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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들머리 풍경.
 백련암 들머리 풍경.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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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애에서 처음으로 본 스님은 누구였을까. 어릴 적, 일 년에 두어 차례쯤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자고 가는 스님이 계셨다. 무등산 안양사 중이라 했다. 바가지같이 생긴 모자 속에는 빡빡 깎은 머리가 숨어 있었다. 아이들은 스님의 뒤를 쫓아가며 "중중 까까중. 햇빛은 쨍쨍, 대머리는 반짝' 하고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 놀렸지만 스님은 결코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무등산 안양사 스님이라 했다, 안양사는 무등산 어디쯤 있을까. 어느 봉우리 아래에 있을까. 스님이 사는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내가 안양사를 직접 찾아가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소풍 때였다. 나보다 두 학년 위인 고모에게서 안양사 위치를 미리 알아두었다.

다른 아이들이 원효계곡에서 보물찾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난 안양사에 다녀오려고 뛰다시피 산을 올라갔다. 안양사는 의상봉 중턱에 있었다. 굴 속에 들어앉은 집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굴속에다 집을 지었을까. 신기했다. 집도 신기했고, 그 속에서 사는 스님도 신기했다. 안쪽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보물찾기 시간이 끝나기 전에 돌아와야 했으므로 얼른 등을 돌려세우고 말았다.

내게 중이란 토굴 속에서 사는 사람

일주문 바깥 풍경.
 일주문 바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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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내게 중이란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토굴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박쥐도 아닌 사람이 토굴 속에서 산다는 건 신비인 동시에 외경이었다. 그러나 그뿐. 토굴에 대한 기억은 기억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토굴에 대한 신령스러움과 외경을 되살려 주신 분은 성철 스님(1912~1993)이었다.

1947년, 성철 스님이 청담·자운·우봉 스님등과 함께 했던 봉암사 결사. '부처님 법답게 살자'라는 기치 아래 모여 공주규약(共住規約)까지 정해놓고 목숨을 건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당시는 전국의 거의 모든 절을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있던 때였으며, 한국 불교의 전통은 일제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시기였다. 봉암사 결사는 쓰러져 가는 승가를 일으켜 세우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봉암사 이후에도 성철 스님은 결코 수행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특히 고성 안정사 천제굴에서의 용맹정진은 유명하다. 사람의 접근을 막으려고 토굴 주위에 가시철망을 쳤던 이야기,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길목 쪽으로 돌을 굴렸다는 이야기 등등. 1980년대, 성철 스님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돼 주기도 했다.

성철 스님이 입적하신 지, 십오년. 이제야 성철 스님께서 오랫동안 주석하셨던 백련암을 찾아간다. 2개의 기둥 위에 우진각 지붕을 올린 일주문을 통해 백련암에 발길을 들여 놓는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정념당이라는 건물이 나그네를 맞는다. 현재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아아, 이곳이 지정 성철 스님이 계시던 백련암이런가.

김동리 소설 <여수>속에도 나오는 백련암

일주문 근처에서 바라본 백련암.
 일주문 근처에서 바라본 백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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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전경.
 백련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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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이 언제 창건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1605년(선조 38년)에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소암 스님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성철스님께서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하셨던 친근한 절이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서정주, 김동리가 불교사상을 공부하며 문학수업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곳에서 불교사상을 터득하고 그들의 현실도피적인 낭만주의를 길렀다.

그 사실은 김동리가 쓴 <여수>라는 소설 속에도 언급돼 있다. '나'라는 주인공은 백련암에 계시는 청뢰 선사에게 들렀다가 뜻밖에도 <쌍려분후지>라는 진기한 책을 얻는다. 그러나 그 책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후 '나'는 기억에 의존해 그 책을 내용을 세상에 공개한다. 회상하는 식으로 쓴 액자소설이다.

백련암은 오기 전에 내가 혼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전각도 많아 어리둥절하다. 이 암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살펴보니, 왼쪽 산기슭이 눈에 들어온다. 갖가지 형상의 바위들이 병풍처럼 에워싼 자리. 커다란 전각 뒤편으로 난 길을 해서 그 기슭으로 올라간다. 이곳에 올라오니, 비로소 백련암의 면목이 한눈에 내려보인다. 암자 바깥으로 둘러친 담장의 곡선이 매우 아름답다.

적광전(상)과 관음전(하).
 적광전(상)과 관음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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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전 앞 마당에 서 있는 불면석.
 원통전 앞 마당에 서 있는 불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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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슭을 내려와, 바로 아래에있는 적광전에 들린다. 백련암의 주불전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오색단청은 하지 않았다. 살아 계실 적에, 성철 스님께선 "내 집은 단청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백련암의 전각들은 죄다 색(色)이 칠해져 있지 않다. 무채색이다. 그래서 건물들은 단지 제 그림자로써 자신을 치장할 뿐이다. 적광전 안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을 모셨으며 좌우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시지 않았는데 왜 적광전이라 이름 붙인 것일까.

앞마당에 마치 선돌처럼 서 있는 바위를 향해 간다. 원통전 앞에 있는 이 바위는 마치 부처님 얼굴과 같다고 하여 '불면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난 아무리 쳐다봐도 도무지 부처님 얼굴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암반 위에 물구나무 서듯 서 있는 납작한 바위가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자세로 넘어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을까. '불면석'까지는 아닐지라도 도통한 바위임에는 틀림없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고심원(좌)과 원통전(우).
 고심원(좌)과 원통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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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형상을 한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샘물 한 모금을 마신다. 고심원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로 가려고 옆 계단을 오른다.  무채색을 넘어 유난히 검게 옻칠이 된 특이한 전각. 안으로 들어가자, 주장자를 든 성철스님의 전신 좌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각가 강대철씨가 조성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조사의 신체를 그대로 쓰는 육신 보살상을 흔히 볼 수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법당에 스님의 조상을 모시는 건 매우 낯선 일이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희랑 대사의 예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원래 이 건물은 성철 스님이 보관하시던 여러 나라의 진귀한 불경과 책들을 보관하려고 지었던 전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심원(古心院)이란 당호가 붙은 것이다.

당호는 스님께서 생전에 손수 지으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스님께선 문이 채 달리기 전에 그만 입적하시고 말았다. 고심원 기둥에는 성철 스님의 열반송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

生平欺狂男女群 (생평기광남녀군)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彌天罪業過須彌 (미천죄업과수미)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산 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고심원 왼쪽 처마 끝에서 올려다 보면 영자당이라는 작은 맞배지붕 건물 있다. 원래는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하던 곳인데 현재는 스님들의 토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전각이다. 아쉽게도 영자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출입금지' 돼 있다.

계단을 내려와 마당 왼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원통전이 있다.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적광전 밑에 관음전이 따로 있다. 1687년(숙종 13) 환적 스님이 지은 것인데 응해 스님이 한 차례 중건했다고 한다. 백련암에서 그나마 옛 가람의 향기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원통전과 나반존자를 모신 천태전, 그리고 영자전이 아닐까 싶다.

 한평생 산문을 떠나지 않으셨던 성철 스님

염화실과 좌선실.
 염화실과 좌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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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심원을 중심에 두고 봤을 때, 왼쪽에 있는 'ㄱ' 자형 건물이 염화실과 좌선실이다. 동향하고 있는 염화실은 거동이 불편하신 성철 스님을 모시려고 지은 건물이다. 연만하신 스님이 문턱을 넘어서기조차 힘들어 하시자 공사 끝에 문턱까지 없앴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성철 스님께선 단 한 차례 이곳에 들어와 앉아 보시고 입적하셨다고 한다.

성철 스님(1912~1993)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한 후 해인사로 출가하여 하동산 스님 밑에서 득도하였다. 이후 10년간 금강산의 마하연선원 등 여러 선방을 두루 거치면서 안거하셨다.  음식은 주로 생식과 현미밥과 담식을 드시면서 용맹정진을 거듭하셨다. 파계사에서 행한 장좌불와 8년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선종의 정통법맥을 이으신 스님이지만, <선림고경총서> 시리즈 등 많은 저술을 남기셨다. 특히 81년에 내신 <선문정로>라는 책에선 보조 지눌 이래 8백년 간 점수사상에 물들어 있는 선문의 병폐를 지적했다.  7c 중국의 화엄학자였던 청량징관(淸凉澄觀)이 자신의 스승 혜원을 이단으로 몰면서 했다는 "몹쓸 나무가 뜰 안에 돋아났으니 베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을 인용할 정도로 통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성철 스님께선 보조 지눌이 내세웠던 돈오점수(頓悟漸修) 대신 돈오돈수 (頓悟頓修) 사상을 전면에 내세우셨다. 돈오돈수란 '단박에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돈오점수란 '깨달은 뒤에도 점차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같이 불교 사상에 끈이 짧은 사람이 무얼 알까마는, 그래도 돈오점수는 나태함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생각쯤은 해 볼 수 있다. 벽력같이 깨치는 것이 아니라 슬슬 닦다가 언젠가 깨달으면 될 것 아닌가. 돈오점수에는 절실함이나 투철함이 묻어있지 않다.

전두환 정권 시절, 하도 권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종정을 맡아 조계종을 이끌던 스님은 마침내 1993년 육신의 껍질을 벗어버리시고 적멸에 드셨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상좌들에게 "참선 잘해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라는 스님의 열반송의 첫 구절을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스님 같은 위대한 영혼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마는 나는 그 구절을 이렇게 의역한다. 내 말에 속지 마라.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이미지에 불과하니까. 너 자신을 속이지 마라. 정직하지 않으면 너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없으니까.

스님이 무리를 속이신 것일까. 스님은 "내 말에 속지 마라"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지만, 속은 것은 어리석은 대중일 뿐이다. 스님께선 그마저도 미안했던지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라고 덧붙이셨던 것이다.

좌선실 기둥에 걸린 목탁.
 좌선실 기둥에 걸린 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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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향하고 있는 좌선실은 성철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계시던 곳이다. 생각해보면 물질이 극성을 부리는 시대에 스님께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스님이 던진 대갈일성 한 마디에, '할' 죽비 한 방에 타락을 향해 질주하던 세상은 질주하던 걸음을 멈칫거렸던 거이다.

시대와 불화를 이겨내지 못해 은둔이라는 극단적인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최치원. 친형인 현준스님이 머물고 있던 해인사로 몸을 숨긴 채  은둔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입산시(入山詩)를 남겼다.

僧呼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스님이여, 청산 좋다 말하지 마오
山好何事更出山(산호하사갱출산) 산 좋다면 무슨 일로 다시 산 밖으로 나옵니까
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시험삼아 후일에 내 종적을 보시오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다

천 년도 더 세월이 지난 뒤, 이 땅에 오신 성철 스님 역시 일평생 산문을 떠나지 않으셨다. 산문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뭇사람들이 우러르는 산이 되셨다. 그토록 큰 영혼이 떠나간 뒷자리. 오늘, 스님의 등 뒤에 남기신 가야산 자락은 적막하다. 커다란 전각들은 적막을 이불 삼아 누웠다.

스님이 좌선하던 방 앞 기둥에는 목탁 하나 걸려 있다. 청천벽력같은 몇 마디 법어로 혼곤히 잠든 시대를 흔들어 깨우시던 스님은 어디로 가셨나. 저렇게 목탁 하나 남기신 채. 이제는 저 세상 어느 토굴에 앉아 정진하시면서 다음 생을 준비하시는가. 이제 누가 저 목탁을 두드려 그 소리로 비틀거리는 세상에 경종을 울릴꺼나.

 뒤꼍에 쌓아둔 장작더미에도 스님의 가르침이...

정념당 뒤꼍에 쌓아둔 장작.
 정념당 뒤꼍에 쌓아둔 장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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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을 나서다 정념당 뒤꼍, 일주문 안에 쌓아둔 장작더미에 시선이 닿는다. 나이 일흔이 되실 때까지도 손수 양말을 기워 신었다는 성철 스님. 한겨울에도 지나치게 땔감을 때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으셨다는 스님. 평생을 바루 하나, 납의 한 벌로 전형적인 수도자의 삶을 보이셨던 스님.

난 성철 스님이 입적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리탑과 동상을 세우는 등 법석을 떠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모든 것이 스님의 삶에 역행되는 행위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보기엔 그것 역시 물질에 대한 집착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리의 개수는 세어서 어디에 쓰려는가.

불교미술사엔 무불상시대가 있었다. 석가모니께서 열반하신 후 500년 동안 부처님의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하지 않고 탑·보리수나무·법륜·사자상 등으로 대신해서 나타내던 시기를 일컫는다. 옛 사람들은 위대한 영혼은 감히 형상으로 나타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에 간직하는 법을 알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어도 지워지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닐는지.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위대한 것을 마음에 간직할 줄도 모르고, 자신의 마음을 믿지도 않는 현대인이다. 생각해보라. 스님의 거룩하고 청정한 생애와 가르침보다 더 큰 사리가 어디에 있는가. 정념당 뒤꼍에 쌓인 장작더미에서 그 가르침을 찾을 수는 없는가. 백련암을 내려오는 길은 적적하다. 이런 때는 산새라도 울어주면 좋으련만. 적막이야말로 병든 세상이 우는 가장 큰 울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태그:#가야산 , #해인사 , #백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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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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