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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있는 한 사람, 깨어있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 책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집필한 책으로, 전태일이 가난과 고통스러운 이 땅의 노동현실에서 체념어린 삶을 살던 가운데 노동법에 대해 알게 되고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자신과 동료들이 처한 현실에 분노하면서 투쟁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평화시장 뿐 아니라 이 땅의 노동현장을 고발하는 것 이상이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분신항거로써 암담한 노동현실을 폭로하고 민주적 노동조합의 새로운 출발을 가져다 준 그의 짧은 삶과 투쟁 그리고 죽음을 복원해냈다. 고 조영래씨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와중에 수년간 혼신을 기울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개정판이 나올 때에야 비로소 저자의 이름이 책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피팔이 인생들

 

내가 읽은 책은 2001년에 나온 제2차 개정판이다. 이 책은 전태일의 가난하고 고단한 어린시절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지독한 가난과 불우했던 어린시절은 참담하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일할 무렵 서울 평화시장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보자.

 

"서울 동부지역 청계전 6가에서부터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편집자주)쪽으로 약 600미터 걸쳐 뻗어 있는 3층 연쇄건물이 평화시장이다. 그리고 이 평화시장 건물의 제1동과 제2동 사이, 서울 음악대학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좌우에 동화시장의 5층건물과 통일 상가에 4층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 악취풍기는 청계천 연변에 무허가 판자촌들이 다닥다닥 늘어서서 서울 도심지 일대에 빈민굴을 이루고 있었다."(p.93)

 

이때, 이곳 3개시장과 신평화시장 및 근접 건물들을 합친 작업장의 총수는 약 800개이며,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는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경기가 좋을 때 평화시장 일대에서는 '만들기만 하면 팔린다'는 말이 그대로 통할 정도였으며 추석 대목과 같은 시기에는 갓 생산된 제품을 사가려고 현찰을 들고 기다리는 소매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3개 시장일대의 사업주들은 거의 모두가 아주 적은 자본으로 사업하는 영세업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경기만 좋으면 미싱 서너대 놓고 사업을 시작해도 1,2년 사이에 스무대, 서른 대로 늘어났으며 그 밖에도 땅이나 집을 사는 경우도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화시장 일대의 이러한 번영과 업주들의 치부와는 대조적으로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한마디로 참혹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피복공장 내의 직종은 대체로 재단사, 미싱사, 미싱보조, 재단보조, 시다 등으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들 가운데 '시다'는 대부분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15살의 소녀들이었다. 이들은 선배들인 미싱사나 재단사들처럼 기술을 배워 집안을 도와보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온 어린 소녀들이었다.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가을, 겨울, 봄엔 보통 오전 8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14~15시간동안 일했다.

 

"그들에게는 푸른 하늘을 쳐다 볼 권리도 없고, 오늘을 생각할 시간도 없으며 내일에의 꿈을 키운다는 건방진 여유는 더더구나 없다. 책 한 페이지 볼 시간이 없는 그들,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왜 없으랴만,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그들, 한창 피어나야 할 어린 마음이 나날이 겪는 기업주의 눈총과 쌓이는 생활의 번민에 못 박혀 어둡게 굳어져야만 하는 그들, 세월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은 피로와 권태와 질병뿐인 그들, 평화시장의 여공들에게 내일은 없다. 하루하루 모진 목숨을 이어나가야 하는 숨막히는 노동의 질곡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결국 스스로의 젊음과 소망과 건강과 생명을 그날그날 갉아먹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피팔이(賣血)인생들이다."

 

1960년대, 인간시장의 현장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하루하루의 생명을 팔고 있었다. 그는 매일 자신과 동료노동자들의 참상을 경험하면서도 근본원인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현재의 고통이 그저 주어진 운명이라 받아들이며 열심히만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날이 인생의 종점이겠지.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육체적 고통이 나에게 죽음을 생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더욱 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만 없어도 좋겠다. 미싱 6대에 ‘시다’가 여섯 명. 그 사람들이 할 걸 나 혼자서 다 해주어야 하니. 다른 집 같으면 재단사, 보조, 시아게 잘 하는 사람 3명이 해야 할 일을 나 혼자 하니 정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언제나 이 괴로움이 다 없어지나...(1967년 3월 17일 일기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부당한 현실에 눈을 뜨다

 

그러나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해 비판적인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66년 늦가을이었다. 그가 평화시장에 발을 디딘 지 2년 남짓한 세월이 흐른 뒤였다.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다가 왈칵 토해내었다. 각혈이었다. 태일이 급히 돈을 걷어서 병원에 데려 가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평화시장의 직업병 중의 하나였다. 그 여공은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태일에게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각혈을 한 여공은 평화시장 생활 몇 년에 그 동안 번 돈보다도 더 많은 돈을 들이더라도 고치기 어려운 병만 얻고 거리로 쫓겨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밑지는 생명'이었다."

 

피를 토한 여공이 전태일에게 준 깊은 충격은 그로 하여금 이제까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엄청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죽어가는 저 여공들을 살리자.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갉아 먹 고 삶의 모든 기쁨과 보람을 빼앗아가며, 우리를 비정한 현실의 쓰레기로 만드는 저 잔인한 노동조건을 내 힘으로 바꾸어보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기어이 해보자'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무렵 아버지로부터 노동운동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고 근로기준법 책을 통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킴...을 목적으로'하는 법이라고 그 법 제1조에 적혀 있다. 근로기준법 제42조,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하고 1일 8시간, 1주일에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하여 1주일에 60시간을 한도로 한다"는 규정을 그는 보았다. 전태일은 재단사 동료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 그 후 이름을 '삼동친목회'라고 바꾼 뒤 계속 활동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던 전태일. 그는 현실의 큰 벽 앞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고도 평화시장에서 맑은 공기 한 모금, 햇볕 한 조각 보지 못하는, 2,3일 동안 잠도 자지 못한 채 잠 안 오는 약이나 주사를 맞아가면서 생을 소모하는 밑지는 인생들을 세상에 알리고, 또 살리고 싶었던 것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970년 11월 13일, 그날은 아침부터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마치 그동안 처절하게 몸부림쳐 온 한 젊은이의 죽음을 미리 예감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평화시장 일대에는 출동한 경찰대가 이곳저곳에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긴장감으로 술렁거렸다. 그것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났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 들어온 지 6년, 그 노동지옥의 쇠사슬을 끊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데모'였다.

 

'데모'란 것은 '보여준다', '과시한다'를 뜻하는 영어 '데모스트레이션'의 준말로, 우리말로는 시위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데모란, "'이런데도 네가 말을 안 듣고 배기겠느냐?'라고 윽박지르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데모'란 '상대편에 대한 대항하는 자의 당당한 선전포고이며,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끊임없이,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위협적인 도전을 감행하겠다는 경고'다.

 

전태일은 자기 한 목숨을 바쳐 평화시장내에서 기계처럼 일하다 온갖 병이 들어 죽어가는 시다와 미싱사 등을 보면서 자신의 한 목숨을 불태워 모든 것이 개선될 수 있다면 자기 한 목숨을 버릴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작업환경 개선 등을 비롯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사항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끝내 청년 전태일은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자신을 태우며 참혹하게 변한 몰골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 비록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밖에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것이 아니고는 통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현실을 또한 절감할 수 있다.

 

노동자로서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전태일, 그래서 노동자들의 가난과 아픔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보며 또한 잘 이해했던 전태일, 그는 어릴 때부터 배고픔의 설움과 가난 속에서 자랐고 거기 그 현장에 있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는 인권사각지대에서 그는 '기계가 아닌 인간'임을 모든 노동자들이 눈뜨기를 바람과 동시에, 부당한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많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의 발화점이 되기도 하였다.

 

요즘 사회 곳곳에서는 마치 유행처럼 너무도 빈번하게 개인과 단체가 자기들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시위를 한다. 과연 저들은 무엇을 위해 데모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조건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그들의 이익과 권익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눈살이 찌푸려질 때가 더러 있다.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만 있다면 어떠한 것도 서슴치 않는 것을 본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어린, 혹은 젊은 노동자들인 동료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항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선언'이었다.

 

이 책을 통해 불과 20~30년 전의 우리나라의 사회와 노동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시대적 현실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왔다면 이 책을 통해 너무도 적나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60,70년대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가족, 혹은 자신을 위해 어린 청소년과 청년들이 도시로 나갔다. <전태일 평전>을 통해 그 시대적 아픔과 고통스러웠던 현실, 그 시대의 낮은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을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시대적 아픔을.

 

'긴 공장의 밤/시린 어깨 위로/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드르륵 드득/미싱을 타고 꿈결같은 미싱을 타고/두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시다의 언 손으로/장미삧 꿈을 잘라/이룰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피 흐르는 가죽본에 미싱대에 올린다/끝도 없이 올린다/아직은 시다/미싱대에 오르고 싶다/미싱을 타고/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언 몸뚱아리 감싸 줄/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시다의 꿈-박노해')


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돌베개(2001)


태그:#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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