자면.
 
우리 사회는 그런 점에선 너무 쉽게 잊는 데 익숙하다. 아무리 뜨거웠던 정치 사회적 쟁점이라도 그것이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리 대형사건이라도 한두 달이면 쉽게 잊혀 진다. 망각은 대한민국의 가장 강력한 우성 DNA가 된 듯싶다.
 
언론과 정치권 관심에서 멀어진 김경준 재판
 
11일 <한겨레>와 <조선일보>가 전하는 김경준 공판 소식은 다시 한 번 망각의 DNA를 확인시킨다.
 
검찰은 어제(10일 공판에서 김경준씨에게 징역 15년에 벌금 300억원이라는 중형을 구형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전하는 <한겨레> 기사에서 정작 주목되는 것은 재판정 풍경이다. <한겨레>는 어제 재판정이 '난장판'이 됐다고 전했다.
 
검찰이 중형을 구형하는 자리에 김경준은 없었다. 변호인도 없었다. 형사재판은 변호인 피고인이나 변호인 없이 진행할 수 없다. 그래서 '난장판'이었다는 이야기다.
 
사연은 이렇다. 어제 구형에 앞서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는 김씨에 대해 심문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김씨의 변호인인 홍선식·박찬종 변호사는 법관기피신청을 하고, 법정을 나가버렸다. 법원이 당초 증인으로 채택했던 김백준·김성우씨에 대한 증인 채택을 취소한 데 대해 재고를 요청했지만,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법관기피신청을 낸 것이다. 김경준씨도 퇴장해버렸다.
 
재판부는 일단 휴정을 선언했다. 10여분 뒤 급히 불러온 국선변호사를 변호인 자리에 앉히고 공판을 재개했다. 재판을 강행한 것이다.
 
다시 재판부는 "재판장의 허가 없이 퇴정했을 경우 불출석 상태로 심리를 진행할 수 있다"며 국선 변호인마저 돌려보낸 뒤 공판을 진행했다. 재판부 기피신청에 대해서도 "소송 지연의 목적이 분명할 경우에는 해당 재판관이 이를 기각할 수 있다"며 자신들에 대한 '기피신청'을 스스로 기각시켜 버렸다.
 
BBK에 쏠렸던 눈과 귀는 지금 어디에
 
재판부로서는 변호인과 피고의 '일방적(?)' 퇴장이 법원의 권위를 모독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피고나 변호인들이 재판부 기피신청까지 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박찬종 변호사는 당초 재판부가 증인으로 채택했던 김백준·김성우씨의 증언도 증언이지만 "이명박 후보의 검찰의 서면진술서에 대해서도 열람 및 등사 신청을 했지만 검찰이 거부한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재판부의 공판 진행에 불만스러울 수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BBK 사건은 지난 대선 정국을 뒤흔들었던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정작 BBK 사건에 대한 재판 진행이 어떻게 됐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정치권은 물론 미디어도 김경준씨 공판 진행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김경준씨 공판만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일 직전 '이명박특검법'이 통과됐지만,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던 당시의 여당은 물론 언론들도 정작 특검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다시피 했다.
 
<한겨레>를 비롯한 극소수 언론이 특검의 미온적인 수사의지에 문제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이미 BBK 사건은 이미 잊힌 일이 되다시피 했다.
 
김경준 변호 자처했던 정치인들은 어디에?
 
정호영 특검은 수사기한의 상당 부분을 DMC 분양 의혹 등 사건의 핵심과는 동떨어진 쟁점에 집중하다가 결국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에 대한 삼청각 꼬리곰탕 점심 회동 조사로 사실상 끝을 맺었다. 이명박 당선인에 대한 모든 혐의는 '무혐의'로 종결됐다. 김경준씨에 대한 검찰의 회유 의혹도 역시 '무혐의'로 판단됐다.
 
<한겨레>는 당시 사설을 통해 "예단과 부실투성이로 면죄부만 준 특검"이라고 이를 비판했다. "특검의 결론이 엄정한 수사와 증거에 따른 것이라면 더 문제 삼을 이유가 없"겠지만 "특검이 그 근거라며 내놓은 사실관계와 그동안의 수사 과정을 보면, 제대로 된 법률적 판단이라기엔 크게 부족해 보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단에 따라 사실을 끼워 맞춘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특검만 탓할 일도 아니었다. 대선 후 정치권은 물론 의혹 제기에 앞장섰던 <한겨레> 등 일부 언론들도 더 이상 적극적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뒤처리만 '정호영 특검'에 맡긴 셈인데, 특검인들 무슨 신이 나는 일이라고 적극적인 '진상 규명'에 나설 수 있었을까 싶다. 물론 그런 여건이 법에 따라 진상을 규명하고, 정의를 세워야 할 특검의 의무를 해태하는 것을 합리화시켜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과서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11일) <조선일보>의 기자칼럼은 그런 또 하나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조선일보> 손진석 기자는 기자칼럼 '기자수첩-변호사 이름 걸어놀 땐 언제고…'에서 김경준씨 변호인으로 이름만 걸어놓은 23명의 무책임한 변호사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대선 직전 "검찰이 회유·협박했다"는 김경준씨의 메모를 김씨의 모친이 공개하자 당시 여당 일부 의원들은 앞다퉈 김씨의 변호를 자처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1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대통합민주신당 긴급의원총회.
 대선 직전 "검찰이 회유·협박했다"는 김경준씨의 메모를 김씨의 모친이 공개하자 당시 여당 일부 의원들은 앞다퉈 김씨의 변호를 자처했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1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대통합민주신당 긴급의원총회.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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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호, 문석호, 송영길, 신기남, 양승조, 유선호, 이상경, 이원영, 이종걸, 조성래, 조배숙, 최용규, 최재천, 천정배 등등 현역 국회의원 14명을 비롯해 모두 25명의 대규모 변호인단이 꾸려졌지만, 지금까지 한 번 이상 법정에 출석한 변호사는 박찬총·김정술·홍선식 3명뿐이라는 것. 정치인 변호사들을 비롯해 나머지 변호사 22명은 선임계만 내고 결심공판까지 오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재판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대선 직전 "검찰이 회유·협박했다"는 김경준씨의 메모를 김씨의 모친이 공개하자 앞다퉈 달려가 김씨의 변호를 자처했던 이들 정치인 변호사들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그런 그들이었지만, 대선이 끝나자마자 김씨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다.
 
처음부터 김씨의 재판 자체는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을 수 있다. 또 BBK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여야 할 것 없이 잊고 싶은 사건일 수 있다. 하지만, 지난 대선 기간 동안 그렇게 국민들의 의구심을 자아낸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정치권이나 미디어나 그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김경준씨 주가조작 사건 재판에 최소한의 '성의'는 보이는 것이 그래도 도리가 아닐까?


태그:#김경준, #BBK 주가조작,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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