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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확실하게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면, 조선왕조는 분명히 '사대부 중심 신분질서'를 매개로, 시대 변화마저도 거부하면서 민중을 수탈한 왕조라는 사실이다.

'시대 변화'에 대한 거부가 결국 일제의 폭압적인 36년 통치를 불러왔다는 측면도 강하다. '소현세자가 왕위를 이었다면'이나 '정조가 영남 남인이 아닌 부르주아 상인계층과 손을 잡아 노론 일당 독재 청산에 성공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

만일, 일제시대가 오지 않았더라면 '조선왕조'는 어떻게 됐을까?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민중혁명이 일어나 조선왕조를 무너뜨렸을까? 그게 아니라면, 조선왕조와 신분질서가 여전히 유지돼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말들이 버젓이 통하는 사회가 우리의 현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뉴라이트'는 이 틈을 파고든다. 조선왕조의 운명이 우리 조상들의 손에 의해 직접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외세인 일본에 의해 문을 닫으면서 일어나는 악순환이다. 그 '뉴라이트'가 기어이 대안역사교과서라고 주장하는 <한국 근·현대사>를 출간했다고 한다.

<한국 근·현대사>, 내용은 어차피 뻔하다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이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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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공개된 <한국 근·현대사>의 대강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갑신정변(1884)-"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는 청에 대한 조공과 문벌 폐지 등을 시도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

2. 동학농민혁명-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나 횡포한 부호 처벌, 노비 문서 소각 등의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유교적인 근왕주의에 입각하여 서민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복고적 운동"

3. 일제 식민 통치-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체제였다. 하지만 이 시기가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토지 재산에 대한 증명제도가 완비돼 토지거래가 활성화됐고, 근대적인 사유재산제도가 성립됐으며 조선총독부의 민사령을 통해 공식적인 신분제가 폐지됐다."

4. 이승만 전 대통령- "비타협적 반공주의는 인권이 부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5.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 "공산주의 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한 선택"

6. 박정희 전 대통령 -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민족의 사대주의, 자주정신의 결여, 게으름, 명예심의 결여를 증오했고 민중의 고난과 가난에 근원적으로 분노했다.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데 소수 엘리트의 지도적 역할을 중시한 인물"

7. 5·16 군사쿠데타와 10월 유신체제 - "5·16은 군사쿠데타이며 10월 유신체제는 '또 한 차례의 정변', 5·16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은 한국인의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5·16 쿠데타는 근대화혁명의 출발점이며,10월 유신체제는 절대 권력을 성립시킨 체제였지만 행정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해 자주국방과 중화학공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2006년 11월 19일에 '교과서포럼'이 공개한 초안에서 특히 일제 식민 통치와 관련된 부분을 다시 살펴보자.

"망할 운명에 처해 있던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를 거치며 '근대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한국 사회는 건국과 산업화를 거치며 비로소 선진화 대열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제 잔재 청산 목소리는 '민족주의 과잉'이며, 식민지기를 암흑기와 단절기로 보는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면면히 이어온 조국 근대화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인해야 한다."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의 기고문 중 일부도 살펴봐야 한다.

"해방 후에도 일제 때의 근대문명을 소중히 보존하고 발전시킨 우리는 일제가 제정한 모든 법률과 기구를 폐기함으로써 곧바로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고 만 북한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들은 2006년 11월 29일 당시에 '자학사관'이라는 표현까지 활용했다. '자학사관'은 후소샤 역사교과서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일본 극우세력의 전매특허다. 분명히 2006년 11월 29일에 비해 표현상으로는 후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후소샤 역사교과서와 같이 극단의 묘사를 내세웠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판박이, 왜 굳이 새로 만들었나

일본에서 출간된 김완섭씨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
 일본에서 출간된 김완섭씨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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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들이 본질적으로 내세운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리고 '대안교과서'를 주도한 이영훈 교수의 발언 및 기고문을 잘 살펴보면, 식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이미 2002년에, 그 유명한 '창녀론'으로 PC통신과 인터넷을 격화시킨 김완섭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에 그대로 나와 있다. 2편에 걸쳐 출간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내용을 간단히 돌아보도록 하자.

1. <친일파를 위한 변명>은 조선과 일본의 혁명가인 김옥균과 이토 히로부미에게 헌정됐다.

2. 김옥균과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명성황후(김완섭의 표현은 '민비'이며 암살 배후라고 주장) 및 안중근 등은 '민족의 원수'로 규정했다.

3.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회를 문명개화시키는 일은 그 어떤 가치보다 앞서는 최우선 과제로써, 민족주의나 독립지상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미개했던 조선 사회를 문명개화시킬 수 있다면 그 어떤 악덕도 선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한 조선총독부는 우리 민족의 은인이며, 일본은 조선의 어버이 자격이 충분하다.

4. 그런 점에서 볼 때, 조선이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미개한 국가가 됐을 것이기에, 일본과 손을 잡고 문명개화를 추진한 친일파들이 옳았다. 독립운동가 집단은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회주의 집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조선왕조'가 당시 조선 민중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김완섭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 그리고 '뉴라이트'의 '문명개화론' 및 '근대화론'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식민 수탈'이라는 그네들의 필요에 의해 구축된 '근대화 기반'을 '조선의 축복'이나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라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정말로 일어났어야 하는 혁명은 '뉴라이트'의 주장대로 5·16이 아니라 조선왕조를 스스로 붕괴시키는 민중 혁명이었어야 했다. 최소한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왕실의 정치적 권한을 박탈하는 수순을 밟기만 했어도, 저런 궤변을 봐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러한 역사의 아쉬움을 비집고 들어가 표현을 다소 순화시켰을 뿐인 '대안교과서', 실상은 김완섭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전혀 다를게 없다. 굳이 새로 만들어 파장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그저,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교과서 검증을 위해 제시하면 됐을텐데, 뭐하러 저런 기회비용 낭비를 초래했는지 궁금하다.

'뉴라이트'가 반드시 제시해야 할 견해

"일본군은 오랫동안 아시아 각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서구의 세력을 몰아내고 도저히 백인을 이길 수는 없다고 체념하고 있던 아시아 민족에게 경이로운 감동과 자신을 주었습니다." -후소샤 일본 역사교과서 제5장 2절

이영훈 교수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누린 계기는, '정신대 발언'이다. 이영훈 교수의 당시 발언을 돌아보자.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

'정신대'에 대한 김완섭의 지론도 짚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여성은 남성의 성욕을 배설하는 수단이 됨으로써 생을 편안히 살 수 있다. 그러므로 피지배자는 지배당함을 은혜로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 조선은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약소국으로서 발전이 없어 더욱 굶주렸을 것이다."

내가 후소샤 일본 역사교과서의 일부 구문을 거론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8·15 광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는 '태평양 전쟁', 그리고 그속에서 일어난 전쟁범죄에 대한 입장을 반드시 '대안교과서'에서도 거론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이영훈 교수가 2년 전에 이미 전국 공중파 방송에서 크게 거론한 바 있다. 하지만, 명색이 '교과서'를 편찬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자신의 입장에 대해 보다 명확하고 당당하게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영훈 교수,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는 주장을 '대안교과서'에도 반드시 추가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씀드리고 싶다.

총선에 출마한 신지호씨도 마찬가지다. 신지호씨가 2006년 11월 당시에 주도했던 '뉴라이트닷컴'은 자유주의연대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저자와의 만남'이라는 이영훈 교수의 공개강좌를 개최한 적이 있다.

신지호씨는 '도봉갑' 주민들을 향해서도 "정신대는 일제가 강제동원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상업적 매춘이자 공창제였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곧 죽어도 신념은 이야기하는 것, 그게 바로 학자와 정치인의 공통점이 아니던가.

배울게 없어서 일본 극우의 못된 점을 골라배워 그 표현까지 그대로 베껴다가 어린 학생들을 호도하려는 '뉴라이트', 당신들이 그토록 지지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오히려 욕먹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모르겠다. 가뜩이나 '삼일절'에 "언제까지나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관계까지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해 비판을 자초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던가.

'이명박과 보수'를 돕기 위해 그런 주장을 했다면, 당신들은 되돌릴 수 없는 패착을 저질렀다. 아이들이 일본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니까 배울 것도 안배운 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는 아이들에게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일만 남았다. 일본에 당한 일만큼은 죽었다 깨도 잊을 수 없는 한국인을 너무 쉽게 본 후유증, 이제 단단히 겪게 될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대안교과서, #이영훈, #뉴라이트, #신지호,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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