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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있다면 언제라고 하면 좋을까? 우문이다. 매 순간이 빛나도록 살아야 하겠지. 되돌아보니 나에게도 청소년기가 있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등학교 시절은 캄캄한 암흑기였다. 한 트럭도 넘는 고민을 혼자 짊어지고 늘 힘겨워했다. 그렇게 버거운 사춘기를 보내고 어른이 되었다.

 

<라일락 피면>은 바로 청소년기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엮어놓았다. 멀리는 80년 광주의 모습을 담아놓았고, 가깝게는 성적 소수자의 딸로 사는 아이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8편의 단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진원의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와 조은이의 <헤바>였다. 

 

<굿바이, 메리 개리스마스>는 동성애자 아빠를 둔 딸의 이야기다. 여기서는 안 되지만 아빠가 사랑하는 남자 폴의 나라, 네덜란드에 가면 정식 부부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단다. 그렇게 되면 더욱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는 꿈이기도 하다. 보린의 엄마는 보린의 아빠가 종종 들르던 바의 여종업원이다. 칠천 만원을 주고 신체 접촉 없이 오직 기계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었다. 그래서 보린의 탄생에는 '뜨거움이랄까, 감격이랄까 그런 것이 없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어버린 보린이 가여웠다. 부모가 있다하더라도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서 환경에 의해 결핍을 경험한다. 그것이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다는 극단적인 결핍인 경우에 좀 더 마음이 아리겠지만 그건 아이의 몫이다. 애초에 그렇게 운명지워진 거라 생각하고 씩씩하게 사는 수밖에.

 

아빠는 폴과 함께 네덜란드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폴이 전화기 너머로 폭탄 선언을 해왔다. 네덜란드에 폴의 아들이 있다고 했다. 일찍 결혼해버리면 평범한 남자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빨리 결혼했던 것이다. 아이를 낳고도 '혼란'은 계속되어서 도망치듯 한국행을 택했던 거다. 더 충격적인 것은 폴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긴 것이었다. 사포로 가슴을 문지르는 것 같다는 표현이 아빠와 보린의 마음을 매우 잘 드러내 준다.

 

편견이 심한 나라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래도 씩씩한 보린이 아빠 곁에 있으니 다행이다. 

 

<헤바>는 평범한 중3 성호가 '팜므파탈' 사촌 누나인 윤이를 짝사랑하는 이야기다. 팜므파탈이라고 해서 단순한 날라리는 아니다. 이런 팜므파탈이라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다.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센터에 교사로 근무하는 윤이 누나는 자신이 바로 학교를 탈출한 인물이었다. 가출과 정학, 그리고는 자퇴 했으며 프랑스, 호주, 캄보디아, 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며 '남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남자만 만들지는 않았겠지. 그 세계에 속한 문화와 역사와 조우했으며 현지 사람들과 교류했을 것이다.

 

센터가 성호의 집 근처라 '자칭 인정이 많은 성호아버지'가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게 윤이 누나를 받아준 것이었다. 윤이 누나는 성호에게 조개껍질과 산호초로 만든 지구본 '헤바'를 선물했다. 독일에 갔을 때 벼룩시장에서 산거라고 하는데, 하고 많은 선물 중 지구본을 택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김어준의 말처럼 '되도록 많은 나라에 똥을 눠 보라'는 게 아니었을까.

 

보잘 것 없는 영화를 함께 봐도 윤이 누나는 기가 막히게 멋진 영화로 해설을 해주었고 '고1 중퇴학력만으로도 기가 죽을 것 같은데, 누나를 보면 그런 기준이 무색'했다고 한다. 누나와 있으면 뭘하든 즐거운 성호는 시나브로 누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춘기 시절에는 한번쯤 사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다.

 

윤이 누나는 해외여행에 돈이 많이 들 필요도 없고, 영어를 잘 할 필요도 없다는 진리를 성호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그녀에게 여행은 삶이고 일상이며 학교란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아등바등 살 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문화 선진국 뿐 아니라 과거에 찬란한 문화를 가졌던 동남아, 태고의 신비가 살아있는 아프리카 등지를 돌아보는 것, 윤이 누나에게는 그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누나와 내가 같은 나라에서 사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누나가 사는 방식에 비하면, 뒷머리가 목을 덮는지 안 덮는지 따위나 감시하는 학교와 외고에 목숨 건 학원을 전전하는 내 생활이 한없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나는 누나처럼 생각하고 누나처럼 행동하고 싶었다. 누나가 준 지구본을 보며 누나를 만난 첫날을 곱씹었다. 너, 성호지? 누나는 한눈에 날 알아보았다.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 170쪽

 

결국 윤이 누나에 대한 짝사랑은 결말 없이 끝나야 했지만 성호는 성숙했을 것이다. 멋진 사촌 누나를 둔 덕분에 다른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멋진 삶에 대한 설계가 일찍부터 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매일 밤 야자에 시달리는 입시생들에게 청량제 같은 소설이 되지 않을까. 머리도 식힐 겸 분량도 적은 이 책을 주위 청소년들에게 선물해보면 어떨까. 봄바람이 살랑 거리는 계절,  마음 한 구석이 헛헛할 아이들에게 말이다.


라일락 피면 - 10대의 선택에 관한 여덟 편의 이야기

최인석 외 지음, 원종찬, 창비(2007)


태그:#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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