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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목)은 18대 총선의 선거 운동이 공식 시작되는 날입니다. 더불어 27일은 닷새 마다 몰아오는 정선 장날이기도 합니다. 맑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하늘은 잔뜩 흐렸고, 된바람이 불었습니다. 가끔씩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 눈발로 바뀔 태세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정선의 아침 시간은 조용했습니다. 복잡한 도시와는 달리 정선의 거리는 출근 시간이 되어도 이동하는 차량이 뜸합니다. 선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정선은 후보자를 알리는 유세 차량은 물론이고 현수막이나 어깨띠를 두른 선거 운동원의 모습 또한 발견할 수 없습니다.

 

후보자의 돈 살포는 태풍 '루사'와 '매미'보다 더 큰 상처 남겨

 

정선이 유령의 도시가 된 것일까요. 아니면 선거엔 관심이 사라진 것일까요. 지난 24일(월) 오후 정선에서는 공명선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을 받았던 김택기 후보가 돈을 살포하는 장면이 지역 선관위 단속반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선거 정국을 강타했습니다.

 

방송만 탄 게 아닙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비롯해 각 언론사는 김택기 후보의 '금품 살포' 현장을 톱기사로 연일 내보냈습니다.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정선경찰서엔 취재를 하려는 언론사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수사과장의 휴대폰은 근무 시간은 물론이고 새벽에도 울려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정선이 졸지에 전국에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지만 정선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난지 하루가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뉴스를 접하지 못한 사람은 떠도는 소문을 듣고야 "정말이야?" 하더니 짐작이라도 했다는 듯 "에이, 그 사람 내 그럴 줄 알았어!" 라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습니다.

 

기자도 사건이 일어나던 날 현장 근처에 있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황망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김택기 후보와 선거 관련 인터뷰를 하기 위해 날을 잡았으나 김 후보는 약속을 어겼고, 그 이후 이런 저런 핑계로 만나주지 않더니 결국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선 사람들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모두들 망연한 모습들입니다. 정선 사람들은 지난 2002년과 2003년 연 이어 정선 지역을 휩쓸고 간 태풍 '루사'와 '매미'보다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태풍으로 입은 피해야 복구에 도움을 준 국민이 있었지만 '돈선거'가 가지고 온 후폭풍은 어떤 동정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으로 금배지 사려고 하면 된답니까?

 

날씨가 고르지 않았지만 장터의 술렁거림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둘만 모이면 "국회의원 후보가 돈을 살포하다 걸렸다고 하는구먼"하며 돈 선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기자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내들 틈에 끼어 몇 마디 거들었습니다.

 

"정선에서 그런 일이 생겼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어떠긴 어때요. 드럽지요. 돈이 많다고 해서 돈으로 금배지를 사려고 하면 된답니까? 빨리 걸리길 잘했지, 그렇지 않앴으면 애꿎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범죄자를 맨들었을지 몰래요."

"맞애, 돈 싫다는 사람 어디 있겠어? 뭔 돈인 줄도 모르고 덥썩 받았다가 쇠고랑 차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거여."  

"청돈가 하는 고장에선 몇 천명이나 걸려 동네가 작살났다고 하잖어. 정선도 그럴 뻔 했으니 생각만 해도 몸이 떨리네."

 

사내들은 돈살포한 후보가 빨리 적발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돈 선거로 얼룩진 청도군의 예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에 돈 선거의 진원지가 되어버린 정선에 사는 사람들은 아라리의 고장이 어쩌다 그런 일에 휩싸였는지 안타까워 합니다.

 

흔히 정선은 도시인들에겐 고향 같은 고장입니다. 도시 사람들은 정선이 부산보다 혹은 목포보다도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선이라는 고장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오지라는 것과 정선을 정신적 고향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랬던 정선에 '금품 선거' 파문이 일었으니 정선의 땅과 하늘, 건강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불명예를 단단히 쓰고 있는 셈입니다. 청정지역이 선거로 인해 오염된 고장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니 지역민들로서는 '돈만 밝히는' 사람들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억울함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거 수십 번 한 할머니 "돈이요? 우린 귀경도 못해 봤어요"

 

장터를 돌다 장구경을 나오신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 많은 선거를 치렀을 할머니입니다. 돈 선거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알고 있어요. 테레비에 나오던 걸요."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선거할 때 돈 같은 거 받아 보신적 있으세요?"

"돈이요? 우린 귀경도 못해 봤어요."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십니다. 그러고보면 돈을 주는 사람도 사람 봐가면서 주는 모양입니다. 하긴 마흔 중반인 기자도 군 입대 후 처음 치른 1985년 2월 총선을 시작으로 대선과 지선까지 수 차례 투표를 했지만 돈은커녕 설렁탕 한 그릇 얻어 먹어 본 기억이 없으니 돈 선거라는 말이 남의 일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군부독재가 이어지던 시절만 해도 선거 운동을 했던 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양복 뽑아 입고 군청 건물로 출근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요즘이야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첫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찍었다가 부대 인사계에게 죽도록 맞았던 기억이 있는 기자로서는 아직도 투표하는 순간만큼은 두렵기만 합니다.

 

점심 시간을 넘기자 드디어 유세 차량이 장터에 나타났습니다. 통합민주당 이광재 후보가 선거 유세를 한다고 합니다. 차량에 탑재한 스피커에선 이 후보의 로고송이 울려 퍼집니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선거운동원들은 준비한 율동을 지역민들에게 선보입니다. 음악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듭니다.

 

그러나 날씨 탓인지, 돈 선거 파문이 일었던 때문인지, 유세 현장으로 모이는 이들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정치 혐오증이 정선까지 엄습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드는 순간입니다. 이광재 후보가 연설에 나섰습니다. 길 거리에 만든 유세 현장이라 연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연설 내용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닙니다.

 

이광재 후보는 정선 지역의 발전을 위해 준비한 공약들을 쏟아냅니다. 농가 소득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콩 가공 공장도 만들고, 어르신들을 위해 경로당에 월 50만원씩 지원도 하겠답니다. 잘 살게 해주겠다는 말이 있고야 여기 저기에서 박수가 터져나옵니다.

 

"이 의원 저 사람 운이 참 좋아."

"운이라니?"

"아, 생각해봐. 상대 후보가 돈 뿌리다 사퇴했으니 운이 좋은 게 아닌가?"

"김택기 대타로 최동규씨가 공천을 받았다던데?"

"받으면 뭘해. 정선 이미지를 이 모양으로 망쳐놓은 한나라당을 누가 찍어 주겠어."

"에이, 들어보니 최동규씨 조직도 만만치 않더고 하던 걸?"

"그나저나 돈 선거 한 방에 정선의 이미지를 말아 먹었으니 이걸 어쩌나. 사람들이 정선을 어떻게 보겠어. 그 놈들 때문에 관광객 줄까봐 걱정이네."

 

"이번 일로 정선에 가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날까 겁납니다"

 

이광재 후보가 연설을 하는 중에 두 사내가 대화를 나눕니다. 50대 중반의 시장 상인들입니다. 관광객들이 오지 않으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정선군청 홈페이지에도 그런 걱정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한 주민이 군청 홈피에 올린 내용입니다. 

 

청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청도는 군수 선거 치르고 2명이 음독자살하고 수천 명이 자진 신고하고 벌금을 받았습니다. 네티즌들이 청도를 이름까지 바꾸라 하며 감 구매금지, 소싸움 축제도 가지 말자고 결의한 것이 엊그제인데, 정선 시장약국 앞에서 걸린 게 지금 동영상으로 전국 방송을 타고 인터넷에서 정선 까기가 시작되네요. 정선에 가지말자는 운동이 일어날까 겁납니다. 우리 정선의 모습 부끄럽습니다. - 지역 네티즌의 글

 

정선에 가지말자는 운동이 일어날까 겁나는 게 지금의 정선입니다. 돈 선거 파문의 진원지가 된 정선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정선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사건이 있은 직후 정선 지역의 시민단체인 정선문화연대는 성명서를 내고 한나라당의 사과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정선문화연대는 지난 25일 '한나라당은 정선의 땅과 정선군민에게 무릎끓어 사과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지금 전국의 눈과 귀가 정선아라리의 고장 정선으로 쏠리고 있다. 정선에 살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두려울 정도이다. 고향이 정선이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인 것이다'라고 한탄하며 한나라당에 대해 아래와 같이 3개항을 요구했습니다.

 

▶한나라당은 18대 총선에서 자행한 불법 선거에 대해 정선 땅과 건강한 시민들에게 무릎꿇어 사과하고 이제라도 공명선거에 임할 것 ▶한나라당은 불법과 탈법의 중심으로 만든 정선군과 정선인들의 무너진 자존감과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킬 특단의 대책을 마련할 것 ▶이러한 사항들이 선행되지 않으면 정선인들은 정선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죄를 18대 총선은 물론이고 앞으로 있을 모든 선거에서 엄중하게 물을 것을 천명한다.

 

정치권은 이번에 적발된 돈 선거를 각당의 입 맛에 맞추어 이용하지만 정선 사람들은 먹칠을 어떻게하면 씻어낼까 하는 생각들 뿐입니다. 조용하던 정선 땅에 청천병력 같은 일이 생겼으니 그럴 수 밖에요.

 

이번 18대 총선에서는 3명의 후보가 등록을 했는데요. 강원도내 신문과 방송사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27일 현재 통합민주당 이광재 현의원이 45.4%, 한나라당 최동규 후보 26.2%, 평화통일가정당 김승갑 후보가 1.8%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광재 후보가 20% 가량 앞서고 있지만 후보 등록과 함께 발진을 하고 있는 최동규 후보의 추격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오후가 되자 장터가 또 한 번 술렁거립니다. 이번엔 '평화통일가정당' 선거 유세 차량이 거리를 돌며 울적한 거리의 분위기를 띄웁니다.

 

"가정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섭니다. 평화통일가정당만이 우리의 가정을 지켜줍니다. 평화통일가정당만이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습니다."

 

유세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여성운동원의 카랑카랑한 연설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러나 선거운동원들은 아직 쑥스러운지 고개를 자주 숙입니다. 연설원은 연설 도중 한나라당의 돈 선거에 대한 질타를 빼먹지 않습니다. 평화통일가정당의 김승갑 후보를 찾으니 그는 방송 인터뷰 때문에 다른 지역에 있다고 합니다.

 

정선사람들 "돈 선거 파문 일으킨 한나라당 원망스러워요"

 

선거 운동 첫날인데다 장날임에도 한나라당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총선 후보 등록 마감인 어제 부랴부랴 돈살포의 주역인 김택기 후보 대타로 최동규 후보가 후보 등록을 했으니 유세 차량인들 마련했을까요.

 

어제(26일) 지역 선관위 사무실에서 최동규 후보측 관계자를 만났는데, 유세 차량은커녕 현수막 시안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주당의 이광재 후보와 평화통일가정당의 김승갑 후보가 여의도를 향해 뜀박질을 시작했지만 한나라당 최동규 후보는 아직 뜀박질에 필요한 운동화도 마련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돈 선거 파문을 일으킨 한나라당에 대해 태백.영월.평창.정선 선거구에 후보자를 내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그것은 개인적인 일'로 치부한 채 공천에 탈락했던 최동규씨를 후보로 확정했습니다. 최동규씨에겐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이겠지만 대타 공천을 바라보는 지역민들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은 않습니다.

 

순박한 정선 사람들은 이번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돈 구경 한 번 해보지 못한 이들입니다. 비탈진 밭 일구어 열심히 농사 짓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한 해 농사가 망친다 해도 하늘만 원망하지 세상을 향해 원망 한 번 하지 않고 살아가는 착한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원망합니다. 돈 선거를 한 사람을 공천한 한나라당을, 돈 선거를 주도한 사람과 받은 사람을, 상처 입은 정선 사람들에게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한나라당을 원망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여러분, 정신 나간 어떤 사람이 돈을 살포했다고는 하나 우린 그 돈 구경도 못했습니다. 아름답기만 한 정선의 땅과 하늘, 그리고 정선에 살고 있는 착한 우릴 죄인으로 몰지 말아 주세요. 부탁입니다."   

 

마냥 죄인처럼 살 수 없기에, 언제까지 부끄럽게 살 수 없기에, 착하고 순박한 정선 사람들은 오늘도 희망의 끈 부여잡고 힘겨운 일상을 이어갑니다. 

 


태그:#돈선거, #정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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