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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이른 아침, 송림동 성당에 예비자교리 공부를 하러 가는 길에 송림초등학교 옆으로 난 샛골목인 '미나리길'로 걸어서 찾아갑니다. 우리 동네에 사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거의 모두는 이 '미나리길'을 걸어서 성당 나들이를 합니다.

 

왜 '미나리길'인가 하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는데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자취를 찾아볼 수 없지만, 지난날에는 미나리를 잔뜩 심거나 얻을 수 있던 곳이었기에 이 이름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지금 같은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깔린 길이 아니라 흙길이었을 때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었을 때는 미나리꽝이 있었는지 모르고요.

 

미나리길 한켠에는 '팔구사 부동산'이 있습니다. 아침 낮 저녁 밤에 이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살며시 들여다볼라치면, 이 부동산 집이 문을 열었나 닫았나 알 길이 없습니다. 간판만 그대로 걸어 놓고 있지는 않을 듯한데. 동네 사랑방처럼 이곳 송림동 분들이 찾아가는 부동산인가 싶기도 하고. 딱히 집옮길 일이 없으니 부동산 집을 찾아갈 일이 없어서 소식은 모르겠습니다.

 

팔구사 부동산을 끼고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이 길은 사람만 오갈 수 있어서 한결 고즈넉합니다. 창문마다 쇠로 창살을 만들어 붙여놓기도 하는데, 이 창살은 하나같이 스물, 또는 서른, 또는 마흔 해쯤은 묵어서, 어른이 '욱'하고 힘주어 잡아당기면 부스스 뜯어질 듯합니다. 어쩌면 힘을 그리 안 주고 잡아당겨도 뜯길지 몰라요.

 

골목을 걸으며 가만히 살펴보면, 창문 쇠창살은 다 다릅니다. 무늬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쇠창살을 달아 붙인 햇수가 다 다를지 모르겠어요.

 

미나리길을 빠져나갈 즈음 구멍가게가 하나 있고, 이 앞으로는 차가 제법 다닙니다.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골목을 지날 때와 자동차도 지날 수 있는 골목을 지날 때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사람만 지날 수 있는 골목에서는 걸음을 멈추고 창문 쇠창살도 구경하고, 옥상 빨래널개도 올려다보며, 집집마다 다른 굴뚝도 살펴보고, 대문 옆에 마련되어 있는 뒷간 창문도 바라봅니다. 하얀 담벽에는 때때로 낙서가 되어 있고, 이 낙서가 지워졌다가 다시 그려집니다. 골목길 바닥에는 아이들이 분필로 그려놓은 놀이 자국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어느 사이 이렇게 금을 그어 놓고 놀았을까 하면서 놀이판 앞에 쭈그려 앉습니다. 저 어릴 적에, 학교에서 몽당분필을 몰래 들고 나와서 길바닥에 금을 그으며 놀았습니다. 아스팔트길에서는 분필이 아닌 돌멩이로 직직직 금을 그어도 자국이 났습니다. 지난날 우리들이나 오늘날 아이들이나, 골목에 차가 다니지 않으면 얼마든지 놀 수 있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놀 수 있습니다. 배고픔을 잊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채 놉니다. 이러다가 해가 지면 덜커덕 두려워집니다. 여태껏 집에 안 들어가고 놀기만 했으니, 집에 들어가면 구두주걱이 춤을 추지 않을까 싶어서.

 

살금살금 고양이걸음으로 문을 빼꼼 열고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면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조용히 들어가서 숙제하는 척, 공부하는 척을 해도 번번이 들통이 나서 엉덩이가 후끈 달아오르도록 얻어맞습니다. 그래도 저녁을 먹고 나서는 엉덩이 아픔을 떨쳐내고는 밖으로 뛰쳐나와 술래잡기를 했으니.

 

성당 앞문이 있으나 으레 뒷문으로 들어갑니다. 뒷문으로 가는 골목이 훨씬 가까우니 이리로 가는데, 집으로 돌아가 때 뒷문으로 다시 가기도 하지만, 앞문으로 나와서 오른편 언덕길로 가기도 합니다. 오른편으로 빠져서 걸으면 다시 오른편으로 죽 골목집이 이어집니다.

 

이쪽에 솔빛주공아파트를 짓는다면서 확 쓸어내고 남은 자리에는 아직도 골목집이 찬찬히 모여 있습니다. 계단과 살짝 비알진 길이 이어진 골목집들. 이 골목길로 들어서서 배다리 쇠뿔고개를 내려다보면 동네가 훤하게 보입니다. 눈앞이 탁 트이니 마음도 트이는 듯합니다. 높직한 아파트에 사는 분들은, 남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볼 수 있어서, 그 느낌을 좋아할까요?

 

한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서대문구 냉천동에 보금자리를 틀까 싶은 적이 있는데, 냉천동 언덕집에서 내려다보면 광화문께까지 훤히 보여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치 좋은 곳까지는 짐차가 올라갈 수 없었어요. 비알이 얼마나 져 있든지. 제 살림은 오로지 책인데, 책을 가득 실은 짐차는 이만한 비알을 견딜 수 없기에 그곳 냉천동 산비탈 벼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듯이 자리잡고 있던 집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오며 집과 집 사이에 퍽 우람하게 솟아오른 나무를 봅니다. 이제까지도 잘 남아 있는 나무 전봇대를 봅니다. 나무 전봇대 몸통에 박힌 쪽패 하나가 멋집니다. 추운 겨울날은 안쪽에 얌전하게 서 있는 꼬마 자전거는 바야흐로 다가온 따순 봄날은 쉴 틈 없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려나요.

 

어른 한쪽 손 크기만 한 앙증맞은 나무 솟대가 문위 작은 난간에 살짝 얹힌 골목집을 에돌아 나옵니다. 지난 가으내까지 제 키보다 조금 크게 자라서 함박만한 꽃을 보여주었던 해바라기 옆을 지납니다. 올해에도 다시 해바라기꽃을 보여줄 수 있을 테지요. 이곳이 이대로 지켜질 수 있다면, 재개발이나 재생사업이라는 삽날에 찢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목요일 아침. 날마다 새삼스러우면서 물씬물씬 느껴지는 봄기운을 맡으며 길을 걷습니다. 아침에 막 해 놓은 밥을 도시락에 담아서 초등학교 앞 분식집으로 갑니다. 떡볶기와 순대가 먹고 싶다는 옆지기와 함께, '올해로 백한 살이 된' 창영초등학교 앞으로 갑니다. 일찍 공부를 마친 낮은 학년 아이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서 집으로 갑니다.

 

우리는 분식집으로 들어가서 떡볶이와 순대와 소시지를 시킵니다. 여기에 슬러시 하나까지 하니 4300원. 떡볶이 한 그릇은 지난해와 다름없이 1000원인데, 소시지는 100원이 올라서 900원. 100원 더 올려서 1000원을 받아도 괜찮을 텐데, 아주머니는 굳이 900원만 받습니다.

 

어린아이 입맛에 맞추어 맵지 않고 지나치게 달지도 않은 떡볶이는 제 입에 살살 감깁니다. 부드러운 떡볶이, 맛깔스러운 떡볶이. 요즈음은 어디를 가나 너무 맵고 너무 달고 너무 자극이 센 떡볶이만 구경할 수 있습니다만, 집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에 이런 좋은 분식집이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요.

 

든든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밥값을 치릅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서 골목을 다시 걷습니다.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동네 주민들이 세워 놓은 천막농성터로 갑니다. 바람도 고요하여 천막 안은 아주 포근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우리 동네(학교) 맛집> 응모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헌책방+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인천 배다리 골목집 한복판을 꿰뚫으려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사람들 모임(http://cafe.naver.com/vaedari)이 있습니다.


태그:#골목길, #인천, #배다리, #산업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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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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