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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 행 기차에 몸을 싣다

슬슬 남도의 꽃소식이 들려오는 3월의 둘째 주.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전철을 탔다가, 쏟아지는 햇살에 못 이겨 즉흥적으로 봄나들이를 결정하고 만다. 아침부터 내심 영화를 한 편 보고자 했던 나였지만 이 따뜻한 봄볕에 어두침침한 극장을 찾아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영화야 밤에 봐도 되는 것이고, 직장인에게 이런 봄볕을 즐길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미 나의 마음은 서울을 벗어나 있었다.

비록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목적지를 정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타고 있는 전철이 팔당 행인 바, 그냥 끝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전에부터 한 번은 전철을 타고 팔당까지 가보고 싶었던 참이었다.

회기역을 지나 전철에서는 처음 보는 풍경에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는데 드디어 창밖으로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통 이 방향으로의 여행이면 승용차나 버스에 실려 한강을 따라 질주하는 것이 전부였던 내게 그것은 묘한 느낌이었다. 신촌에서 문산까지 탔던 꽃님이 열차와도 비슷한 것이 덜컹덜컹 완행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윽고 도착한 팔당역. 문제는 거기서 부터였다. 역사 주변이 마냥 횡 한 것이었다. 지역 국회의원이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해 전철 개통을 서둘렀대더만, 그만큼 시가지 형성 시간이 모자랐던 건지, 아님 팔당이란 지형 자체가 역사 주변으로 시가지 형성이 힘든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전철에서 함께 내린 승객들의 대부분은 예봉산을 오르는 듯 했지만 등산 생각도, 준비도 전혀 없었던 난 또다시 목적지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호숫가의 고즈넉한 마을 풍경
▲ 정겨운 풍경 호숫가의 고즈넉한 마을 풍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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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갈까? 그러나 고민도 잠시, 난 팔당의 다산 기념관을 떠올렸고 더불어 10년 전 엠티를 기억해 냈다. 비록 팔당으로 엠티를 갔지만 밤 새 술 마시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그때, 그곳에 있던 다산 기념관을 들르지 못한 것이 왜 그리도 안타까웠는지.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머리 위로 쭉쭉 뻗은 자동차 전용도로 대신 강기슭을 따라 굽이굽이 난 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고, 창밖으로는 예전에 볼 수 있었던, 아니 잊고 있었던 정겨운 마을 풍경들이 펼쳐졌다. 그것은 빠른 속도만 추구하는 이 사회가 잊고 있는, 사람 냄새 풀풀 나는 풍경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나의 목가적인 상상은 신문지 한 장을 붙들고 앞에 앉아 있는 노부부에 의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그들은 ‘토지’라고 큼지막이 써져 있는 부동산 광고를 한 손에 꼭 쥐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농사지을 땅을 찾고 있는 건지, 펜션을 짓기 위한 땅을 찾고 있는 건지, 그것도 아님 투기를 위해서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그들은 나의 즐거운 상상을 앗아갔다. 봄을 맞아 파릇파릇 생명이 돋아나고 있는 대지를 보면서 마냥 돈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전국 곳곳에 부는 광풍
▲ 최고의 땅을 찾아서 전국 곳곳에 부는 광풍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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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당에서 서울 가는 길
▲ 철길 팔당에서 서울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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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기념관까지는 걸어야 했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따스한 봄볕이 동행이 되어 주었고 추억이 힘이 되어 주었다. 10년 전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걸었던 그 길, 난 그 길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아직도 그날 밤은 내게 아름다운 20대의 밤으로 기억된다.

길옆으로는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철길이 놓여 있었고,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시골간이역이 서 있었다.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의 화석이었지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저곳에서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부디 개발의 광풍에 파묻혀 그 간이역이 사라지는 일이 없기를.

다산 기념관에서 만난 정약용

길의 끝이 보이는가 싶더니 주변이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기념관이 그곳에 있던 탓이었다. 예전 기억으로는 비교적 호젓한 공간이었건만, 10년이란 시간이 그 모든 걸 바꾸어 놓은 듯 했다. 주말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도시인들의 욕망과 주요 관광 명소를 만들고자 하는 지자체의 욕망. 그 욕망의 만남 속에 각각의 기념관들이 비대해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렇게 기념되고 있음을 정약용 선생은 어떻게 생각할까?
▲ 다산 정약용 동상 그렇게 기념되고 있음을 정약용 선생은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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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기념관은 많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산을 이해하고 있을까? 정작 나부터 그렇듯이 정약용은 개혁을 꿈꾸었던 실학자이며 거중기를 만든 교과서 속 위인으로 기억될 뿐, 그가 꿈꾸었던 세상과 사상 등은 잊혀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헤겔, 니체, 푸코 등등의 사상은 운운하며 정작 이 땅에 살았던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인색한 우리들.

어쨌든 다산은 그래도 나은 편에 속한다. 비록 그 자신은 스스로를 성리학자라고 자처했을 지라도 후예들이 그를 실학자로 분류하고 기념하기 때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성리학과 달리 실용·실리적이고 근대로의 진입 가능성을 열었다고 주장되어지는 실학. 우리가 근대를 시작한 서구에 대해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실학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다산 생가 옆에서 꿍꽝거리며 지어지고 있는 실학박물관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동상까지 지어져 기념되고 있는 다산을 보고 있자니 심사가 복잡해졌다. 다산의 사상은 당시 기득권 노론으로부터 배척될 만큼 개혁적이고 혁명적이었을 텐데, 우리의 역대 정권은 얼마나 개혁적이어서 그를 기념하고 있는 것일까? 오죽하면 5공화국 당시 전두환 대통령도 장서에 목민심서를 꽂아 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이는 우리가 그만큼 다산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그만큼 다산으로부터 혁명성이 거세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혁명성을 잃어버린 체 게바라가 자본주의의 아이콘이 되었듯이, 혁명성을 거세당한 다산은 역대 정권의 개혁의지를 보여주는 적당한 위인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문자로서 아름다운 목민심서와 함께.

'글'이 아닌 '문자'로 대접받는 세태
▲ 장식으로서의 목민심서 '글'이 아닌 '문자'로 대접받는 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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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무엇 때문에 다산을 재조명하는 것일까?
▲ 다산 생가 누가 무엇 때문에 다산을 재조명하는 것일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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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땅에 대대적으로 생가가 보존되고 있는 위인들이 모두 이와 같은 형국인지도 모른다. 당시 그들의 업적과는 상관없이 현재 정권의 필요에 의해 재해석되고 존중되는 위인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안중근 기념관 역시 이와 같은 전철일 것이다. 친일의 면죄부를 받기 위한 세력들의 안중근 흠숭하기.

예전에 다녀왔던 남도의 다산초당을 떠올리며 기념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다산 생가가 자리한 이 지역을 축소한 모형이 눈에 띄었다. 굽이굽이 도는 한강을 끼고 너른 전답을 앞에 둔 채 자리하고 있는 다산 생가.

아마도 모형에서 전답으로 표현하고 있는 땅은 양반 정약용 집안이 가지고 있던 경제력일 것이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산 같은 걸출한 인물이 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무것도 없이 공부를 하리라 결심하고 있는 내게 그 모형은 냉엄한 현실이었다. 

역시 공부는 경제력이 밑받침 되어야 하는 것일까?
▲ 다산의 경제력 역시 공부는 경제력이 밑받침 되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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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 새마을기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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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심사로 기념관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기념관 한편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새마을기가 눈에 들어왔다. 초록색 바탕에 노란 원, 그리고 그 안에 녹색 잎이 그려져 있는, 촌스러움의 대명사 새마을 문장. 예전 같았으면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라며 넘어갔을 텐데 오늘따라 그 새마을기가 결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미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새마을기를 내리지 않았던 것일까? 21세기 버전의 새마을 운동은 곧 시작될까? IT를 죽어라 강조하던 사회가 또다시 삽질을 두고 논란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부디 저 밑에서 막걸리 마시는 사진이 회자되지 않기를 바랄 뿐.

설마하니 “황색원은 협동과 부,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표시하며 녹색의 잎과 싹은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 및 희망과 소득을, 줄기의 밑이 넓은 것은 안정과 번영을 표시”라며 새마을 문장의 의미를 외우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는 않겠지? 학창 시절 새마을 3대 정신 외우기가 왜 그리 힘들었던지.

10년 전 팔당호를 찾아

이만 다산 기념관을 나와 그 앞의 팔당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10년 전 엠티 다음 날 숙취를 깨기 위해 걸었던 길이었다. 그 끝에 신비한 물안개를 간직하고 있었던, 그래서 팔당을 되돌아오게 했던 바로 그 길.

그러나 10년 후의 그 길은 매우 시끄러웠다. 옆에서는 실학박물관을 짓는다고 거대한 기계음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고, 팔당호 바로 옆에는 음식점에서 갓 나온 사람들이 배부른 배를 두드리며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었다. 물론 일요일 오후라서 그랬겠지만, 어쨌든 10년을 간격으로 달라진 풍경은 우리가 살아온 10년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제 기능을 잃어버린 쪽배의 쓸쓸함
▲ 쪽배 제 기능을 잃어버린 쪽배의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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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들은 가고 펜션주만 남은 그곳
▲ 팔당호 어부들은 가고 펜션주만 남은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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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옆 호숫가에 조그마한 쪽배가 떠 있었다. 오랫동안 물에 나가지 않았는지 그 주위는 뻘로 가득 차 있었고 배는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호수에서 더 이상 뱃질을 할 필요가 없는 이가 방치한 배였으리라. 호수를 바라보는 많은 펜션들과 방치되어 있는 쪽배. 이는 결국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호수의 용도가 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였다.

팔당호에서 석양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일요일 오후 팔당에서 서울 가는 길이 오죽 막히는가. 미련을 뒤로 하고 이만 팔당을 나선다. 곧 완공될 으리으리한 실학박물관의 위용도 궁금했지만 역시나 내 기억 속에 팔당 다산 기념관은 10년 전 그 모습으로 남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팔당, #다산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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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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