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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보셨어요? 예, 예. 저는 뭐 이미 발표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당이 스타트하는데 시끄러워서요."

 

23일 저녁 7시 30분경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기자실.

 

기자들과 소파에 앉아 간담회를 하던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에게 깍듯한 예를 갖춰 대답했다.

 

대화 상대는 다름 아닌 이명박 대통령. 이 대통령이 강 대표의 불출마 소식에 "25일 주례회동이 있으니 그 때 다시 얘기하자"며 대표를 만류해보려고 했지만, 강 대표는 "모레는 이미 다른 사람을 구해서 등록해야 한다, 당이 어수선하니 누군가 정돈해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강 대표는 "대통령도 '내 팔다리가 다 잘려 속상하다'고 하더라"며 "대통령이 '공천은 공심위에서 했는데 대표가 왜 혼자 책임지려고 하냐'고 하더라"고 전했다. 공천을 둘러싼 잡음이 자신의 사퇴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걸 대통령의 언명을 소개함으로써 다시 한 번 강조한 셈이다.

 

불출마는 전가의 보도? 그의 화려한 마무리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계 후보들의 연이은 기자회견으로 인해 한나라당이 하루종일 어수선한 날이었지만,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강 대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당내 분란의 해소 전망을 묻는 질문에도 그는 "대표가 불출마하겠다는데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어디 있냐?" "대표가 그만뒀으니 다 해결된 것이다"라고 답하는 등 자신의 불출마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국회에 들어온 강 대표는 이번 불출마 선언으로 의정생활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같은 시기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박희태·김덕룡 의원이 예상 밖의 공천 탈락으로 허무하게 정치권의 뒷무대로 밀려난 것을 생각하면, 그 나름대로 '화려한 마무리'를 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과 여당 견제론의 부상으로 인해 한나라당의 총선 과반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당 대표가 기득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권 공천을 내던진 것에도 호의적인 여론을 기대해볼 만하다.

 

한나라당이 총선에 내놓을 '간판스타'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살신성인'을 부각시킴으로써 견제론의 파고를 넘을 심산이다. 강 대표는 "만약 총선에서 과반을 확보 못하면 대표의 책임"이라며 과반수 확보에 정치적 명운을 걸었다.

 

그러나 강 대표의 불출마 선언이 다소 '생뚱맞은 이벤트'로 비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이명박계 후보들이 '강재섭 불출마'가 아니라 '이상득 불출마'를요구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강 대표는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거취에 대해 "공심위가 결정했으니 따라야 한다. 대통령이 이상득 국회의원을 시켜준 게 아니지 않냐"고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당을 이끌 원로그룹이 대거 퇴진한 가운데 노·장·청의 조화를 위해서라도 이 부의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했다.

 

'5선 동기' 이상득의 미래는

 

그러나 강 대표가 불출마 선언으로 이 부의장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든 것은 정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강 대표를 비롯해 이상득 부의장, 김덕룡·박희태·정몽준 의원은 1988년 총선에서 나란히 국회에 들어온 '5선 동기생'들이다. 이중 김덕룡·박희태 의원이 공천 탈락한 가운데 강 대표까지 불출마하면 당내 5선 의원은 이 부의장과 정 의원 둘만 남게 된다.

 

줄곧 무소속으로 있다가 당에 들어온 정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 울산을 떠나 서울에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강 대표까지 대구 공천을 포기한 마당에 이 부의장만 한나라당 텃밭인 경북 포항에 남아 정치 생명을 부지한다는 비판에 봉착하게 된 셈이다.

 

강 대표가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 "이 부의장이 자신의 경험을 국가를 위해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그런 분이 3부요인으로 국회의장 이런 걸 할 수는 없다"고 '이상득 국회의장 불가론'을 넌지시 내비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한나라당의 '5선 그룹'에서 이 부의장이 국회의장을 맡지 못하게 되면 여당 몫의 국회의장 자리는 차기 총선에서 당선이 유력한 김형오 의원(4선)의 몫이 될 공산이 크다. 강 대표의 발언은 이 부의장을 옹호하면서도 그의 정치적 활로를 제어했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셈이다.

 

강 대표가 "대통령직인수위에서 책임 있는 직위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공천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것도 '파격'으로 다가온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뢰를 받는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비례대표 상위순번으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뜻에 거스르는 발언을 서슴없이 한 셈이기 때문이다. 당내 소장파들이 '인수위 책임론'을 들어 청와대와 당 지도부의 사과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강 대표도 이들과 뜻을 같이 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청와대의 대응이 주목된다.

 

'기득권을 내던진 당 대표'로 새롭게 자리매김되는 상황에서 당장 25일로 다가온 대통령과의 주례회동에서도 과거와 다른 대접을 받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그리고, 대권의 꿈은 계속 된다

 

강 대표는 2007년 대선 레이스에 잠시 뛰어들었다가 이명박·박근혜 '빅2'의 위세에 눌려  꿈을 접고 당 대표로 변신했다. 그러나 강 대표의 대권 도전이 '1회성 해프닝'으로 끝날 것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강 대표가 2003년 병역면제 처분을 받은 아들을 해군에 자원입대시킨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아들들의 병역문제로 낙마한 것을 본 뒤 강 대표가 아들과 상의해 그같은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그의 측근들도 "너무도 철두철미한 행동에 놀랐다"는 말이 나왔다.

 

2006년 대표 취임 이래 양대 계파에 시달렸던 강 대표는 18대 총선을 맞아 마침내 자신의 정치를 할 기회를 다시 맞이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웅지를 펼 기회가 주어질 지는 '총선 과반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그:#강재섭, #이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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